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출국 (2)
“왜 이런 정보를 이제서야 들려준 거야.”
—괜히 알렸다가 무슨 꼴을 볼 줄 알고?
꿀잼이라는 신생 길드에 들어간 영웅에 불과했던 유지한.
실프는 말문이 트인 뒤에도 계약자가 특정한 기준을 통과할 때까지는 전 계약자인 에르나 하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없었다.
섣부른 호기심은 위험을 불러오는 법.
이미 계약자의 죽음을 한 차례 경험한 정령은 새로운 계약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네가 다 컸으니까 상관없겠지!
“날 인정해주는 거냐?”
—물론!
“거 참 고맙네.”
—우히히!
실프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리며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유지한은 그런 실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시후의 어머니가 좋은 계약자였나 봐.”
—당연하지! 걔가 얼마나 착했는데?
“능력도 뛰어났다며?”
—시오론 왕가의 엘프 중에 에르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유한 엘프는 없었어. 아마 그루디아와 지구 전체를 통틀어도 그만큼 대단한 인물은 몇 없을 거야! 걔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대단했냐면, 한번은 다른 왕국과 시비가 붙어서 대표로 몇 명을 뽑아 결투를 치렀는데…….
실프는 전 계약자인 에르나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령의 몸에 입이 달려 있었다면 분명 침이 바싹 마를 때까지 칭찬을 이어나갔으리라.
그 정도로 에르나에 대한 실프의 믿음은 굳건했다.
그렇기에 유지한은 의문을 가졌다.
“그만치 대단한 사람이 병에 걸려 죽었다는 건……. 솔직히 믿기지 않는데.”
—불치병이었어. 치료는커녕 그 원인조차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던.
마력 변색 증후군은 마력에 반응한 피부가 검게 변한다는 증상이라도 있었지만.
에르나가 앓았던 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쇠약해졌을 뿐.
병을 치료할 단서가 될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옆에서 날마다 에르나의 기운이 약해져 가는 걸 느꼈지. 의사들이 말하길 몸속에 존재하는 장기에서 급속한 노화가 진행됐다더라.
외견은 아주 멀쩡하나 속에 든 것들이 빠르게 늙어버리는 병.
에르나 하스 외에는 그 어느 나라에도 비슷한 증상을 보인 환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아직까지도 이름조차 지어지지 못한 병이기도 했다.
“그것도 저주였을까.”
—글쎄.
병이 아니라 저주로 판명된 마력 변색 증후군.
그처럼 에르나의 증상도 저주 계통으로 분류되는 마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 뭘 할 수 있겠는가.
‘연구원들이 그 저주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에르나 하스가 앓던 병.
그리고 그녀가 죽은 직후 굳이 몰래 찾아와 그녀의 머리카락 따위를 가져간 연구원들.
그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고, 유지한은 의심했다.
*****
“항공권 왔어요.”
“보여줘 봐.”
김시후는 휴대폰에 도착한 메시지의 이미지를 유지한에게 보여주었다.
와타나베 요스케가 그들에게 보내준 일본행 티켓이었다.
그런데 티켓의 등급이 조금 이상했다.
“울트라 퍼스트 클래스(Ultra first class)? 이런 것도 있어?”
“저도 처음 들었네요. ‘아주 특별한 VIP만을 위한 전용석’이라니.”
“신경 많이 써주시네.”
“도착 당일까지는 개인 일정 때문에 연락이 어렵다네요.”
“많이 바쁘시겠지.”
비행이 아무리 길어봤자 2~3시간에 불과한 한국과 일본의 거리.
거기에 고가의 일등석 자리가 존재하는 걸 신기해하는 유지한이었다.
“칠라도 승객석에 같이 태워도 좋대요.”
“찍? 화물칸에 타라고 하지 않았나?”
“그냥 타도 된대.”
휴가에서 복귀한 이미아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온 칠라.
한 번도 비행기에 타보지 못했던 녀석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배를 긁적였다.
한편 민유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한 씨. 우리 팬카페 회원 수가 20만 명이 넘었던데.”
“워, 언제 그렇게나 많이 가입했대.”
“영어로 적힌 게시물도 많이 올라와요. 해외에서 유입이 많이 있었나 봐요.”
유사 팬카페들을 모두 물리치고 살아남은 단 하나의 팬카페.
과거에 계양산을 동행했던 군인 원영국이 카페 매니저로 활동하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유지한조차 모르는 자신의 사진들도 여럿 올라와 있었다.
“이 사진은 대체 언제 찍은 거야?”
“미아 씨 사진도 여기에 올라오네요.”
“칠라 사진 컬렉션도 있어요!”
“찍! 도촬이다!”
서류상으로는 유지한 파티와 동맹으로서 함께하는 이미아의 팬들.
그들은 이미 김현태 파티의 팬카페에서 유지한 파티의 팬카페로 옮겨탄 상황이었다.
‘악플인가.’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
유지한 파티에게 무분별한 비판의 글을 작성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당연하게도 팬카페의 회원들은 날리는 그들에게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칠칠라: 이 사람 김현태 팬클럽에서 활동하는 열혈 회원임.]
[칠칠라: 엄한 데서 난동부리지 말고 너네 본진으로 가라.]
…….
…….
김현태 파티의 팬카페에서 단체로 몰려와 싸움이 벌어진 게시판.
영양가 없는 게시글을 살펴보던 유지한은 곧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쪽은 잘하고 있으려나.’
김현태 파티 또한 이세계에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만 그가 향한 곳은 그루디아와 마찬가지로 영웅부와 연락이 닿지 않은 차원.
김시후가 약간의 도움을 줬음에도 연결이 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시간이 되어 각자 짐을 챙긴 유지한 파티는 민유리의 차량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차량을 운전하는 인물은 민유리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였다.
“유리가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아뇨, 아뇨! 저희야말로.”
크게 손사레를 치며 대답하는 유지한.
보조석에 앉은 그는 주로 민유리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제가 오늘 운전을 하겠다고 한 건 지한 씨 때문이었어요.”
“저요?”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우리 유리가 집에만 돌아오면 어찌나 지한 씨 얘기를 하던지!”
탁! 탁! 탁!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민유리는 뒤에서 운전석의 등판을 두드렸다.
룸미러를 통해 비치는 그녀는 정확히 아버지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다고 입을 다물 성격이 아니었다.
“휴가 중에 하루종일 파티에 대해서 검색하고, 또 걱정하고. 말끝마다 ‘지한 씨가, 지한 씨가’ 하는데…….”
“아, 진짜! 아빠!”
“푸하하!”
끝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민유리가 목청을 크게 높인 뒤에야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다무는 그였다.
“따님이랑 사이가 좋으시네요.”
“요새 부쩍 친해졌죠.”
눈을 도깨비처럼 무섭게 치켜뜬 민유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아버지.
민유리가 눈꽃이라는 1인 길드를 세워 활동할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오로지 동생을 구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있었다.
‘아빠라는 놈이 도움조차 안 돼서…….’
일반인에 불과한 민유리의 아버지는 그런 첫째 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딸이 매번 위험한 전장으로 향하는 걸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혹여라도 민유리가 상처를 입고 오는 날에는 부모로서 얼마나 커다란 무력함을 느꼈는지!
아버지로서는 매일 밤,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지금의 민유리는 아내의 말마따나 쾌활하던 예전의 모습을 상당수 되찾았다.
그 변화의 시작은 그녀가 1인 길드를 포기하고.
이 차량에 함께 탑승한 동료들을 얻었던 순간부터였다.
“공항 앞에서 내려주면 될까요?”
“예. 그리고 이건 제가 따로 준비한 선물입니다. 돌아가실 때 챙겨가시면 돼요.”
유지한은 개인적으로 챙겨온 선물을 꺼내들었다.
“용기가 정말 고급지네요! 술인가요?”
“카를렘에서 챙겨온 카븜의 전통 술입니다. 일본의 와타나베 요스케님이 손뼉을 치며 극찬했을 정도로 맛이 뛰어나죠.”
“그, 그러면 엄청 귀하겠네요?”
“돈 주고 구할 수 없는 물건은 맞습니다.”
“세상에…….”
제법 귀한 선물을 받고 감탄하는 민유리의 아버지.
그는 눈앞의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보조석에 앉은 유지한을 힐끔거렸다.
‘아주 인물이야.’
한창 잘나가는 파티의 파티장.
동료의 가족들에게도 하나하나 신경을 써줄 만큼 성격도 좋고, 무엇보다 딸의 신뢰를 받는 영웅.
누군가가 인생을 살면서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사람 중 저만한 인물은 몇 명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러니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유리야.”
“네.”
“아빠는 널 응원한다.”
“……?”
아버지의 말에 민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어? 저거 유지한 파티 아니야?”
“맞네! 해외로 가나 본데?”
“뭐해, 빨리 찍어!”
인천공항에 도착한 유지한 파티를 맞이한 것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이었다.
본래 다른 연예인을 촬영하기 위해 모여있던 기자들은 유지한 파티를 발견하자마자 바쁘게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유지한은 터져 나오는 플래시 속에서 걸어가야만 했다.
“잠깐만 인터뷰 가능하십니까!”
“오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
…….
달라붙는 기자들과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한 뒤.
보안상 위협이 되는 장비와 아티팩트를 항공사에 맡긴 일행들은 출국장으로 이동했다.
처음 방문하는 VIP 전용 출국장은 널널하기 그지없었다.
“사, 사인 부탁드립니다!”
“손가락을 찍어도 되나? 찍?”
유지한 파티를 마주칠 때마다 표정으로 놀라움을 드러내는 사람들.
마침내 비행기에 탑승하자 김시후는 말했다.
“와타나베 님 뵌 뒤에는 교토로 가는 거죠?”
“너희 아버지 쪽으로 가야지.”
“참, 아빠는 뭐가 그리도 바쁜 건지…….”
아들이 이세계에서 돌아왔음에도 화상통화가 전부였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김시후는 조금 서운함을 드러냈다.
——시후에게는 말하면 안 돼.
절대 김시후에게는 에르나가 죽은 뒤의 이야기를 전하지 말라는 실프의 경고.
실프로부터 에르나 하스가 죽은 직후를 전해 들었던 유지한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손님 여러분, 곧 이륙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
일행이 탑승한 비행기는 안내 방송과 함께 이륙을 시작했다.
“찍, 찍찍……!”
창문에 달라붙은 칠라는 털을 바짝 세우고 몸을 웅크린 채 점점 멀어지는 공항을 바라봤다.
고도가 상승하고 비행기의 흔들림이 멎은 뒤에야 비로소 안심하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비행기가 한반도를 떠나 바다 위에 도달했을 때.
칠라와 이미아는 기내에서 음식을 주문하여 먹고 있었다.
“찍! 김시후! 한입 먹겠나?”
“난 됐어.”
“호리호리한 몸을 탈출하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 찍!”
“그냥 내가 먹을게.”
“찍찍! 돼지녀! 멈춰라!”
이미아와 칠라가 커다란 소세지를 두고 싸우는 한편.
유지한은 이코노미석이 있는 비행기 1층에서 소란을 감지했다.
“아래층이 조금 시끄럽네.”
—나도 느껴져.
문이 닫혀있기에 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니었다.
무무와 임시 계약을 맺었던 이후 땅의 미세한 진동까지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뿐.
우웅!
그런데 그때 유지한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와타나베 요스케의 메시지였다.
[와타나베 : 우리 길드의 직원이 너희 길드장인 김시후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와타나베 : 시간대를 알려주면 한국으로 전용기를 보내마.]
“……이게 무슨 말이야.”
항공권이 아니라 길드에서 보유한 전용기를 보내주겠다는 와나타베 요스케.
하지만 유지한은 이미 그가 보내온 항공권을 사용한 상황이었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건 뭔데?’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는 와중.
1층에서 한 여자 승무원이 닫힌 문을 열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한 한 무리의 남성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이내 2층에 올라온 그들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잘 벼려진 칼과 권총 따위의 무기들.
“죽기 싫으면 전부 손들어!”
하이재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