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의문 (5)
하프 엘프, 한국을 구해내고 이세계에 다녀온 영웅, 그리고 실험체.
유지한은 잠시나마 귀가 잘못된 건지 의심했지만.
‘실험체는 시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저들은 분명 김시후를 실험체라고 부른 것이었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오해는 없었다.
김건오 또한 새로운 연인으로 보이는 여자 연구원의 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실험을 말하는 건지.’
사전에 따르면 실험이란 과학에서 이론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하는 일.
혹은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사용해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다뤄지는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가 실험체.
그렇다면 김시후는 과거에 진행된 어떤 실험과 연관되어 있겠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실험일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긍정적인 실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진상을 파악하기에는 주어진 단서의 양이 너무나도 적었다.
유지한은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두 연구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드디어 보여줄 거예요? 그 나무?
—때가 됐으니까. 어쩌면 서로 반응할지도 몰라.
—그 뒤에는요? 유지한 파티가 정의감 넘치는 성격이면 크게 곤란해질 수도 있잖아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내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건오 씨가 정말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한 거잖아요!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
—화내지 말고요.
—화 안 냈어.
김건오의 말과 달리 여자 연구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짜증이 서려 있었다.
왜 자꾸 옆에서 귀찮게 구느냐는 느낌이었다.
‘짜증을 낼 정도의 대화인가?’
식사 자리에서 친근하고도 자상한 아버지로 보였던 김건오와는 조금 달랐다.
옆에서 그에게 바짝 달라붙는 여자 연구원이 더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
어쩌면 직장에서는 평소보다 예민해지는 성격이리라.
—실험체와 정령을……. 달라지는 건…….
—……는 아니야. 그리고 더는…….
—그루디아에서…….
—…………….
—…………….
“젠장.”
이어지는 대화에 유지한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두 사람이 뭐라 말을 하는 거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기억을 온전히 읽어 들이기에는 마석 파편에 남아있던 마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띄엄띄엄 단어만 들리던 소리는 잠시 후 완전히 먹통이 되었다.
“실프! 힘 좀 내봐.”
—무리! 이게 최선이야.
실프를 재촉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둡고 흐릿한 기억 속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건오와 그를 껴안은 여자 연구원의 입술이 말을 하듯 위아래로 달싹이는 장면만 이어졌다.
‘모르겠어.’
입술의 모양만으로 의미를 파악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로 인해 유지한은 결국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화장실의 벽이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감상은?
“수상해. 그것도 아주 많이.”
—우히히! 역시 그렇지?
모종의 의도를 갖고 몬스터로 변한 플로른을 보여주고.
자신의 아들인 김시후를 특정한 실험에 이용한 연구원 김건오.
그가 결코 순수한 사람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
교토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3일 후.
유지한은 호텔 로비에서 김건오를 기다렸다.
그가 단독으로 대화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지한 씨.”
“아, 아버님.”
김건오가 홀로 앉아있는 유지한에게 다가왔다.
이내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혹시 실프는…….”
“여전히 말이 없네요.”
“으음.”
마지막까지 김건오에게 얼굴을 비추지 않는 실프.
이런 상황이 익숙해진 김건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떠나시는 거죠?”
“예. 슬슬 돌아가야죠.”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오후에는 라이쿠에서 보내준다는 차량을 타고 남호열을 데리러 갈 예정이었다.
‘7일 안에 얼마나 성장했으려나.’
솔직히 단기간의 교육으로 너무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다.
대장장이로서의 마음가짐이라도 배우고 온다면 이득이라고 볼 수 있겠지.
남호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즐거운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러가네요.”
김건오는 볼을 긁적이며 무척 아쉬워하는 얼굴을 했다.
오랜만에 연달아 휴가를 내어 아들 김시후와 시간을 함께 보낸 그였다.
김건오나 김시후 둘 다 바쁘게 움직였던 근래 이런 기회가 드물었을 테니 그가 아쉬워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 대화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김시후를 실험체로 불렀던 김건오와 여자 연구원의 대화.
유지한은 3일 전에 들었던 그 대화가 바로 몇 초 전에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앞으로도 아들을 잘 부탁합니다.”
김시후를 잘 부탁한다는 김건오.
후배 영웅에게 고개까지 깊게 숙이는 모습은 선배 영웅으로서의 허세, 자존심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로서의 진심만이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재능도 뛰어나고 아내가 죽고도 참 의젓했던 아들인데, 종족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할까 봐 걱정이 많았어요.”
“그만한 재능은 종족 따위로 가려지지 않죠.”
“하지만 지한 씨가 없던 과거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게 현실입니다.”
자신의 종족을 신경 쓰며 다른 길드에 섞이기 힘들어했던 김시후.
그래서 고민 끝에 직접 길드를 세우는 것이 그의 선택이었지만.
유지한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꿀잼에 공식적인 활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가 직접 도와주는 건 힘들었어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죄다 은퇴해버려서.”
은퇴한 3급 영웅인 김건오의 인맥은 대부분 그처럼 은퇴한 영웅들뿐.
김시후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시후가 지금까지 성장한 건 모두 지한 씨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찬입니다. 저야말로 시후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겠죠.”
김시후를 대화의 주제로 두고 덕담을 나누는 두 사람.
그때 유지한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몬스터연구소에서는 주로 어떤 실험을 하죠?”
“실험? 실험의 종류는 정말 다양해요. 몬스터의 피부 조직을 떼어다가 마력으로 충격을 주면서 내구도 따위를 알아보는 것도 있고, 몸에 지닌 독을 해독하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그런 실험들은 보통 기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나요?”
“실험마다 차이가 커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워요.”
“혹시 시작된지 23년이 넘는 장기실험도 있습니까?”
“23년?”
23년이라는 말에 김건오가 순간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금방 표정이 풀어지기는 했지만, 유지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김시후의 나이는 올해로 23살이다.’
굳이 김시후의 나이와 똑같은 햇수를 물어본 건 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김건오는 말했다.
“……있습니다.”
“대단하네요! 그렇게나 긴 실험이라니.”
“네.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실험이니까요.”
“어떤 실험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타깝지만 그건 조금 어렵겠네요. 연구소 내에서도 극비 사항이라.”
“그거 아쉽군요. 혹시 입에 담지 못할 만큼 비윤리적인 실험은 아니겠죠?”
“설마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못해 안타깝다는 김건오.
그리고 그의 대답에 무척 아쉬워하는 유지한.
두 사람은 모두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고, 서로의 속내를 감췄다.
‘대충 알아들었겠지.’
이것은 유지한이 건네는 일종의 경고였다.
김건오는 연구원으로서 숱한 성과를 낼 정도로 똑똑한 인물.
여기서 제시한 23년의 의미를 그가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을 터였다.
“아빠! 돌아가서 연락할게요.”
그리고 오후가 되어 라이쿠에서 보낸 자동차가 도착했을 때.
유지한 파티는 김건오와 인사를 나눴다.
“식사 정말 즐거웠어요.”
“칠라. 인사해야지.”
“찍! 잘 있어라!”
파티원들이 1명씩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유지한은 김건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
“그땐 조금 더 진솔하게 대화 나누시죠.”
부릉!
유지한 파티를 태운 자동차가 호텔을 떠나갔다.
김건오는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자동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에서 자동차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알아냈을까?”
유지한이 보통 인물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설마 김시후의 일을 언급할 줄이야.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김건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혼란은 한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
“시후야. 너 김건오 씨의 친아들은 맞지?”
“맞죠. 친자확인도 여러 번 했던걸요.”
친자확인검사에서 김건오의 아들임이 증명된 김시후.
그는 하프엘프로 태어난 만큼 여기저기에 친자확인 검사지를 제출할 일이 많았다.
덕분에 그가 김건오와 에르나 하스의 핏줄이라는 점에는 단 한 점의 의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눈매처럼 얼굴에 닮은 부분이 꽤 보이기도 했다.
‘자기 자식을 실험체로 사용한 다라…….’
연구원이라는 김건오의 신분이 있으니 조금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유지한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건.
기억 속 김건오가 죽은 아내의 고향인 그루디아를 언급했다는 것.
‘답은 거기에 있나.’
그루디아로 전이된 1급 영웅 백강천.
시안 피어스를 찾아내달라는 엔젤스 가든의 요청.
그리고 김시후의 과거와 엮인 일까지.
여러 의문이 가리키는 건 단 하나의 세계.
유지한은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내려다봤다.
[양지철 : 준비됐습니다.]
각종 서류에 도장 따위가 찍힌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
그루디아로 가는데 필요한 절차가 거의 끝났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원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을 정도.
“찍! 대장의 표정이 심각하다!”
“지한 씨? 무슨 일 있어요?”
“별거 아닙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자동차는 목적지인 라이쿠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유지한은 길 안내를 맡은 직원을 따라 건물 안쪽으로 진입했다.
거대한 망치 모양의 석상을 지나 이동한 곳은 접객실.
남호열은 그곳에서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호열 씨!”
“아! 다들 오셨습니까!”
7일 만의 재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호열은 일행을 반갑게 반겨주었다.
처음 보는 그의 앞치마 복장에 김시후는 말했다.
“그 옷은 뭐예요?”
“스승님들께 선물 받았습니다.”
라이쿠의 공동 대표인 타무라 형제를 스스럼없이 스승이라고 부르는 남호열.
그는 선물 받았다는 앞치마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묻어있는 기름때와 울긋불긋한 상처들.
7일간 나름 알찬 시간을 보낸 듯한 분위기였다.
“교육은 어땠어요?”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과장 없이 혼자였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얻을 지식을 단 7일 안에 배울 수 있었어요!”
상당히 들떠있는 남호열의 목소리.
그렇다고 타무라 형제에게 아부를 떠는 말투는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포기하면서까지 데려온 보람이 있었군.’
그런 그의 태도에 흡족해하는 유지한이었다.
“인사라도 하고 출발하려는데. 두 분은 어디에 계세요?”
“지금 오고 계시는 거로……. 아! 저기 계시네요.”
멀리서 타무라 형제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스승!”
“스승님!”
“아니! 스승은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라니까요?!”
어째서인지 남호열은 타무라 형제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