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출국 (3)
“손들라고! 이 개새끼들아!”
“배구녕을 뚫어버린다?! 앙?”
거뭇거뭇한 피부와 험악한 인상. 어색함이 없는 한국어 발음.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날붙이를 들이민 사람들은 한국인이었다.
겁에 질린 승객들이 불안에 떠는 가운데.
유지한 파티도 그들의 요구에 따라 얌전히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우리를 못 알아보는 건가.’
최근 언론에 얼굴이 많이 노출되었음에도 저들은 유지한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칠라를 발견하고서는 화들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이 인형은 뭐야.”
“씨부럴, 진짠 줄 알았잖아!”
“…….”
얼떨결에 인형으로 취급받은 칠라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자리에 멈춰 있었다.
테러범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쩔까요, 형?’
앉아있던 자리에서 김시후는 유지한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대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같은 층에 탑승한 승객들도 그들을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유지한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당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2층에 올라온 이들을 제압하기는 쉬워도 그 이후가 문제였으니까.
다른 승객이 인질로 잡히기라도 한다면 매우 곤란해지리라.
‘1층에 영웅 출신의 승무원이 있었을 텐데…….’
현대의 항공사가 안전과 영업 전략 차원에서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은퇴한 영웅을 승무원으로 고용하는 것이었다.
다른 승무원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 자리인 만큼 현역에서 물러난 영웅 중에는 그런 부류에 종사하는 사례가 꽤 존재했다.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도 분명 그들을 스쳐 지나갔던 유지한이었다.
그런데도 테러범이 설치는 걸 보면 문제가 생긴 것이겠지.
“문 열어!”
쾅! 쾅쾅! 쾅!
테러범들은 비행기 조종실로 향하는 문을 세게 두드렸다.
다만 그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버텼다.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테러범 하나는 총구를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꺄아아악—!”
“닥쳐!”
탕! 탕! 탕!
비행기의 천장을 향해 연속으로 발사되는 총알들.
그 밖에 승객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계속되자 조종실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딸각!
그리고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문의 잠금장치가 풀려버리는 순간.
유지한은 그 문에 시선을 두고 있는 테러범들을 향해 달렸다.
퍽!
뒷머리를 세게 내려치자 곧바로 정신을 잃고 기절하는 테러범.
손에 힘이 풀린 그가 쥐고 있던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전.
유지한이 그 옆에 있던 테러범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컥!”
넘어진 테러범의 머리에 발차기를 날리자 그는 짧은 비명을 내뱉고 기절했다.
문에 붙어있던 2인조가 순식간에 쓰러지고.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지원하던 테러범들은 화들짝 놀라 유지한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총알이 튕기면 안 돼.’
마력을 가진 영웅이 평범한 총알을 튕겨내는 건 쉬운 일이지만.
튕겨 나간 총알은 그대로 승객들에게 향할 수 있었다.
그에 유지한은 샘플링을 사용했다.
<—저들의 총알을 멈추는 방법>
츠즈즈즈——!
눈앞으로 펼쳐지는 초록빛의 기다란 잔상들.
오직 유지한이 바라던 정답으로 향하는 그 잔상 사이에서.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선 것은 계약자와 같은 잔상을 보고 있는 실프였다.
탕!
이윽고 유지한의 얼굴을 노리고 총알이 날아들었다.
당황한 상태에서 방아쇠를 잡아당긴 것치고는 꽤 정확한 사격이었다.
—느려져라!
팡!
실프의 몸에서 기내를 초록빛으로 물들이는 신비로운 마력이 터져 나왔다.
그 마력은 샘플링으로 생성된 얇고 기다란 잔상 위로 옮겨가 반투명한 바람의 길을 이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과 1초 안에 총알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려낼 미래의 궤적.
촤르르륵!
얇은 바람의 길 위에서 총알은 역방향으로 회전하며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유지한의 피부와 맞닿을 시점에는 그저 바닥으로 톡 떨어질 뿐이었다.
탕! 탕! 탕! 탕!
당황한 테러범들이 유지한을 향해서 총알을 쏟아냈다.
화약 냄새가 그득한 총알의 비 사이에서 유지한은 가만히 눈앞에 그어지는 바람의 길을 주시했다.
실프는 총구에서 뿜어지는 총알들을 단 1개라도 놓치지 않고 길을 생성하고 있었다.
—전부 떨어져라! 우히히!
바람의 길을 통과한 총알은 전부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테러범들의 관심이 온통 유지한에게 쏠린 사이.
은밀하게 준비를 마친 김시후와 민유리가 그들을 습격했다.
“찍찍! 넌 나랑 놀자!”
“끄아아악! 인형이 움직인다!!”
칠라에게 붙잡힌 남성의 외침이 비행기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직후 1층에 있던 테러범이 위로 걸어 올라왔다.
“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안녕.”
“……?!”
계단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미아는 그의 머리채를 쥐어뜯듯이 잡아당긴 뒤.
뾰족한 계단의 모서리에 그의 이마를 내려찍었다.
콰직!
뼈가 부서지는 위험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혔다.
그제서야 1층에 있던 테러범들이 소리쳤다.
“젠장! 위층에 영웅이 있다!”
“이런 말은 없었는데!”
“거기 너! 날 따라와 줘야겠다.”
“하, 하지 마세요!”
2층에 영웅이 있다는 걸 눈치챈 테러범들은 나이가 어린 승객 하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끌려가는 아이를 필사적으로 잡아당기는 부모였지만.
아이의 목 앞에 칼을 들이미는 걸 보고는 멈춰서야만 했다.
“위에 있는 영웅들은 잘 들어라!”
“당장 공격을 중단하지 않으면 이 아이는 죽는다!”
오로지 영웅들을 노리고 가하는 협박.
유지한이 슬쩍 민유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유지한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헉!”
“야……. 저건 유지한이잖아!”
그의 얼굴을 마주한 몇 명의 테러범은 경악했다.
하필이면 마주쳐도 저런 영웅을 마주치다니!
“뭐야? 저게 누군데?”
“미친! 넌 뉴스도 안 보냐?!”
“아오, 이래서 촌놈들이랑 같이 하기 싫었던 건데……!”
“지금 나 무시한 거냐?”
갑자기 서로 말싸움을 시작한 테러범들.
유지한의 뒤로 내려오는 김시후와 이미아를 보며 몇몇은 손을 떨었다.
“이 겁쟁이 새끼들! 저게 누군지 알 게 뭐야?”
“어차피 사람은 칼로 찌르면 죽어!”
유지한은 자신감을 내보이는 인물들을 살폈다.
그들의 몸에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력을 가진 일반인인가.’
영웅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얼굴을 알아봤을 터.
“움직이면 뒈진다.”
이윽고 다가온 남자가 유지한의 목에 단검을 겨눴다.
겨우 미약한 마력이 둘려 있을 뿐인 단검.
유지한은 거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말했다.
“적어도 오러는 둘러야 할 텐데.”
“뭐?”
“그딴 싸구려 단검으로 날 베려면.”
“……!”
유지한이 일부러 단검을 향해 목을 들이밀자 테러범은 토끼 눈을 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단검은 유지한의 피부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흡사 피부에 뭉툭한 막대기를 가져다 댄 것 같은 반응.
테러범의 유지한의 격차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 이런 괴물이……!”
그리고 그 장면을 본 테러범들이 기겁하던 때.
유지한이 소리쳤다.
“9명!”
타닷!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층에 남아있던 민유리와 칠라가 계단 아래로 뛰쳐나왔다.
공중에서 몸을 힘껏 뒤집는 민유리의 손아귀에는 9발의 마력 화살이 생성되어 있었다.
[멀티 샷]
내려오며 적의 위치를 확인한 민유리는 맨손으로 마력 화살을 허공에 흩뿌렸다.
활로 쏘는 것보다 위력과 속도는 확실히 떨어졌지만 정확한 조준력만큼은 변함이 없는 공격.
파바바바바박!
“으억!”
“우와악!”
어깨, 몸통, 다리 등 몸 어딘가에 화살이 박힌 테러범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그중에는 인질을 잡고 있던 남성도 있었다.
“찍찍!”
퍼억!
잽싸게 남성에게 달려간 칠라는 발차기로 그를 후려치고는 인질로 잡힌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 뒤에는 유지한 파티의 일방적인 폭력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그들과 테러범들 사이의 격차는 명확했기에.
“끄으윽!”
“아파! 아파……!”
뼈마디가 몇 개씩 부서진 테러범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숨어있는 테러범이 있는지 경계하던 칠라는 이내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찍찍! 괜찮냐?”
“네!”
“울지도 않고 잘했다! 찍!”
인질로 잡혔던 것보다 칠라에게 안겼다는 사실에 더 기뻐하는 아이.
팬카페의 회원이 1명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큭!”
테러범에게 옆구리를 찔렸던 한 승무원은 유지한을 힘겹게 올려다보며 감사를 표했다.
유지한은 그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말했다.
“말하지 마세요. 여기 혹시 의사 있습니까?”
“제, 제가 의사입니다!”
때마침 휴가차 일본행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의사가 황급히 승무원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다른 승무원이 가져온 응급키트로 처치를 하던 도중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상태가 너무 나쁜데……!”
테러범이 찔러넣은 칼이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닿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가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
그에 잠시 고민하던 유지한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걸 쓰세요.”
“이게 뭐죠?”
“이세계에서 가져온 약초입니다.”
“……!”
그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물건은 둥글게 말려있는 파란색 이파리.
카븜에서 챙겨온 약초 중 하나였다.
혹시 몰라서 들고 다니던 게 이런 곳에서 쓰이게 될 줄이야.
“출혈이나 급한 상처에 사용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약을 사용할 수는…….”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상대는 이세계에 다녀왔다고 알려지는 한국의 영웅.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의사는 결국 약초를 받아들었다.
“눌러서 짜세요.”
유지한의 지시대로 상처 위에서 말려있는 잎을 짜내듯이 누르자.
파랗고 투명한 즙이 상처로 떨어져 스며들었다.
“……세상에, 이건!”
찢어졌던 장기가 조금씩이나마 저절로 아무는 놀라운 현상에 의사는 경악했다.
다만 감염이나 다른 부작용을 걱정하여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 이미아는 장난감을 정리하듯이 바닥을 굴러다니던 테러범들을 주워다가 전부 벽 쪽으로 몰아넣었다.
응급처치를 지켜보던 유지한은 그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얘네 뭔가 이상해.”
“뭐가?”
“왜 우릴 모르지?”
“……모르면 안 되는 거야?”
이미아는 의문을 드러냈지만.
이들은 무려 한 나라의 항공기를 납치하려고 시도한 범죄자였다.
그런 대형 범죄를 계획하고도 근래 유명해진 영웅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준비성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다.
“시후야.”
“네?”
“잠깐 확인 좀 해봐야겠다.”
김시후가 마력을 갖고 있던 테러범으로부터 마력을 추출했다.
완성된 테러범의 마석을 붙잡고 유지한이 샘플링을 사용하자 그의 시야가 어두워져 갔다.
잠시 후 그가 도달한 곳은 테러범의 최근 기억들이 필름의 형태로 난잡하게 날아다니는 영화관.
—저거인 것 같아.
실프는 그중에서 가장 의미가 있을 만한 기억을 꺼냈다.
어느 지하철역의 노숙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테러범이 신문지를 깔고 누워있는 장면이었다.
“이게 언제쯤이지?”
—대략 일주일 전쯤.
이것은 약 7일 전 테러범의 기억.
비행기 납치에 가담한 이 테러범이 불과 며칠 전까지는 노숙자였다는 뜻이리라.
—춥죠? 이거 드세요.
누워있던 테러범에게 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따뜻한 커피와 빵을 내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기억 속 테러범은 며칠을 굶은 기색으로 빵을 허겁지겁 입속에 욱여넣었다.
—세상에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빵과 커피를 제공한 남자의 속삭임에 테러범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유지한은 그에게 다가온 남성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이놈이 여기에…….’
테러범에게 빵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실종된 마법사 정영욱이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얼굴을 꽁꽁 싸맸지만, 유지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유지한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하이재킹은 눈속임이었나!’
김시후에게 도착한 택배가 폭발했던 것처럼.
이 일본행 비행기는 곧 폭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