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그루디아 (3)
“좌표 점검 끝났습니다.”
“마력 안정화 작업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확인해주세요.”
장비를 고루 갖춰 입은 유지한 파티가 영웅부에 모였다.
그루디아로 이동하는 인원은 칠라와 남호열을 포함한 6명뿐.
그들 주위에서 마지막 안전을 점검하는 영웅부 직원들은 그들보다도 훨씬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호열 씨. 어때요?”
“막상 와보니까 생각만큼 떨리진 않습니다.”
“근데 자세는 왜 그래요.”
“호, 혹시 모르니까요?”
양손으로 망치를 들고서 언제라도 휘두를 준비를 하는 남호열.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뒤, 민유리는 가방에서 드론을 꺼냈다.
영화 작업을 함께 했었던 HST 스튜디오의 하성태가 전달해준 촬영용 드론이었다.
——여러분이 제공해주신 드리미움으로 렌즈를 제작한 드론입니다.
——제발! 부디 이번만큼은 촬영하게 해주세요!
이세계에서의 촬영이 불가능하여 슬프게 울부짖은 전력이 있던 하성태.
이번에는 차원 이동 과정에서 렌즈가 고장 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는 그였다.
“아빠. 나 이제 가야 해.”
—미아야! 잘 다녀오렴!
이미아는 아버지와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지한은 그 옆으로 살짝 끼어들며 말했다.
“다음에 돌아오면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지한 씨, 우리 딸을 부탁해! 생각보다 더 여린 아이야.
“……?”
여리다?
철근도 맨손으로 찢어버릴 수 있는 이미아가 여린 여자라니!
유지한이 생각하는 여림의 기준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너 방금 이상한 생각 하지 않았어?
“아무것도.”
묘하게 예리한 이미아의 지적을 자연스럽게 흘려버린 뒤.
유지한은 양지철과 얼굴을 마주 봤다.
“다녀오십시오.”
“예.”
“설령 다른 사람은 구하지 못하더라도, 여러분만큼은 돌아오리라고 믿겠습니다.”
“그런 섭섭한 말씀을. 못해도 1명 이상 데려올 겁니다.”
씩 웃는 유지한의 미소를 끝으로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었다.
우웅!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하얀빛이 뿜어졌다.
사람, 건물 할 것 없이 유지한의 눈에 담기던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 빛에 몸이 휘감긴 유지한이 눈을 한번 깜박였을 때.
그는 다시 차원의 경계에 도착해있었다.
‘저걸 부수면 뭐가 나오려나.’
어째서인지 그 어디에도 출입구가 존재하지 않는 좁은 단칸방.
벽을 부순 뒤에는 무엇이 나올지 궁금해지는 공간이었다.
차원 이동을 난생처음 겪는 남호열은 입을 쩍 벌리고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유리 누나! 카메라는요?”
“놀랍게도 정상이야.”
“찍! 이번에는 영화가 나오는 건가?”
“그럴걸?”
영화가 나온다는 말에 칠라가 눈을 반짝였다.
잔뜩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칠라는 말문이 트인 이후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었으니까.
“주인아! 날 찍어서 친칠라의 위대함을 널리 알려야 한다! 찍찍!”
—돼지처럼 많이 먹는다는 거?
“찍? 방패로 맞고 싶나?”
—하지만 그런 것밖에 안 찍힐 텐데! 우히히!
“찍!!”
후우웅!
진짜로 방패를 꺼내서 크게 휘둘러대는 칠라.
그 방패를 피해서 이쪽저쪽 날아다니는 실프.
파티원들이 녀석들의 다툼을 구경하는 사이 유지한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차원 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이전에도 그랬듯 차원 마법이 먹혀들지 않는 그는 전용으로 제작된 스크롤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것도 그 종이와 관련이 있는 건가?’
유지한은 문득 죽음의 섬에서 찾아냈던 여행자의 종이를 떠올렸다.
카를렘이라는 차원의 무력이나 사회 안정성, 발전 가능성 따위를 점수로 매겨놓았던 그 의문스러운 종이.
거기에 적혀있던 알 수 없는 글자들과 그것을 모국어처럼 읽어냈던 유지한은 그 내용을 지금까지도 글자 하나라도 잊지 않았다.
‘가능성은 있을지도.’
오로지 혼자서만 읽을 수 있던 글자와 그 혼자만을 위해 별도의 수정이 필요한 차원 마법.
거기에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억측까지는 아니리라.
샘플링이 이런 사사로운 고민에도 해답을 제공해준다면 참 좋겠지만.
오로지 몸을 직접 움직이는 동작에만 적용되니 아쉬울 뿐이었다.
——달라지지 않았다고? 아니야.
——지한 오빠의 능력은 실시간으로 발전하고 있어.
차원의 경계로 출발하기 전에 만났던 니로치는 말했다.
유지한의 고유 스킬인 샘플링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완성도가 훨씬 높아졌다고.
카를렘에서의 경험이 그의 고유 스킬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샘플링의 능력은 약 4개.’
1. 특정한 조건의 가능성이나 확률을 계산하는 능력.
2. 타인의 마력을 이용하여 타인의 기억을 읽어 들이는 능력.
3. 환각 마법이나 정신 조작 따위에 저항하는 능력.
4. 원하는 결과에 이르는 잔상을 보는 능력.
오랜 기간 샘플링의 전부라도 여겼던 1번은 니로치의 강력한 권유로 봉인해둔 상황.
현재 그는 2번과 4번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지.’
1개의 고유 스킬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능력이 너무 많다.
근래 미국에는 고유 스킬을 별도로 연구하는 연구소가 세워졌다는데.
그들이 샘플링을 알게 된다면 득달같이 달려들지도 몰랐다.
“지한. 뭐해?”
“아, 미안.”
또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유지한은 이미아의 부름을 듣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부웅!
차원 이동 스크롤이 하나둘씩 차원의 경계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크롤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은 이내 전부 바닥으로 옮겨졌다.
그 뒤에 시작되는 건 작은 지진.
쿠구구구구…….
이번에는 하얀빛이 아닌 칠흑 같은 어둠으로.
유지한의 시야가 검게 물들어갔다.
‘전부 사라졌다.’
파티원과 실프마저 사라지고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유지한.
모든 중력이 사라진 느낌을 맛보던 그는 눈을 여러 번 껌벅였다.
눈을 감으나 뜨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짓도 슬슬 익숙해지는 건가.’
카를렘을 다녀온 것까지 합하면 이번이 무려 3번째 차원 이동.
새롭다기보다는 익숙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그였다.
—사…….
그리고 모든 차원 이동에서 겪었던 것처럼.
어느 여인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그 여인의 존재감을 느끼자마자 유지한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닥쳐.”
꽈드드득!
대답을 뱉자마자 그가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겪었던 것처럼 중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쿵!!
예상했던 대로 강력한 힘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이전처럼 기이한 소음은 들리지 않았으나 몸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힘만은 변함이 없었다.
허나 보이지 않는 바닥에 두 발을 디딘 유지한은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유지한은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봤다.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 기묘한 현상을 일으킨 여인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아들……. 아들…….
—사랑하는 우리 아들…….
—우리, 우리 아들…….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을 부르짖는 여인.
유아 시절의 기억이 사라진 유지한에게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은 오직 사진 속에만 존재했지만.
이것이 부모라는 존재가 떠오르는 포근한 목소리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날 위해서 주, 죽어.
——죽, 죽어줄 수 있겠니?
하지만 일반적인 어머니가 저딴 말을 뱉지는 않겠지.
어쩐지 차원을 넘나들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나빠진 유지한은 중얼거렸다.
“난 당신 같은 엄마 둔 적 없어.”
어머니의 이름은 박기주.
과거 MA에서의 사고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했다는 30대 프리랜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해서 제대로 된 장례마저 치러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딴 영문 모를 공간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누군가가 자신을 아들로 착각하는 거라면.
착각은 그만두고 갈 길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하, 하지만…….
“……?”
—내, 내, 내, 내…….
기계음처럼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문장으로 완성된 대답을 듣고.
—내가 박기주인걸.
유지한은 온몸에 주고 있던 힘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
털썩!
유지한은 바닥에 양쪽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었다.
시야에 담기는 건 캄캄한 어둠이 아닌 파란색 잔디밭.
땅을 짚은 손바닥을 타고 흙이 머금은 습기와 얇은 잔디들이 짓눌리는 촉감이 느껴졌다.
“허어억!”
허나 유지한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과호흡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주 거친 호흡.
대충 벌린 입에서는 투명한 침이 흘러나오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지한! 지한!
“찍! 대장?!”
갑작스러운 사태에 깜짝 놀란 파티원들이 유지한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체감상으로는 고작 1초 만에 유지한의 상태가 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웅!
실프는 식은땀을 흘린 유지한의 몸으로 시원한 바람을 일으켰다.
약 30초가 지나서야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는 유지한이었다.
“잠깐 나 좀 봐.”
홱!
이미아는 양손으로 유지한을 얼굴을 붙잡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허나 안정을 되찾은 그의 눈동자에는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넘어오는 순간에 뭐가 보였어.”
“무슨 소리야?”
유지한은 자신이 겪었던 현상을 짧게 설명했다.
낯선 여인의 목소리와 몸을 찍어누르는 힘까지.
그런 현상을 전혀 겪지 못한 파티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일단 잊자.’
유지한은 복잡해진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은 몸을 움직일 차례였다.
“지금 움직여도 괜찮겠어요?”
“가만히 있는 게 더 위험해.”
유지한은 그렇게 대답하며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 작은 꽃이 자라 있을 뿐인 잔디밭.
그 어디에도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 않아 자연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장소였다.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뭐가 이렇게 커?’
유지한은 천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두꺼운 파란색 기둥이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 끝에서 찾아낸 건 파란색 가지가 옆으로 퍼져나가는 광경이었다.
—평범한 나무네.
“이게 평범?”
—딱히 특별한 편은 아니야.
영화나 만화 속에나 나올법한 파란색 나무를 보고도 무덤덤한 실프.
그루디아에서 에르나 하스와 함께 긴 시간을 보냈던 정령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장면이었다.
“괜찮아요? 호열 씨?”
“이, 이거 독은 없겠죠?”
“찍찍! 먹어봐라!”
“히이익!”
남호열은 바닥에 자라난 파란색 잔디를 밟지 않고 피해 다녔다.
아직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그루디아에 도착한 건 맞아?”
—틀림없어! 느껴지지 않아?
“뭐가?”
—이 깨끗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대기에 풍부한 마력! 오로지 그루디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미 중의 진미지!
두둥!
대형 풍선처럼 몸을 아주 크게 키운 실프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우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그리운 감촉!
“찍찍! 정령아! 혹시 개똥벌레를 알고 있냐?”
—어떤 건지 알아. 괴똥벌레도 있다던데?
“지금 네 모습이 딱 동그란 개똥 같다. 찍!”
—이 들쥐 녀석이?!
한편, 유지한은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고는 한시름을 놓았다.
차원 마법의 좌표가 크게 수정되었다는 말처럼.
도착한 장소는 다크 엘프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훌륭한 길잡이가 있지.’
그루디아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던 실프가 옆에 있는 덕분에 헤맬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실프가 바닥에서 구르기를 멈추며 말했다.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뭔가 이상해.
“뭐가?”
—이 잔디가 자라는 지역은 꽤 드물거든.
파란색 잔디가 그루디아에서도 아주 특정한 지역에서만 자란다는 정보.
그것을 그립다고 말한 실프는 그 지역 가운데 최소 1곳 이상 들린 적이 있다는 뜻이 된다.
미묘한 실프의 분위기에 김시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아니지?”
붕!
하늘 위로 높게 치솟은 실프가 몸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 하얀 나무가 가득한 장소.
실프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그곳.
—저건 시오론 왕국이야.
김시후의 어머니인 엘프, 에르나 하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시오론 왕국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