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출국 (4)
하이재킹은 단지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쇼.
정영욱이 바라던 것은 지금 유지한 파티가 탑승한 비행기의 폭발이었다.
‘그런데 저걸 대놓고 말하네.’
정영욱은 놀랍게도 빵과 커피를 받은 테러범에게 테러에 가담하게끔 꼬드기며 그러한 사실을 모두 고백했다.
그가 이 모든 걸 꾸몄다고 한들, 굳이 비행기가 폭발한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포, 폭발이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정영욱이 뱉은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테러범의 표정과 태도.
과거의 기억 속에서 아직 노숙자에 불과한 그는 생각보다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가 왜 마력이라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도 노숙자로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범죄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그의 가치관은 평범한 시민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남자는 왜 테러에 가담한 거지?’
범죄에 거부감을 느끼고, 비행기가 폭발하면 자신이 죽을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유지한은 이 노숙자가 테러범이 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청난 거금을 받더라도 죽으면 다 소용이 없거늘.
—자, 여길 보세요.
—……?
정영욱은 품속에서 새하얀 물건을 꺼내들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종처럼 보이는 물체였다.
대앵—
그가 종을 흔들자 종 안에 달려 있던 방울이 흔들리며 맑은소리를 일으켰다.
테러범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그 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으…….
찡그리고 있던 테러범의 얼굴에서 모든 주름이 사라졌다.
살짝 벌린 입과 반쯤 감겨버리는 눈동자.
얼굴 근육에 실려있던 힘이 모두 풀려버린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정영욱은 말했다.
—할 수 있겠죠?
—네…….
분명 10초 전까지만 해도 제안에 난색을 드러내던 테러범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그는 정영욱이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그때 유지한은 정영욱이 들고 있는 하얀 종을 주시했다.
‘환각 마법이 가미된 아티팩트다.’
정영욱의 종은 틀림없는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아제시아의 환각 마법이 담겨있는 고도의 아티팩트!
김시후가 사용하는 환각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마법이었지만.
정영욱 또한 상당히 뛰어난 마법사였던 걸 생각하면 그가 환각 마법을 익혔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당신의 목표를 말해봐.
—유지한 파티가 탑승한 비행기의 납치…….
—비행기가 폭발할 텐데?
—그래도 상관없어…….
—큭!
뭔가에 홀린 듯 답하는 테러범을 보고 비웃는 정영욱을 끝으로 테러범의 기억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유지한의 시야는 다시금 반전되어 그가 타고 있던 비행기 내부를 비췄다.
“찍찍? 대장. 벌써 끝났냐?”
유지한을 지키듯 그 앞에서 대기하던 칠라는 눈을 뜬 그를 보며 눈을 껌벅였다.
정신을 되찾은 유지한은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한 뒤에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저쪽에서 사인해주고 있다. 찍.”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유지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칠라의 말대로 그의 파티원들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사인을 그려주고 있었다.
“지한 씨?”
“그거 그만두고 전부 이쪽으로 와.”
굳은 얼굴로 내뱉는 명령조의 말.
펜을 내려놓은 파티원들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형. 왜 그래요?”
“이 비행기는 13분 뒤에 폭발한다.”
“뭐, 뭐라고요?!”
“폭발?”
폭발이라는 말에 파티원 모두가 경악했다.
이미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거 진짜야?”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이 비행기에는 폭발 마법이 심어놨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정영욱.”
“……!”
정영욱의 이름이 나오자 김시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까지 그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정령 강화 부탁드려요!”
김시후가 일자로 곧게 뻗은 지팡이에 실프의 정령 강화가 깃들었다.
파아앗—!
지팡이에서 뿜어진 마력이 기내 전체로 퍼졌다.
갑자기 나타난 푸르스름한 입자가 주변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무척 신기해했다.
그리고 비행기의 각종 틈새 사이로 스며든 김시후의 마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꼼꼼히 훑었다.
“찾았다.”
그리고 마력이 특정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
김시후는 비행기에 숨겨진 폭발 마법을 찾아냈다.
다만 마땅한 대처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모든 엔진마다 폭발 마법을 심어놨어요. 심지어 비행기 몸체의 사이사이에도……!”
어떻게든 비행기를 터트리겠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 막아낸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못해도 40분은 넘게 남았어요.”
일본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더 필요했다.
그렇다고 겨우 10여 분 남짓의 시간으로 비상착륙과 모든 탑승객의 탈출까지 이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망설일 시간은 없겠군.
판단을 마친 유지한이 한 승무원에게 다가갔다.
“포, 폭발? 폭발이라고요?!”
“지금 당장 1층으로 모이라고 방송하세요. 조종실에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어떻게……!”
덜컥 놀란 승무원이 헐레벌떡 어디론가 달려갔다.
곧이어 기내 방송으로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현재 비행기에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다,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하게…….]
“뭐라고?”
“폭탄?!”
“진짜로?”
안내 방송이 들려오자마자 승객들은 크게 동요했다.
금방이라도 죽게 생겼는데 당황하지 말라고 한들 통할 리가 없었다.
“꺄아아악! 꺄아아악—!”
“우, 우리 다 죽는 거야?”
“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오!!”
그야말로 혼비백산.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의 비명과 대화 소리가 섞여 비행기는 난장판이 되어갔다.
처음 겪는 일에 승무원들마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 유지한이 소리쳤다.
“주목!”
“……!”
“……!”
눈에 눈물이 고인 사람, 옆자리의 가족을 껴안은 사람, 승무원에게 화를 내는 사람 할 것 없이.
마력을 타고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거기 전원 내려오세요.”
2층에 남은 승객들과 비행기의 기장, 부기장까지 내려온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비행기에서 탈출하겠습니다.”
“어, 어떻게요?”
“어떻게든 해야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니면 터져 죽고 싶습니까?”
“…….”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승객들.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준비를 하는 사이 유지한은 비행기의 비상구를 살폈다.
딱 봐도 저 좁디좁은 문으로 이 많은 인원을 한 번에 내보내는 건 무리였다.
비행 중에 비행기의 문은 절대로 열리지도 않는다고도 하고.
“장비 가져올게요.”
“이거 받아요!”
유지한은 민유리가 건넨 목걸이를 받았다.
차캉!
목걸이에 달린 검 모양 장식이 그의 손에 쥐어지는 크기로 불어났다.
한국을 떠날 때 별다른 지적이 없어서 기내에 갖고 들어왔던 아티팩트였다.
뒤에서 검을 보고 기겁하는 승무원이 있었지만,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카가가가강—!
칼날에 오러를 두르고 발밑에 화물칸이 존재하는 지점의 바닥을 뜯어냈다.
폭발 마법이 심어진 구역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이자 여객기의 화물이 실린 화물칸이 보였다.
—저기 있다!
실프가 큐디에 깃든 드리미움의 마력을 쫓았다.
별도로 보관된 파티의 장비는 모두 거기에 보관되어 있었다.
유지한은 거기에 더해 개인적인 짐이 들어있는 파티원들의 캐리어까지 챙겼다.
안타깝게도 다른 승객들의 짐은 이곳에 남겨두고 가야겠지만.
목숨을 구해주겠다는데 이 정도는 신경 쓰지 않겠지.
‘남은 시간 5분.’
장비를 갖춰 입는 도중에도 초조해하는 승객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윽고 유지한은 샘플링을 사용했다.
<—이 비행기에서 탈출하는 방법>
다만 그는 눈앞에 떠오른 잔상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승객들을 내버려 둔 채 홀로 탈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말고.’
<—이 비행기에 탑승한 모든 승객을 데리고 안전하게 탈출하는 방법>
“……후.”
조건이 늘어난 탓에 200에 달하는 인간의 잔상이 한꺼번에 보여지자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샘플링을 반복 사용하며 정답에 이르는 과정을 여러 번 확인한 뒤.
유지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전부 다시 자리에 앉으세요!”
“네?”
“안전벨트 메시고, 손잡이 꽉 잡고,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게끔 위로 들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리에 착석하는 사람들.
승무원들까지 비어있는 좌석에 앉은 뒤에야 유지한은 민유리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그에 민유리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네에?! 진짜 그렇게 해요?”
“예.”
“미쳤다, 미쳤어……!”
“안 됩니까?”
“아뇨! 해야죠!”
“시후. 넌 준비 됐어?”
“맡겨두세요.”
유지한이 단단하게 부여잡은 큐디의 날에 초록빛 오러가 서렸다.
그리고 아주 낮게 숙인 자세로 몸을 둥글게 회전시키며 검을 휘두르자.
카가강!!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된 기내의 좌석들이 바닥과 벽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
그는 비행기 1층의 복도를 질주하며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모든 좌석의 고정을 풀어낸 뒤에는 민유리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비상구가 있는 벽 쪽으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쏴요!”
불안함을 감지한 비행기 기장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민유리의 화살은 하늘을 날았다.
콰앙!!
아주 거대한 힘이 담긴 마력 화살이 비상구 쪽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고정되지 않은 좌석들이 모두 크게 들썩였다.
“꺄아아악!!”
“우아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억!”
안전벨트에 몸이 묶인 사람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좌석과 함께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다가 잘못 튀어 오른 좌석이 서로 부딪치려는 순간.
—우히!
강한 바람이 불어와 그들을 구멍 밖으로 인도했다.
실프가 바람의 흐름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으아!”
“안 돼! 정아야!!”
“걱정마라! 찍!”
“잡았어요.”
콱! 콱! 콱!
마지막까지 기내에 남아있던 이미아와 칠라는 안전벨트가 풀려버린 사람을 1명씩 낚아챘다.
그리고 균형을 잃은 비행기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때.
모든 승객이 탈출한 걸 확인한 그들 역시 구멍 밖으로 뛰어내렸다.
“찍! 대장!”
[에어 슈트]
유지한과 김시후는 비행기를 탈출한 모든 이에게 마법을 사용했다.
체공 시간을 늘리고 호흡을 편하게끔 바꿔주자 꽥꽥 소리를 질러대던 승객들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부딪히겠어!”
“으악!!”
인원수가 많은 만큼 마법이 비교적 늦게 적용되어 비행기의 날개 따위에 부딪히는 좌석도 있었지만 유지한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주 운 좋게도 위험한 부위와의 충돌은 전부 피해가거나.
아주 운 좋게도 그들이 앉은 좌석이 모든 충격을 흡수했으니까.
‘이 중에 단 1명이라도, 큰 상처를 입는 사람은 없다.’
긁히거나 멍이 드는 타박상 정도로 경미한 부상 외에 중상자는 발생하지 않는 선택지.
그것이 샘플링이 그에게 제공한 해답이자, 작은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오랜만의 해외여행이 개판이군.’
유지한은 담담한 얼굴로 그보다 먼저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비행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