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의문
“좋은 제안 주신 건 감사합니다.”
—……어떤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유지한의 완곡한 거절 표현에 영웅청 장관은 결국 그들을 일본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포기했다.
아쉬움은 컸지만, 재물 따위로 유지한 파티의 마음을 사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저희 일본청은 유지한 파티, 그리고 더 나아가 꿀잼 길드와 원만한 관계를 맺길 바랍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의 능력 있는 영웅들과 관계를 맺어두는 건 국가기관으로서도 긍정적인 일.
유지한 또한 일본인이 되는 걸 거부했을 뿐 일본과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아, 마지막으로 비행기 테러를 해결해주신 보답 차원에서 제가 여러분께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게 뭔가요?”
—몬스터 전용 영약입니다.
“……몬스터 전용?”
—일본이 몬스터 연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건 알고 계시는지요?
“알다마다요.”
유지한은 고개를 돌려 김시후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아버지인 김건오는 일본의 교토몬스터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
한국에서 활동했던 전직 영웅인 그가 굳이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몬스터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이유는 일본이 세계에서 몬스터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전세계에서 몬스터 연구에 몰두하는 인재들이 주로 향하는 나라가 일본일 정도로 그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건 저희가 이번에 몬스터 연구의 일환으로 개발한 영약입니다.
유지한은 옆에서 영웅청 직원이 들고 오는 검은색 상자를 바라봤다.
제법 묵직하고도 고급스러운 상자의 생김새.
그것은 무거운 도끼로 내리찍어도 멀쩡할 정도의 충격 방지 마법과.
특정한 온도로만 유지되게끔 보호 마법이 걸려있는 고급 보관함이었다.
띡!
작은 버튼을 누르자 보관함의 덮개가 자동으로 열렸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유지한은 그것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몬스터만 먹을 수 있는 영약.”
—맞습니다.
“왜 이런 걸 만든 거죠?”
—설명에 앞서, 저희는 일전에 한국을 덮쳤던 아제시아의 인간들과 작은 교류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건 저도 듣긴 들었습니다만.”
영웅부의 감시 아래에서 각종 연구와 활동을 펼치는 제리와 아뎀.
몬스터를 조종하는 약물을 개발했던 그들이 몬스터 연구가 활발한 일본과 간접적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건 스쳐 지나가며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이게 아제시아처럼 몬스터의 힘을 손에 넣으려는 시도라면…….”
자칫 잘못하면 한국에서 벌어졌던 테러가 전세계로 번질 수도 있는 일.
그에 유지한은 조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그러자 영웅청 장관은 반발하듯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테이머와 펫의 성장입니다.
“진짜요?”
—아제시아에서 개발된 약물의 사용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저희가 한국보다 더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오로지 테이머와 펫의 성장을 위해 아제시아의 지식을 이용할 거라는 일본이었다.
—그리고 실제 테이머들을 통해 안정성 검증까지 끝낸 완성품이 바로 그 액체입니다.
“이걸 저희에게 주는 목적은, 칠라인가요?”
—네! 부디 칠라 님이 드셔주셨으면 해서…….
“찍!”
초코 우유라는 약물을 섭취함으로써 말문이 트인 몬스터.
칠라는 상자에 담긴 액체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뒤이어 칠라의 주인인 민유리가 말했다.
“저 영약의 구체적인 효과가 뭐예요?”
—신체 능력의 상승, 그리고 텔레파시입니다.
“텔레파시?”
—그 영약을 섭취한 몬스터는 자신이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과 생각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
—말문이 트이기는 어려워도 새로운 소통 방법이 생긴 거죠.
“흥미롭다! 찍!”
—머지않은 미래에 전세계의 테이머를 대상으로 판매될 겁니다.
세상의 모든 테이머를 위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거라는 영약.
작은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그 효과가 심상치 않았다.
지팡이를 들고 집중하던 김시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적어도 독은 없어요.”
“확실해?”
“네.”
“실프, 넌?”
—확실히 없는 것 같아.
각종 마법과 실프까지 동원하여 영약에 위험성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칠라가 거침없이 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에 놀란 민유리는 뒤에서 녀석의 털을 잡아당겼다.
“칠라! 네가 굳이 저걸 먹을 필요는…….”
“찍찍! 주인아. 말보단 생각이 훨씬 빠르다!”
“그래서?”
“저게 있으면 내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찍!”
전투에서의 효율을 위해 영약을 먹겠다는 칠라.
확실히 말을 의사를 전하는 것보다는 생각을 전달하는 게 더 빠를 터였다.
결국 녀석의 고집을 꺾지 못한 민유리는 털을 쥐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찍? 이거 맛은 있나?”
—아주 진한 메론소다 맛입니다.
“메론소다? 그게 뭔지 모른다. 찍찍.”
“메론소다라면 나도 마시고 싶은데.”
아직 일본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기지 못한 이미아가 영약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칠라는 다급하게 보관함 속에서 영약을 꺼냈다.
“이건 내 거다! 찍!”
투명한 액체가 녀석의 입속으로 흘러내렸다.
칠라의 선택이니만큼 녀석을 말리지 않았던 유지한이었지만.
그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영웅청을 엎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나쁘지 않은 맛이다! 찍찍!”
꺼억!
우려와 다르게 칠라는 트림까지 내뱉으며 입가에 묻은 액체를 닦아냈다.
그리고…….
“찍? 정말로 주인이 하는 생각을 알 것 같다!”
눈을 감고 둥근 귀를 연신 쫑긋거리는 칠라.
이내 민유리의 생각을 읽어낸 녀석이 말했다.
“지금 내 주인은…….”
“……?”
“화장실이 가고 싶다!”
“뭐?”
“참고로 소변이 아니라 큰 거다! 찍!”
퍽!
한걸음에 앞으로 달려나간 민유리가 칠라의 배에 발차기를 날렸다.
그녀의 볼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찌, 찍찍! 이 몸 칠라! 죽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야! 먹은 거 당장 뱉어내!!”
“이미 다 소화됐다! 찍!”
—우히히히! 멍청한 친칠라 같으니!
유지한의 머리 위로 떠 오른 실프는 언제 칠라를 걱정했었냐는 듯.
민유리의 발로 밟히는 칠라를 보며 비웃었다.
*****
—수차례 연습을 거치면 원하는 생각만을 펫과 교환할 수 있을 겁니다.
—향후 달리 좋은 기회로 또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텔레파시 영약에 대한 짧은 설명을 전해들은 뒤.
영웅청 장관과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 유지한 파티는 다시금 자동차에 올라탔다.
“찍…….”
자동차 안에서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민유리의 눈치를 살피는 칠라.
배를 포함한 몸 이곳저곳에 선명한 발자국이 새겨진 칠라는 손을 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손 똑바로 들어.”
“주인아! 맨날 나한테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벌 10분 추가.”
“찍찍……!”
차마 말대답은 하지 못하는 칠라가 고개를 숙였다.
실프는 칠라의 머리 위에서 콩콩 점프하며 말했다.
—우히! 쌤통이다!
“테니스공은 저리 가라! 찍!”
—뭐라?! 테니스공? 이 햄스터 녀석이!
“찍!!”
서로를 향해 투덕거리는 칠라와 실프.
이후 자동차로 몇 시간을 달리자 하늘에서는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유지한 파티가 본래의 목적지인 도쿄에 도달한 시각은 인근에 밤장사를 하는 술집 거리가 보일 때쯤이었다.
“일주일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찍! 고생 많았다!”
장거리 운전을 마친 운전사와 헤어지고.
유지한은 와타나베에게 연락을 걸었다.
잠시 후 장비가 아닌 평범한 기모노 복장을 입은 와타나베가 밖에서 그들을 반겼다.
“이 거인들, 드디어 왔구나!”
“또 뵙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서 하자.”
유지한 파티는 번역기를 준비해둔 와타나베와 함께 커다란 호텔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도쿄의 중심지에 위치한 고급 호텔이었다.
김시후는 고개를 돌려가며 상당히 넓은 1층 로비를 구경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로비에는 호텔의 직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나 넓은 곳에 손님들이 안 보이네요?”
“길드 소유의 호텔이다. 너희를 위해서 며칠간 손님을 들이지 않을 테니 편하게 있어라.”
“그게 훨씬 더 불편한데요…….”
“느하하하!”
오로지 유지한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호텔 전체를 비워둔 와타나베 요스케.
신경 쓰지 말라며 호탕하게 웃던 그가 호텔의 안쪽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나 이상으로 너희를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죠?”
“저기.”
와타나베는 한 여인이 앉아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한쪽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이쪽은 카산드라다.”
“뭐라고요?”
“카, 카산드라?!”
“일본의 1급 영웅?!”
유지한 파티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데스티니 길드의 길드장이자 고유 스킬로 타인의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가진 일본의 영웅.
오로지 가명으로만 활동하며 신상 정보가 외부에 전혀 알려진 적 없는 여인!
카산드라의 동굴이라는 점집을 운영하며 전세계의 대통령들과 재벌가의 수장 등 하나 같이 굉장한 사람들만을 고객으로 뒀다는 그녀가 눈앞에 있다니.
와타나베가 직접 소개한 이상 가짜일 리는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스티니의 카산드라예요.”
청아한 목소리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히는 카산드라.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를 접한 유지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번역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파티원들이 자신을 소개할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말했다.
“카산드라 님.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아뇨.”
“혹시 서울에 있는 카산드라의 동굴에서…….”
“어라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어도 잘 하시던 거 같은데.”
“열심히 공부 중이랍니다.”
입가에 산뜻한 미소를 띤 카산드라를 보며 유지한은 확신했다.
이 여자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고.
말로는 모르겠다고 하지만 딱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가 그때 만난 게 카산드라였구나.’
어쩐지 그때 점집에서 구경했던 유리구슬이 너무 화려하더라니!
그건 모조품이 아니라 카산드라가 보유했다는 진짜 아티팩트, 예언의 구슬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다사다난한 운명이라니…….
유지한의 운명을 두고 험난하다고 평가했던 카산드라.
점을 본 이후에 그가 부닥쳤던 상황들은 그녀의 봐준 점의 결과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참 용한 점쟁이네.’
카산드라에 대한 신뢰감이 조금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제가 여러분을 꼭 만나보고 싶어서 와타나베 님께 고집을 부렸어요.”
“커흐흠. 이제 만족하는 건가?”
“물론이죠.”
와타나베를 향해 은근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 카산드라.
그 시선을 피해 무척 어색한 얼굴을 하는 와타나베를 보며.
유지한은 두 사람이 대충 어떤 관계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다면 제가 여러분의 점을 봐 드려도 될까요?”
“엇! 정말로요?”
“오늘만 특별히 서비스입니다.”
아무나 쉽게 받을 수 없다는 카산드라의 예언.
먼저 점을 봐주겠다는 걸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그 점잖은 이미아마저 카산드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대를 드러낼 정도였다.
“그럼 개인적으로 궁금한 지한 씨부터.”
“어떤 점을 치는 거죠?”
“머지않은 미래의 일.”
“전에 했던 것처럼요?”
“무슨 말씀이실까?”
“…….”
탁!
뻔뻔한 표정의 카산드라가 손뼉을 치자 천장의 조명이 꺼졌다.
뒤이어 그녀는 어느새 가방에서 꺼낸 예언의 구슬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우웅—
축구공만 한 구슬 속에 하얀 빛덩이가 떠올랐다.
더없이 어두워진 호텔을 밝히는 유일한 빛.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 빛덩이는 이내 팔찌처럼 생긴 고리를 이뤘다.
“우와…….”
“멋지다.”
작은 진동과 함께 무지갯빛 색을 내며 점멸하는 구슬.
이윽고 예언의 구슬은 나뭇잎이 연상되는 자연의 초록빛을 선보였다.
눈을 감은 카산드라는 감탄하듯 말했다.
“숲! 나무가 무성한 숲이 보이네요! 풀내음이 가득하고 공기도 무척 맑아요. 저도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그런…….”
숲 안에서 무척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기분 좋게 미소짓는 카산드라.
그런데 잠시 후, 구슬 속에서 둥글게 회전하던 빛덩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던 빛덩이는 반시계방향으로 몇 바퀴를 회전하고는 이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즉시 입가에서 미소를 지운 카산드라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카산드라? 왜 그러지?”
그녀와 그녀의 아티팩트로부터 이상을 감지한 와타나베의 물음에.
카산드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말했다.
“숲.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뭐라고?”
“제게 유지한 씨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