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시오론 왕국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던가.
“농담이지?”
—어라? 농담처럼 들렸어?
“진짜 시오론 왕국이라고?!”
—진짜야!
다시 눈높이로 내려온 실프의 대답에 김시후는 침묵했다.
지구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루디아는 그리 작은 세계가 아니었다.
폐쇄적인 국가가 많은 덕분에 그루디아 출신의 이종족들도 모든 국가를 알고 있지는 못했어도.
면적만큼은 이전에 방문했던 카를렘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넓은 땅에서 하필이면 시오론 왕국 옆에 도착했다고?’
——시오론 왕국에는 가지 마.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야.
시오론 왕국의 하녀였던 마일리는 김시후에게 그곳을 최대한 피하라고 조언했다.
그가 사라진 왕녀의 핏줄이니만큼 어떤 일에 휘말릴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국에서 벌어졌던 암투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했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조언이었다.
김시후를 아끼는 그녀가 가장 우선순위로 두는 건 그의 안전이었으니까.
‘냉정하게 생각하면, 마일리 누나의 말대로 가지 않는 게 맞아.’
지금 유지한 파티에게는 현시대의 시오론 왕국에 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왕위 계승을 위한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끝내 왕좌를 차지한 것이 누구인지.
새로운 왕이 살아남은 형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했는지.
현재 왕국 내부의 분위기가 어떤지조차 알지 못했다.
부족한 정보로 섣부르게 행동하면 위기를 가져오는 법.
안전을 위해서라면 마일리의 말처럼 왕국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그렇지만…….’
김시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20년도 더 전에 시오론 왕국을 떠난 3왕녀의 자손, 그게 그였다.
지구에서는 전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신분이었지만, 그루디아라는 차원에서는 이 신분이 강력한 무기로 작용할 수 있을 터!
이건 마일리의 조언을 들었을 때부터 떠올렸던 내용이었다.
‘엄마가 왕국을 떠난 이유는 왕위 때문이었지.’
과거 에르나 하스가 왕국을 떠났던 이유는 오직 하나.
관심조차 없는 왕위 쟁탈전에 휘말리기 싫어서였다.
——에르나 님은 왕위 문제만 아니었다면 왕국을 떠나지 않았을 거야.
능력이 출중하다는 이유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는 이유로 그녀를 견제하던 형제자매들.
그들을 피해서 달아나던 와중 몇 가지 사고에 휘말리며 겪게 된 것이 차원 이동이었다.
“지한이 형! 마일리 누나는 시오론 왕국이 그루디아 전체를 놓고 봐도 상당한 번영을 이룬 곳이라고 했어요.”
“그래. 나도 네 옆에서 들었어.”
“그 왕국의 힘이라면 사라진 원정대원을 찾아내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겠죠.”
종족이나 서로 다른 이념 따위를 중심으로 세워진 여러 국가가 존재하는 그루디아인만큼.
누군가를 찾고자 한다면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세력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리라.
실제로 카를렘에서도 요거 상단과 카븜의 조력까지 더해짐으로써 편의를 제공받거나 다른 영웅들에게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건 시오론 왕국을 제외하고서 찾기로 했잖아.”
유지한 파티가 그루디아로 가져온 물건 중에는 영웅부에서 건네준 아티팩트와 보석 따위가 있었다.
그루디아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품 따위를 거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현지인의 도움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다만 마일리의 조언과 김시후를 생각하여 거래 대상으로 고려하는 명단 중에는 시오론 왕국이 빠져있었다.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곳을 놔두고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흠.”
“잘 모르는 국가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어요.”
“반대로 마일리 씨의 걱정처럼 매우 적대적일 수도 있겠지.”
“만약 그런 낌새라도 느껴지면…….”
탁!
김시후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판을 싹 엎어버려야죠.”
김시후가 막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지켜봐 왔고.
지금까지도 부모처럼 그를 걱정하는 마일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점.
바로 지금의 김시후가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에 유지한은 씩 웃어 보였다.
“자신감 좋다.”
“가실 거예요?”
“오케이. 한번 가보자고.”
“마일리 누나한테는 나중에 사과드려야겠네…….”
절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일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시오론 왕국으로 정해졌다.
*****
“찍찍! 남호열! 힘들면 바로 말해라.”
“고, 고맙습니다.”
“그 대신 다음에 방패를 만들 때는 더 크고 멋지게 만들어줘라! 찍!”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길을 걷는 칠라는 남호열의 옆에 딱 붙어있었다.
일행 중 신체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그를 언제라도 보호할 수 있게끔 준비하는 것이었다.
“호열 씨. 얼마 전에 [투명화] 스킬이 부여된 팔찌에 균열이 생겼는데요.”
“아, 그건 인비저블 버드의 특성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용 횟수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태가 더 나빠질 거예요.”
민유리는 살짝 금이 간 팔찌를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전투에서 종종 요긴하게 사용된 팔찌는 점점 그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제가 이번에 챙겨온 깃털로 한 번 정도 수선할 수는 있어도, 이미 부서지기 시작한 이상 오래 가진 않을 겁니다.”
“최대한 아껴서 사용한 건데도…….”
“그런 이유로 귀하지만 잘 선호되지 않는 아티팩트 중 하나죠.”
처음부터 사용 기한이 존재하는 아티팩트.
거기에 상대에 따라 마력이나 후각 따위로 위치를 파악 당할 수 있으니.
보통 수준이 높은 영웅들은 선호하지 않는 능력이기도 했다.
“아끼지 말아요. 아끼다 똥 되니까.”
이미아는 아쉬워하는 민유리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건넸다.
“미아 씨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쟤요? 쟤는 아티팩트를 힘으로 죄다 부숴 먹어서.”
“……야, 유지한.”
유지한이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입술을 삐쭉 내미는 이미아였다.
기껏 잊고 있던 과거였는데.
“그때 미아가 케로즈 예산을 참 많이도 깎아 먹었죠.”
“조용히 해.”
“박중섭 길드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장면은 꽤 고소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 ……저급 아티팩트만 아니라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부정할 수 없었던 이미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로서는 그 당시 일에 대해 유지한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있기도 했다.
이미아의 아티팩트가 망가진 사건이었지만, 그 일로 케로즈에서 핀잔을 받은 건 유지한이었으니까.
그 이유는 서포터였던 그가 이미아를 잘 받쳐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조금 부럽네…….’
과거 함께했던 기억을 공유하며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유지한과 이미아.
민유리는 그런 두 사람에게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과거라고는 오로지 괴냥이에 미쳐있던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기억하는 곳이야. 역시 그때랑 똑같네!
“20년이 넘어도 변하지 않은 거구나.”
—엘프들은 안정을 추구하고 변화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엄마는 조금 다르던데?”
—그래서 독특한 엘프였지. 왕국의 장로들은 매번 언짢아했지만 말이야! 우히히!
앞장선 실프를 따라 걷는 김시후가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린 시절부터 왕국을 몰래 빠져나오곤 했던 어머니가 종종 산책을 다녔다는 곳이 눈앞에 있었다.
—저기, 저쪽에 있는 꽃 보이지?
“어디? 저거?”
—그루디아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에르나가 심었던 꽃이야.
“저렇게나 자란 건가…….”
바닥에서 자라난 초록색 줄기가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팔뚝보다 굵은 꽃.
커다란 노란색 꽃잎은 김시후의 눈높이와 비슷할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때 문득 궁금한 게 생긴 남호열이 말했다.
“이 세계의 식물들은 죄다 저렇게 큰 겁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많이들 그렇더라고.
그루디아의 식물은 지구의 것과 비교했을 때 크기가 대체로 큰 편이었다.
지구와 비슷한 종의 식물을 키우더라도 훨씬 더 크게 자라곤 했다.
유독 마력이 풍부한 환경 때문이었다.
‘어쩐지 햇빛에서도 마력이 느껴지더라니.’
마력을 품은 토양뿐만 아니라 내리쬐는 햇볕에서도 느껴지는 마력.
넘치는 영양소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포용력이 큰 식물들.
이런 곳에서는 뭘 기르던 크게 자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는 유지한이었다.
—그것보다 슬슬 준비해. 이제 곧 시오론 왕국의 영역이니까.
시야를 가리는 수풀을 뚫어내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강을 넘어섰다.
그 뒤에 등장한 건 도화지처럼 껍질이 하얀색인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지역이었다.
가지에 달린 나뭇잎마저 하얗게 자라난 나무들은 다른 나무들과 눈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
그것은 시오론 왕국이 왕국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영역을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자리에 멈춘 유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결계?”
—결계랑 비슷한 마법이야.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마력이 왕국의 경계를 덮고 있었다.
지구에서 MA를 관리하기 위한 결계와 비슷한 종류의 마법.
하지만 지구의 것처럼 두껍지는 않았다.
“몬스터를 막아내기 위한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거지?”
—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 근처의 마법사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챌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음……. 우리가 누군지, 그리고 목적을 물어보겠지? 옛날엔 그랬어.
에르나 하스가 왕국에 머무르던 시절.
외부인의 접근 시에는 그들의 신분과 목적을 묻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시오론 왕국의 기조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걱정 말고 들어가. 날 기억하는 엘프들이 있을 테니까 문제없어!
무려 왕녀가 계약한 정령이었던 실프였다.
에르나 하스가 그루디아에서 활동하던 시기, 왕국에는 젊은 엘프가 많았다.
나이를 먹어서 자연으로 돌아간 엘프가 있다고 한들 분명 실프를 알아보는 엘프도 있겠지.
고개를 끄덕거린 유지한은 시오론 왕국의 결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근처에서 어떤 소리가 발생했다.
팅!
좌우로 팽팽하게 당겨지던 고무줄이 툭 하고 끊겨버리는 듯한 소리였다.
“……느낌이 안 좋네요.”
“찍찍.”
철컥!
민유리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냈다.
분명 그들의 입장과 동시에 발생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칠라 또한 방패를 꺼내 들고 남호열을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앞에서 뭐가 와요!”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유지한 파티를 향해 한 무리의 엘프들이 다가왔다.
팟! 파밧! 팟! 팟!
높은 곳에 자라난 하얀 나뭇가지들을 발로 밟으며 이동하는 엘프들.
그들의 몸이 하얀 나뭇잎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주변 지형을 제집처럼 누비는 그들의 몸놀림은 무척 재빠르고도 가벼웠다.
‘엄청 경계하고 있군.’
엘프들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유지한 파티를 둥글게 에워쌌다.
목표물이 어디로도 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누군가가 홀로 나무 위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너희는 누구냐?”
양쪽에 뾰족한 귀를 보유한 금발의 남자 엘프.
폭이 얇고 기다란 검을 든 그는 허가 없이 왕국 안으로 들어온 유지한 파티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지한은 들려오는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그루디아의 말도 이해가 되네.’
차원 이동의 장점 중 하나.
이동한 차원의 언어가 마치 모국어처럼 들려온다는 점.
아무런 노력 없이도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 너 설마 라이구야?
“방금 목소리는 누구냐!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다가온 엘프를 한눈에 알아본 실프가 유지한의 머리 위로 튀어 올랐다.
“헛!”
남자 엘프는 실프를 발견하고는 흠칫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동자.
“실프?”
—그래! 나 실프라고!
20년도 더 전에 만났던 정령을 알아본 것이었다.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자 실프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그 꼬맹이가 엄청 컸구나! 우히히!
한때 알고 지내던 엘프를 만났으니 이다음의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도 있으리라.
“나무 위의 모든 레인저는 들어라!”
—엉?
허나 기대와는 달리 날이 잔뜩 서 있는 목소리에.
시계방향으로 신나게 몸을 굴려대던 실프가 그대로 멈췄다.
“지금부터 우리의 왕국을 어지럽혔던, 사악한 정령을 토벌한다!!”
—뭐라?!
“……?”
쟤 지금 뭐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