300화. 시오론 왕국 (3)
라이구는 유지한과 민유리에게 붙잡힌 동료들을 바라봤다.
상처를 입긴 했지만 시간만 충분하다면 멀끔하게 치료할 수 있을 상처.
저 인간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인지 저들 중 누구도 살인을 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확실히……. 소문과는 다르군.”
“소문?”
“20여 년 전, 바람과 자연을 모두 져버린 실프는 악령으로 변해버렸다고 들었다.”
—캬아악! 어떤 빌어먹을 놈이 그딴 망언을?!
실프는 몸을 크게 부풀리며 화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엘프들은 모두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게 공격이나 위협을 가하는 행동이 아님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저거 정말로 실프가 맞아?”
“틀림없어. 단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 내 기억 속에 있는 실프와 똑같아.”
“하지만 에르나 님을 꼬드겨 납치했다는 그 악령이…….”
“평범한 정령처럼 보이잖아.”
상상하던 악령과는 다른 실프의 외견과 행동.
자리에 모인 엘프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물결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결은 이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무기를 쥔 그들의 고뇌를 부추겼다.
그들끼리 충분한 대화가 이뤄진 후, 유지한은 부러진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은 이동하는 게 좋겠어. 사람이 몰려올 것 같으니까.”
나무가 몇 그루씩이나 꺾여버릴 정도로 요란하게 진행된 전투.
이곳에 모인 레인저들이 본래의 위치로 복귀하지 않는다면 다른 인력이 파견될 터였다.
그 말을 이해한 라이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려라.”
라이구가 뒤에서 대기하는 레인저 중 5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는 먼저 부대로 복귀해서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려라.”
“혼자서 괜찮겠어?”
“내가 죽으면 복수를 부탁하마.”
“……부대에는 뭐라고 말하면 될까?”
“몬스터 무리의 침입을 막아냈다고 해. 나무를 부순 건 내 책임으로 하고,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인간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
“너 혼자 독박 쓰려고? 그냥 싸우다가 다 같이 실수했다고 쳐.”
“마음대로 해라.”
사사삭!
명령을 받은 레인저들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뒤이어 라이구는 유지한 파티의 옆에 쓰러져 있는 엘프들을 가리켰다.
“기절한 엘프들을 데리고 내 뒤를 따라와라.”
“너희가 정말로 원만한 대화를 원한다면 그 이상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붙잡힌 동료들을 바라보는 라이구와 엘프들의 얼굴에 분함이 깃들었다.
시오론 왕국을 수호한다는 레인저가 되어서는 그보다 훨씬 수가 적은 인간들에게 제압당했다니.
자존심이 너무 높은 나머지 견디기 힘들 정도의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엘프도 있었다.
“얘들은 지금 너희가 데려가도 돼.”
“뭐? 인질을 먼저 풀어주겠다고?”
“그래. 딱히 상관없어.”
완벽하게 제압된 인질을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바로 풀어주겠다?
저들을 왕국의 적이라고 가정한다면 멍청한 걸 뛰어넘어 너무 대담하기까지 한 결정이었다.
고작 인질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상하다, 이상해…….’
왕녀의 정령이라는 신분에서 희대의 악령으로 역사에 기록된 실프.
그런 실프와 계약을 맺고 새로운 계약자가 된 인간.
그리고 그 인간 일행이 선보인 강력한 무력까지.
“……출발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저들이 시오론 왕국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듣기 전까지 라이구는 그 무엇도 미리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
유지한 파티가 라이구를 따라 도착한 곳은 낡은 움막이었다.
정말 급할 때 간신히 비바람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지어진 공간.
외부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반대쪽 벽으로 바람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돈 없는 거지조차 거부할만한 집을 보고 실프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구! 설마 이 낡아빠진 게 너희 집은 아니지?
“푸흡!”
“커흐흠…….”
실프의 질문에 작은 웃음을 터트리는 레인저들.
개그 코드가 맞아떨어진 것인지 나름 심각한 분위기에서 터져 나온 웃음은 곧 모든 엘프에게 전염되었다.
바로 옆 사람마저 입꼬리가 씰룩거리자 라이구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벌겋게 달아올랐다.
“헛소리! 여긴 레인저들이 훈련 도중에 쉬어가는 쉼터일 뿐이다.”
—너 어릴 때 이렇게 음침한 비밀 기지 같은 걸 좋아했잖아.
“그, 그건…….”
—이런 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구만? 우히!
실프의 웃음소리를 듣고 과거의 일을 떠올린 라이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뭇가지를 아주 어설프게 엮어서 만들었던 초라한 비밀 기지.
그 비밀 기지로 3왕녀 에르나 하스를 초대했던 기억.
——무척 근사한 비밀 기지네!
정말로 비밀 기지에 방문해준 그녀가 근사하다며 칭찬을 해준 기억까지.
그때의 기억은 라이구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감상에 잠겨있던 그는 이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편하게 앉아라.”
“앉을 곳이 없는데.”
“……그럼 이대로 말하지.”
목을 한번 가다듬은 라이구가 매섭게 뜬 눈으로 유지한을 바라봤다.
“너희는 대체 누구냐.”
“보다시피 인간이지.”
“시오론 왕국에 방문한 목적은? 미리 말하건대, 여기가 시오론인지 모르고 왔다는 대답은 하지 마라.”
“당연히 알고 왔어. 우리는 지금 인간들을 찾고 있다.”
“인간? 너희 같은 인간 말인가?”
“인간은 맞지만, 그루디아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인간들.”
다른 차원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라이구가 얼굴을 찌푸렸다.
유지한은 그 반응을 보고 그의 머릿속에 차원이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보았다.
‘레인저들을 이끄는 엘프가 이렇다면……. 평범한 엘프들도 별반 다르지 않겠어.’
일반인보다는 왕국의 내부 정보나 기밀에 훨씬 더 가까운 신분인 레인저들.
그들조차 차원의 개념이 없다면 그루디아의 인구 대부분도 모른다는 뜻이리라.
따라서 유지한은 라이구에게 차원 이동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건넸다.
“그루디아가 아닌 다른 차원? 그,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한다고?”
“존재한다.”
“에르나 님께서는 너희가 말한 지구라는 곳으로 가셨다는 말인가?”
“찍찍! 잘 이해했군.”
3왕녀는 사악한 악령의 속삭임에 빠진 게 아니라 왕위를 둘러싼 암투를 피해 도망쳤다.
그 와중에 갑자기 발생한 차원 이동에 그녀와 그녀를 따르던 이들이 모두 휘말렸고.
도착한 장소는 그루디아가 아니라 철저히 인간들이 중심인 세계.
텁!
진실을 접한 라이구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땅바닥을 내려다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진이 일어난 듯 빠르게 흔들리는 눈동자.
지금 접한 이야기가 정말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검토하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다.”
“믿기 힘들어도 일단 믿어. 그래야 다음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시오론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너무 편한 설정이잖아!”
“이쪽이 아니라 그쪽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인 걸 어쩌겠어?”
“그럴 수가……!”
—라이구! 역사에는 뭐라고 쓰였길래 그래?
“사악한 악령 실프는 3왕녀를 조종하여 시오론 왕국을 차지하려고…….”
시오론 왕국에서 태어난 엘프에게 필수 교육처럼 여겨지는 역사.
실제 시오론의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모종의 이유로 바람의 정령에서 사악한 악령이 되어버린 실프.
계약자인 에르나 하스를 제 마음대로 조종한 악령은 암암리에 시오론 왕국의 점령 계획을 세웠다.
왕가에 남은 사람들은 에르나 하스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후 실프의 어두운 계획마저 알아챘다.
끝에 가서는 그에 맞서 힘겹고도 어려운 전투를 치러 승리했고.
패배한 악령은 에르나 하스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이야기.
—그 역사책, 어떤 빌어먹을 놈이 썼어?
“찍찍! 누가 지어낸 소설인지, 참으로 뻔뻔하군!”
어느 동화나 영웅담에나 적힐 만한 내용이었다.
실프에 이어 칠라까지 어이가 없어진 듯한 태도.
아까부터 칠라를 조금씩 힐끗거리던 라이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너도 인간인가?”
“난 친칠라다! 찍!”
“지구에는 친칠라라는 새로운 종족도 있는 거군.”
“찍, 찍찍! 그렇다! 나는 언젠가 인간을 따라잡을 위대한 종족의 일원이다!”
“여태껏 몸 전체가 털로 덮이고도 우리말을 하는 종족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신기한 얼굴로 칠라를 살펴보는 라이구.
그루디아에 존재하지 않는 친칠라 덕분에 지구의 존재에 신뢰성이 더해졌다.
그러자 무언가 대꾸를 하려던 민유리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굳이 그의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너희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에르나 님은 악령에게 조종 따위를 당한 적이 없는 건가.”
—악령 자체가 지어낸 말이라니까?
“……한때는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에르나 님과 정령인 너와도 교류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너무 많은 사람이 에르나 님을 손가락질했다.”
평소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어 외부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던 3왕녀 에르나 하스.
과거 그녀와 종종 마주치며 동생처럼 여겨졌던 라이구였다.
——아둔한 3왕녀는 사악한 정령에게 조종당했다!
라이구처럼 에르나 하스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왕가의 공표를 쉽게 믿지 못했다.
그토록 인망 좋고 능력도 출중했던 여인이 정령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니!
공표가 이뤄지기 전까지 뚜렷한 전조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녀가 조종당했던 것으로 알려진 시기에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왕가의 강경한 태도와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분위기는 시민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 시오론은 앞으로 정령과의 계약을 불허한다.
——기존에 정령과 계약한 계약자들은 모두 계약을 파기하라!
——그게 싫다면 시오론을 떠나도 좋다.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한다는 목표로 피해를 본 건 왕국의 정령사들이었다.
위의 지시로 인해 그들은 왕국에 남기 위해 계약을 파기하거나 왕국을 완전히 떠나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프는 자신이 태어난 터전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향을 가진다.
결국, 누군가가 지어낸 가짜 역사 때문에 많은 정령들은 정령계로 사라져버렸다.
—포이즌, 아이시어, 루텔, 써니……. 내가 기억하던 정령들도 전부 사라졌겠어.
“…….”
—이건 조금 쓸쓸한걸.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었던 정령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소식.
내심 그루디아의 정령들과 재회를 기대했던 실프는 커다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 사악한 악령이 과연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라이구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눈앞의 실프가 악령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전부 꾸며낸 것이라는 뜻인데.
그의 눈에는 도저히 실프가 거짓을 꾸며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실프 님인가?’
역사에 기록된 악령인가.
아니면 내가 기억하던 그 바람의 정령인가.
라이구의 마음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김시후가 말했다.
“엄……. 이 아니라, 에르나 하스 님이 왕국에서 사라지고 왕이 바뀌지 않았어요?”
“선대 왕께서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얼마 뒤에 바뀌었지.”
“그게 누구죠?”
“지금까지도 시오론을 이끌고 계시는 위대한 왕, 다프릭 하스 님이다.”
다프릭 하스.
에르나 하스의 여러 남동생 중 하나이자 치열한 왕위 계승, 왕위 쟁탈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엘프.
그의 이름을 들은 김시후가 속으로 빠득 이를 갈았다.
‘그놈이 엄마를 모욕한 범인이구나.’
자신들의 권력을 더 견고하게 하고자 사라진 에르나 하스의 평가를 깎아내린 왕가.
왕이 직접 지시한 것이든, 아니면 허락한 것이든 간에.
왕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잘못된 역사가 기록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