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시오론 왕국 (2)
—라이구! 너…….
“닥쳐!”
타앗!
실프가 기억하는 라이구라는 이름의 엘프가 버럭 소리치며 유지한 파티와의 거리를 벌렸다.
갑자기 급변한 분위기에 검을 꺼내든 유지한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전생의 원수를 마주쳤나.’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법한 기세.
실프를 노려보는 그로부터 엄청난 적의가 뿜어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실프는 그런 태도에 크게 당황했다.
“수십 년 사이에 말까지 할 수 있게 되었군……. 그것이 사악한 힘에 자신을 팔아넘긴 대가인가? 이 악령!
—야! 내가 어딜 봐서 사악해?!
“우리가 진실을 모를 줄 알았더냐! 시오론은 네가 왕녀님을 강제로 납치했다는 걸 알고 있다!”
—누가 누굴 납치했다고?
“어찌 이리 뻔뻔하게도 다시 시오론에 돌아온 거냐! 왕녀께서는 어디로 간 거고!”
라이구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주위를 훑었다.
그가 실프의 계약자로 알고 있던 에르나 하스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정령이 현실에서 계약자와 따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일까.
그에 커다란 의문이 생겨나던 순간, 라이구는 깨달았다.
“네 옆에 있는 인간 남성이 새로운 계약자로군.”
—그건 맞긴 한데.
“하! 에르나 왕녀님을 버리고 갈아탄 계약자가 고작 새파란 나이의 인간이라니? 계약자를 엄중히 선별한다는 정령의 안목도 잔뜩 흐려진 모양이로군.”
“…….”
둘 사이의 대화에서 난데없이 말로 얻은 맞은 유지한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홀로 흥분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네게 버림받은 에르나 왕녀님은?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신 거지?”
—죽었어.
“……죽었다고?”
—몇 년 전에 몹쓸 병에 걸렸거든.
에르나 하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라이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실프의 말을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우, 웃기지 마……. 겨우 병으로 죽었다고? 시오론의 모든 축복을 한몸에 타고 났다고 평가받았던 그분께서?”
—믿기 힘들어도 사실인걸?
“나, 시오론 왕국의 라이구는 그딴 거짓말에 속을 멍청이가 아니다. 사실은 네가 죽인 것이겠지……. 네가 왕녀님을 죽여놓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라이구. 그렇게 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닥쳐! 닥쳐라!”
척!
라이구가 들고 있던 검을 실프가 있는 방향으로 겨눴다.
그러자 높은 나무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 사이에 숨은 엘프들이 공격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설득은 물 건너갔군.’
말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타이밍은 이미 지나간 상황.
[이글 아이]
민유리는 눈을 굴려 가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들을 훑었다.
잘 보이지 않도록 숨었다고 한들 그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위에 20명이요.”
“찍찍! 전부 받았다!”
텔레파시를 통해 민유리가 알아낸 적의 위치를 전달받은 칠라는 가장 적이 많은 방향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호열! 내 등에서 떨어지지 마라! 찍!”
“알겠어요.”
망치를 슬며시 등으로 가져간 남호열이 칠라의 털에 몸을 파묻었다.
자세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그도 흘러가는 분위기를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죽이면 안 되겠지?”
—일단은 제압만 해봐.
나무 위의 엘프들이 화살을 쏘아낸 건 그 직후였다.
피융! 피융! 피융!
공기를 무섭게 갈라내며 아래로 떨어지는 화살들.
하나같이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뾰족한 화살촉에 깃든 마력은 공격에 예리함과 파괴력을 훨씬 더해주고.
길쭉한 화살대에 깃든 마력은 화살의 안정감과 날아가는 속도를 높여주며.
끝에 달린 화살깃은 목표로 더 쉽게 도달하게끔 미세한 방향 조정을 담당했다.
그러한 공격들이 비처럼 내려오는 것이었다.
쿠웅!
유지한이 피한 화살이 땅바닥에 닿자 화살촉이 닿은 부위가 움푹 패였다.
단 몇 초 만에 달 표면의 크레이터와도 같은 풍경으로 변해버리는 땅.
저것이 평범한 인간의 몸에 닿는다면 살은 물론이고 뼈 자체가 으스러져 버리겠지.
‘정확히 머리를 쏘는군.’
모든 화살이 노리는 건 머리.
엘프들의 사격은 작은 오차 하나 없이 정확히 정수리를 노리고 있었다.
“유리 씨. 밑에서 저격 부탁해요.”
“네!”
“시후, 넌 나서지 마.”
“……알겠어요.”
김시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력을 선보이는 순간 왕족이라는 정체가 곧바로 탄로 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저 엘프들이 실프에게 가진 오해를 푸는 게 우선이었다.
피융! 피융!
재차 위에서 화살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유지한은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었다.
앞에서 그를 노려보던 라이구는 무서운 얼굴로 검을 들어올렸다.
팟!
하지만 유지한은 라이구와 충돌하기 직전.
바로 근처에 있던 하얀색 나무 기둥으로 뛰어올랐다.
팟! 팟! 팟! 팟!
마주 보고 선 나무 2그루의 기둥을 번갈아 발로 밟으며 유지한의 몸이 점점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가까워졌다.
그에 나무 위에 숨어 대기하던 엘프들이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피융! 피융! 피융!!
오로지 유지한을 노리고 쏟아지는 화살 세례들.
나무 기둥에 달라붙어 화살을 피해낸 그는 이내 나뭇잎이 가득한 높이에 올라섰다.
[투명화]
풍성한 나뭇잎 속에 숨은 유지한의 몸이 공기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 흠칫 놀란 엘프들은 이내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유지한의 마력과 마력 덩어리 그 자체인 실프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역시 안 통하나.’
이 엘프들은 전투에 상당히 능숙한 편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유지한은 투명화를 해제하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넘었다.
파사삭! 파사사사삭!
몸이 나뭇잎을 스칠 때마다 일어나는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가지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나뭇잎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옆으로는 유지한을 노리는 화살이 양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어림없지.’
붕!
얇게 압축된 실프의 바람을 신발 밑창에 고정하는 것으로 저공비행을 하는 것처럼 유지한의 몸이 위로 살짝 떠 올랐다.
그러자 그가 나무 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가지를 밟는 소리가 아니라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만 반복됐다.
“저쪽에 있다!”
“아니야! 이쪽이다!”
“이런……!”
몸이 가려지도록 일부러 잎이 무성한 나무로만 옮겨타는 유지한이었다.
시오론 왕국에 방문하는 게 처음일 인간이 어찌 이렇게도 능숙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나무 위에 있는 엘프들은 모두 활시위를 잡아당긴 채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민유리의 화살마저 위로 날아들었다.
“으악!”
“조심해! 밑에서 온다!”
마력 화살을 얻어맞고 신음을 토하는 엘프들.
재빨리 몸을 숨겨보지만, 움직임이 둔해진 부상자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민유리였다.
[형태 변화 - 끈끈이]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내려와.”
“꺄아아악!”
어느 엘프의 다리에 박힌 마력 화살은 강력한 점성이 생기며 끈적해졌다.
떼어내래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화살에 결국 엘프의 몸이 질질 끌려 내려왔다.
그렇게 끌려온 엘프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몸으로 직접 경험한 그녀의 마력에서 도저히 메꿀 수 없는 격차를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어림잡아 3급 영웅 수준인가.’
유지한은 날아다니는 화살을 통해 엘프들의 수준을 파악했다.
아마도 카를렘에서 마주쳤던 기사단장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왕국의 경계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이런 솜씨를 가졌다면.
적어도 평균적인 무력 수준이 카를렘보다는 훨씬 높은 것이겠지.
“일단 1명.”
“앗!”
퍽!
기습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유지한이 숨어 있던 여자 엘프의 목덜미를 팔꿈치로 강하게 때렸다.
그러자 화살을 떨어뜨린 엘프의 눈이 까뒤집히며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거렸다.
유지한은 기절한 그 엘프의 목덜미를 감싸듯이 쥐고는 앞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모두 정지.”
“…….”
“…….”
“…….”
나뭇잎 사이에서 빠져나온 유지한을 향해 활을 겨누는 엘프들.
하지만 기절한 엘프를 방패로 내세운 그를 섣부르게 공격하지는 못했다.
“이제 대화를 해보자고.”
“……대화라니?”
“오해가 있으면 말로 풀어볼 수 있겠지.”
—맞아! 어린 엘프 놈들이 하나같이 성급해서는!
대화를 요청하는 유지한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실프.
하지만 엘프들은 그것이 아주 역겹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적과 대화 따위는 하지 않는다!”
“큭! 정말 미안하다, 리엔!”
피융!
자리에 멈춘 유지한을 향해 다시금 날아오는 화살들.
동료가 사로잡혔는데도 전보다 강력한 마력이 담겨있는 화살에는.
그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적을 처치하겠다는 마음이 실려 있었다.
“융통성이 없네.”
위력이 커졌어도 화살은 화살일 뿐.
한때 회피 훈련을 지겹다시피 즐겼던 유지한에게는 닿지 않았다.
팍!
상체를 가볍게 꺾어 공격을 피해낸 그가 기절한 엘프를 힘껏 던졌다.
인질을 보고도 가장 먼저 화살을 쏘아낸 엘프의 방향이었다.
“엇!”
날아오는 몸을 반사적으로 안아 드는 남자 엘프.
그가 황급히 여자 엘프의 의식을 확인하려는 순간.
“컥!”
그 또한 유지한에게 머리를 얻어맞아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기회다……!’
유지한을 저격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엘프는 숨을 죽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는 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태.
그런데 그때 그가 타고 있던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
발밑에서 울리는 진동 탓에 조준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가 나무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쿠웅—!!
이미아가 주먹으로 나무를 두들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뿌리 근처에서부터 가지 끝까지 전달되는 엄청난 충격량!
이미 주먹에 얻어맞은 나무 밑동은 반파된 상황이었다.
우지끈!
결국, 도끼질이 아닌 주먹질로 무너져내리는 거대한 나무.
“저, 저게 뭐야!”
그 어떤 도구의 도움 없이, 오직 순수한 힘만으로.
이미아는 주먹으로 베어낸 나무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도 계속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녀의 다음 행동은 더 가관이었다.
부우우우우웅——!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것처럼.
이미아가 크게 원을 그리듯이 나무를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콰과과과광!
한 번의 스윙으로 왕국의 경계를 장식하던 하얀 나무들이 순식간에 3그루 이상 꺾여버렸다.
두 번째 스윙으로 기둥의 절반이 날아간 나무는 5그루를 넘겼다.
들고 있던 나무가 부러지면 그 즉시 꺾어진 다른 나무를 들고 휘두른다.
40년, 50년,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시오론 왕국을 장식했던 나무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순간이었다.
“안 돼! 소중한 나무들이!”
“다, 당장 멈춰!”
왕국의 상징 중 하나이자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가 생명을 잃어가는 광경.
레인저들은 물론이고 밑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라이구마저 그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기절한 엘프를 데리고 나무에서 내려온 유지한이 말했다.
“조금 심한 거 아니야?”
“너처럼 올라가기 귀찮아서.”
쿵!
이미아가 부서지기 직전인 나무를 땅에 내려놓고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에 쓴웃음을 지은 유지한이 땅으로 내려온 엘프들을 바라봤다.
레인저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엘프들.
잔뜩 긴장한 그들은 모두 리더로 보이는 라이구의 뒤에서 활을 조준하고 있었다.
“계속할까?”
“…….”
“다음은 봐주지 않아.”
“……이게 봐준 거라고?”
“많이 봐준 거지. 이 난리 통에 1명도 안 죽었으니.”
부정할 수 없는 대답에 엘프들은 하나같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