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초대 (3)
남호열은 걱정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라도 저쪽에서 드리미움 가공법을 원하면 어떡하죠?”
“상관없어요. 어차피 알려줘도 힘들 테니까.”
—우히히! 나 같은 정령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실프가 달라붙어 마력을 일정량 흡수한 뒤에나 변형이 가능했던 드리미움.
드리미움에 담긴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정령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실프밖에 없었다.
일본이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리라.
‘얘도 평범한 정령은 아니지.’
정령이라는 존재 자체가 특별하다고 하지만.
계약 당시부터 유독 더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실프였다.
여타 정령들이 초기에 까탈스럽다고 알려진 것과 다르게.
실프는 처음부터 이상할 정도로 유지한을 잘 따랐고, 친근함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2번째로 계약을 맺은 정령도 실프가 유일해.’
다른 존재와 계약을 맺은 뒤에야 현실에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정령들.
일방적인 계약 파기, 또는 계약자를 잃은 정령은 홀연히 정령계로 떠났다고 알려진다.
정령이 사라져버렸으니 그와 관련된 상세한 조사도 이뤄질 수 없었다.
‘그 어느 나라에도 2번째 계약을 맺은 정령은 없어.’
따라서 서로 합의하에 계약을 파기한 이후 무무와 재계약을 맺었던 윤도하를 제외한다면.
지구의 정령에게 이전 계약자가 있었던 사례는 오로지 실프뿐이었다.
“찍! 귀찮다! 떨어져라!”
—우히!
유지한은 칠라의 머리 위에서 콩콩 점프하는 실프를 바라봤다.
어째서 실프는 에르나 하스와의 계약에 이어서 그와 2차 계약을 맺을 수 있었는가.
—칠라! 머리털이 줄어든 거 같은데?
“그게 정말이냐? 찍?!”
—친칠라도 탈모가 오는구나!
“찍찍! 날 모욕하다니!”
—우히히히!
비록 지금은 친칠라를 놀리며 낄낄대는 정령일 뿐이었지만.
그 특별함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존재하리라.
‘그루디아에서는 답이 나올지도.’
실프가 처음으로 계약자를 만든 차원.
그루디아에서 넘어온 김시후의 지인들은 대부분 하녀나 집사 등 평범한 직책에 불과했기에 고급 정보를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곳은 인간보다 긴 수명으로 상당히 오래전부터 정령과 함께해온 엘프들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당연히 정령과 관련된 조사나 연구도 지구보다 훨씬 많이 이뤄졌겠지.’
실프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유지한은 타무라 형제와 인사를 나눴다.
“호열 씨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두세요.”
“일주일 안에 지금보다 2배는 더 훌륭한 대장장이로 교육시켜 놓겠습니다.”
“아하하…….”
남호열의 어깨를 붙잡고 호언장담하는 타무라 켄타.
남호열은 스승으로 삼게 된 그들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잠시 후, 유지한 파티는 타무라 형제가 준비해둔 차량에 탑승했다.
라이쿠의 본사에서 와타나베 요스케가 기다리는 도쿄까지 이동할 차량이었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지한은 좌석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여기서 도쿄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얼추 6시간 정도 걸립니다.”
항공편이 마비된 탓에 대략 6시간에 달하는 경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할 때쯤에는 늦은 저녁이 되어 있으리라.
“다들 라이쿠에서 받은 건 어때?”
“느낌이 아주 괜찮아.”
이미아는 걸작 보관소에서 여성용 신발을 선택했다.
신체 능력 중에서도 다리 근력이 소폭 상승하는 아티팩트.
주먹에 비교해 다리 힘에 아쉬움이 있었던 그녀에게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찍찍! 그 쌍둥이, 싹수가 좋았다!”
투명한 장갑을 선물 받은 칠라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타무라 형제가 녀석까지 인원수에 포함하여 선물을 안겨준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칠라가 방패를 사용한다는 걸 알고 방패의 손잡이를 놓치지 않도록 마찰력을 크게 상승시켜주는 장갑을 추천했다.
그에 몹시 만족하는 칠라였다.
“이런 걸 돈 주고 사려면 어마어마하게 비싸겠죠?”
그 옆에는 한 손 장갑을 선택한 민유리가 있었다.
안쪽에 손가락이 비칠 정도로 얇지만, 마력 제어에 탁월한 도움을 주는 아티팩트.
마력 화살을 생성할 때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설마 플로른을 주실 줄은 몰랐어요.”
김시후가 혀를 내두르며 손안에 있는 물건을 내려다봤다.
플로른을 섬세하게 깎아 만든 문양 위에 상급 마석을 박아넣은 펜던트.
걸작 보관소에 있던 물건 중 사실상 가장 비싼 품목이었다.
“찍? 그게 그렇게 좋은 거냐?”
“당장 경매장에 내놓기만 해도 입찰 경쟁이 엄청 치열할걸.”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른다. 찍.”
“으음……. 네가 20년 이상 아무런 일을 안 해도 끼니마다 입에서 살살 녹는 고기를 먹을 수 있어.”
“찍, 찍찍! 살살 녹는다니!”
맞춤 설명을 듣고서야 화들짝 놀라는 칠라.
그런 아티팩트를 주저 없이 건네준 타무라 형제에게 감탄하는 김시후였다.
“찍! 내 장갑을 팔아도 가능한가?”
“그 장갑도 되게 비싸. 아마 5년 이상 고기 잔치를 벌일 수 있겠지.”
“찍……! 나는 5년 치 고기를 손에 들고 있는 건가!”
향후 몇 년 치 고기와 맞바꾼 장갑이라니.
칠라는 조금 두려워진 눈으로 자신의 투명 장갑을 바라봤다.
그때 실프가 외쳤다.
—쟤 이상한 생각한다!
“찌, 찍?!”
—내 말 맞지?
“거짓말이다! 찍! 이걸 팔고 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우히히히! 거 봐!
“찍?!”
실프에 의해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칠라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민유리는 그 즉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어제도 고기 배터지게 먹었잖아.”
“주인아!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찍!”
“누가 보면 주인이 굶기는 줄 알겠어.”
“하지만 닭가슴살만 먹이는 건 조금 너무한…….”
“뭐?”
“아, 아니다. 찍찍.”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는 민유리를 피해 칠라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최근 건강을 관리한답시고 식단의 모든 고기가 기름기가 적은 고기로 바뀐 상황.
민유리가 솔선수범하여 비슷한 식단을 유지하는 이상 칠라가 불만을 토할 수는 없었다.
대신 공중에 떠오른 실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찍! 몹쓸 정령 같으니!”
—왜 나한테 그래?
“고기 맛을 모르는 네가 불쌍하다! 찍!”
—퍽퍽한 고기맛은 알고 싶지 않지롱!
유지한은 한동안 칠라와 실프의 말다툼을 들으며 자동차의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배경을 바라봤다.
그런데 끊이지 않을 것만 같은 말다툼이 점점 줄어들던 그때였다.
운전대를 잡은 운전사가 자동차 네비게이션에 떠오른 경고를 보며 말했다.
“앞쪽 도로에 MA가 있어서 속도를 조금 줄이겠습니다.”
“예.”
자동차가 일본에서 발생한 MA와 가까워진 것이었다.
창문 밖 풍경도 느긋이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느리게 흘러갔다.
MA 근처에 도달하자 유지한은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을 살폈다.
‘일본도가 되게 많네.’
한쪽에만 날이 서 있는 일본도를 보유한 영웅들이 많이 보였다.
그 옆에는 얇은 천 재질의 옷에 복면까지 두른 닌자 컨셉의 영웅도 많았다.
유지한은 그러한 장면을 보며 일본에 왔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같은 동아시아권의 영웅이더라도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와 정서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창문을 바라보던 이미아가 중얼거렸다.
“일본에도 저놈들이 있구나.”
그녀가 바라보는 건 비슷한 복장을 착용한 한 무리의 인간들.
그들의 상의에는 귀엽게 그려진 몬스터가 인간과 악수하거나 포옹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일본어로 글자가 아주 크게 적혀있는 피켓들은 읽을 수 없었지만.
그들 모두가 IUPC 일본 지부의 회원들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손으로 턱을 괸 김시후는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한국에서는 이제 잘 안 보이던데, 여긴 그대로네요.”
“저것도 예전보단 많이 줄어든 거라고 해. 아무래도 바로 옆나라니까 그때 일로 영향을 받았겠지.”
—지긋지긋한 놈들!
속도가 줄은 유지한 파티의 차량은 앞쪽에 밀려있는 차량들과 함께 MA 바로 옆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닫힌 창문을 뚫고 알아듣기 힘든 일본 IUPC 회원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때.
쿠구구궁!!
멀리서 커다란 진동이 발생하여 차량 내부까지 전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도로에 있던 모든 차량이 멈춰 서거나 경적을 울렸다.
유지한 파티의 자동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찍! 무슨 일이냐?!”
본능적으로 방패를 꺼낸 칠라가 주변을 경계했다.
당황한 운전자와 다르게 나머지 일행들은 침착한 얼굴로 창문 밖을 살피고 있었다.
“저쪽에서 뭐가 와요.”
민유리는 손으로 MA의 입구로 선언된 지역을 가리켰다.
멀리서 작은 점처럼 보이는 것들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몬스터다.”
“캇파에요!”
도룡뇽이 몬스터로 변해 이족보행이 가능해진 부류.
입구를 향해 달려오는 녀석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전설 속 요괴의 이름을 딴 캇파라는 3급 몬스터였다.
그런데 캇파들이 일제히 입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니.
입구에서 대기 중인 영웅들이 당황한 모습을 보자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듯했다.
‘……IUPC가 묘하게 침착한데.’
캇파가 몰려오기 시작하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본 IUPC 회원들.
몬스터를 마주쳐서 당황했다기보다는 마치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한 움직임이었다.
표정과 행동만 두고 보자면 누가 영웅이고 일반인인지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운전사님.”
“네, 네?”
“이 안에서 나오지 말고 계세요.”
벌컥!
유지한 파티는 거의 동시에 3개의 문을 열고 차량 밖으로 뛰쳐나왔다.
“찍찍!”
가장 먼저 앞으로 나온 건 칠라였다.
토도도도돗!
등에 방패를 짊어지고 네 발로 달려나간 칠라는.
위로 높게 점프하며 방패를 꺼냈다.
[도발]
“취엑?!”
“취에에엑!”
선두에서 정신없이 달려오던 캇파들의 몸이 하나같이 움찔하더니.
이내 적의가 깃든 눈으로 칠라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능력이 칠라보다 떨어지는 탓에 [도발] 스킬의 효과가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찍! 이리 오너라!”
칠라를 향해 몰려드는 캇파들.
민유리는 그 뒤쪽에서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퉁!
마력 화살 1발이 칠라의 옆으로 날아갔다.
앞으로 쭉 나아간 화살은 맨 앞의 캇파를 무시하고 안쪽으로 진입했다.
[형태 변화 - 부메랑]
커다란 부메랑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 화살이 둥근 원을 그리며 주변을 날았다.
촤좌좌좌좍!
팔이 잘려나가고, 배가 갈라지고, 목을 베여 머리가 떨어진다.
캇파의 제법 단단한 가죽은 그녀의 마력에 닿을 때마다 힘없이 잘려나갔다.
그렇게 위험한 부메랑이 지나다니는 현장 옆에서 이미아는 맨몸으로 돌진했다.
두두두두두——!!
그저 한 방향으로 달려갈 뿐인 묵직한 돌진.
하지만 그녀에게 부딪히는 캇파들은 전부 목숨을 잃거나 뼈마디가 부러져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은 흡사 8톤 트럭에 치인 고라니와 같았다.
“취, 취엑!”
“취에에엑…….”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던 처음의 분위기로 어디로 갔는지.
부메랑을 피해서 그녀를 노리던 캇파들은 전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입구 앞에 있는 일본의 영웅들은.
그 모든 광경을 경악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저 사람들 대체 뭐야?]”
“[어떻게 저렇게도 강력한 마력이……!]”
“[유지한! 유지한 파티다!]”
“[아!]”
유지한의 얼굴을 알아본 한 남자의 말에 여러 명이 탄식했다.
당장 뉴스에서 비행기 폭발 사건을 막아낸 영웅으로 속보가 떠오른 이들.
이 시각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웅이라면 그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등급의 차이란 이런 걸까?]”
“[지금 나서는 건 방해만 되겠어.]”
“[얘들아! 이 전투,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말고 지켜봐.]”
“[맞아. 분명 뭘 배워갈 수 있을 거야.]”
섣불리 개입했다가 방해가 될까 봐 걱정하던 일본의 영웅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