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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추방된 영웅이 너무 뛰어남-281화 (281/300)

281화. 출국

에블린 커드스타와의 통화가 끝난 뒤.

김시후는 그루디아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 전화기와의 연결을 시도했다.

허나 약 30분간의 시도 끝에 포기해야만 했다.

“다른 기기는 신호가 아예 닿지 않네요.”

상대측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연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차원 전화기가 망가졌거나 전화기를 잃어버린 것이리라.

답이 어느 쪽이든 유지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루디아 원정대에 좋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어쩔 수 없나.’

시안 피어스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만으로 엔젤스 가든과의 거래를 끝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조만간 그루디아로 간다.”

“……네.”

유지한의 선언에 김시후가 무겁게 끄덕거렸다.

그의 어머니, 에르나 하스의 고향인 그루디아!

어린 시절부터 그루디아의 이야기를 많이 듣긴 했지만.

설마 나 자신이 직접 그 세계로 가게 될 줄이야.

“정말로 그루디아에 가시는 건가요?”

“그렇게 됐습니다.”

유지한 파티가 그루디아로 가겠다고 하자.

그 세계에서 떠나왔던 마일리는 매우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과 동행하는 게!”

“아뇨. 마일리 누나가 도와주실 필요는 없어요.”

“시후야, 그래도…….”

“카를렘에서 그랬던 것처럼 볼일만 마치고 금방 돌아올 거예요.”

시오론 왕국의 하녀였던 마일리.

하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평생을 하대받으며 허리를 숙이는 것이 운명이었던 엘프였다.

왕국에서 왕위 쟁탈전이 시작된 뒤,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휘말려 죄 없는 하녀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봤던 그녀는 왕국과 그 세계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 사정을 알고 있는 김시후는 마일리를 그루디아로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사실 엄마가 어떤 세계에서 지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맨날 이야기만 들었으니까.”

“……그럼 나랑 딱 2가지만 약속해줘.”

“2가지?”

“먼저 아까 연락이 닿았던 에블린 커드스타와 같은 다크 엘프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할 것.”

이종족들과 적당한 협력 관계를 맺으며 지내는 엘프들과 다르게.

다크 엘프들은 피부색만 다른 엘프는 물론이고 자신들을 제외한 종족을 모두 배척하는 폐쇄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마일리는 다크 엘프와의 대립을 경고했다.

“두 번째는요?”

“시오론 왕국에는 가지 마.”

“……왜요?”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야.”

마일리는 김시후의 모자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속에 가려져있는 뾰족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비록 엘프의 피를 반밖에 물려받지 못한 하프엘프였지만 김시후는 엄연히 시오론 왕국의 핏줄을 타고난 왕족!

왕국으로 간다면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김시후의 정체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을 터였다.

그만큼 왕족의 핏줄은 진하고, 심지어 마법으로 왕족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시후가 거기서 어떤 시비에 휘말릴지 몰라.’

시오론 왕국에서 발생했던 왕위 쟁탈전의 결과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 수 없다.

누가 왕이 되었는지도, 그 과정에서 누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높은 인망과 능력을 갖췄음에도 왕위에 관심이 없어 왕국을 떠났던 3왕녀 에르나.

그런 그녀의 아들이 시오론 왕국에 찾아간다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리라.

‘가장 큰 문제는 세계수야.’

언젠가부터 김시후가 다루기 시작한 거신병의 힘.

그것이 시오론 왕국의 장로들과 외부에까지 알려진다면.

그때는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 마일리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알겠지?”

“……네, 뭐.”

“조만간 나랑 따로 얘기하자.”

재차 약속을 요구하는 마일리를 보며 김시후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다녀왔어요.”

“아이고, 우리 딸 왔어~”

이미아가 집으로 돌아오자 검은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남성이 현관까지 달려와서 그녀를 반겼다.

이미아와 눈매가 매우 비슷한 그 남성의 정체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딸을 살갑게 맞이한 그는 딸이 들고 있던 짐을 대신 받아주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 밥부터 먹을래?”

“아뇨.”

“헉!”

밥을 그렇게도 좋아하는 딸이 식사를 건너뛰겠다니!

그녀의 아버지는 무척 놀란 얼굴을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변화가 무척이나 잘 보여지는 얼굴 근육.

매번 무표정인 이미아와는 많이 다른 성격을 가진 부모였다.

“오늘 길드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뇨.”

“누가 널 때렸니? 아니면 네가 누굴 때렸니? 죽인 건 아니지?”

“아뇨.”

“그것도 아니면 그 지한이라는 놈이 문제야? 말만 해! 아빠가 가서 혼쭐내줄게!”

“잠깐 찾아볼 게 있어서요.”

“어떤 거? 우리 딸이 뭘 찾길래 무려 저녁밥을 건너뛸까?”

“캐리어요.”

“캐리어?”

“며칠 뒤에 일본으로 가거든요.”

이미이가 일본으로 간다는 말에 그녀의 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케로즈 시절부터 어지간해서는 해외로 떠나는 일이 없었던 딸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간다고? 네가?”

“일단은 출장……. 이라고 해둘게요.”

“어디로 가는 거야? 도쿄? 오사카? 교토?”

“처음은 도쿄요.”

“도쿄! 도쿄 좋지. 이 아빠도 예전에 3일 정도 들린 적이 있는데 말이야…….”

거실을 가로지르는 이미아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속사포로 내뱉는 그녀의 아버지.

이미아는 그런 행동이 익숙한 듯 아버지에게 대충 대답하며 창고 깊숙한 곳에 박혀있던 여행용 캐리어를 꺼냈다.

먼지 쌓인 캐리어의 지퍼를 열어보는 딸을 보며 그녀의 아버지는 조금 감격한 얼굴을 했다.

“우리 딸도 드디어 친구들이랑 여행을 떠나는구나!”

“여행 아닌데. 일이에요.”

“또래 친구들이랑 비행기를 타는 게 왜 여행이 아니야?”

“와타나베 요스케 님의 초대로 방문하는 거니까 일이죠.”

“그거나 그거나!”

영웅 학원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거뒀으나 친구들이 항상 어려워했었던 딸.

무뚝뚝한 성격 탓에 남들과 잘 섞이지도 못하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MA나 집에서만 보냈던 파워 집순이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그녀의 아버지로서는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우리 딸! 길드를 옮기니까 재미난 일이 많이 생기네.”

케로즈 속 김현태 파티라는 집단에서 뚜렷한 두각을 드러냈던 이미아였다.

과거 건설 업체에서 근무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딸이 있었던 덕분에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은퇴 후 후방에서 딸을 응원하기만 하는 아버지는.

매번 일에만 몰두했던 그 당시의 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유지한이라는 파티원이 파티에서 추방된 뒤에는 더욱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했던 딸이 생기를 더 잃어버렸다는 느낌이랄까.

매 식사마다 공깃밥 3그릇 이상을 해치우던 딸이 겨우 2그릇을 먹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이미아가 케로즈로부터 독립한 뒤에는 분위기가 변했다.

사라졌던 생기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유지한 때문이겠지.’

그는 딸의 변화가 어떤 것에서 시작된 것인지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는 것이, 김현태 파티 때부터 이미아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거의 모든 상황이 그와 엮여있었으니까!

딸이 힘들면 옆에서 도와주고, 몬스터의 피가 튀면 수건으로 닦아주고, 전투 중에 허기가 지면 간식을 꺼내주고…….

가족으로서도 해줄 수 없는 일을 그가 대신해주었기에.

유지한이 이미아를 떠난 뒤에도, 이미아의 아버지는 항상 유지한을 주시해왔다.

“다음에 집에 한번 들리라고 해.”

“누굴요?”

“누구긴 누구야! 유지한이지.”

멈칫!

유지한을 집에 데려오라는 말에 이미아의 손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이내 뾰로통한 얼굴을 한 그녀가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걔를 왜 우리 집에 데려와요?”

“내 딸이 믿고 따르는 영웅이잖아! 부모 된 도리로서 한 번쯤 만나봐야지 않겠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네가 말 안 해주면 다음에 내가 직접 길드로 찾아갈 거야.”

“…….”

“아빠 성격 알지?”

어떻게든 유지한을 만나보겠다는 이미아의 아버지.

입으로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성격인 그였기에.

이미아는 자신에게 윙크하는 아버지를 찌릿 노려봤다.

‘아이고! 우리 딸 반응 재밌네!’

오랜만에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딸을 보며.

이미아의 아버지는 실실 웃어 보였다.

*****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은 유지한이 책상에 앉았다.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형! 저 혼자서 너무 벅찬데요!

꿀잼의 지분 중 무려 25%를 보유한 임원이자 이미 서류상으로는 부길드장 자리에 오른 유지한.

그는 김시후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길드 경영에도 상당수 관여하게 되었다.

본래라면 오롯이 길드장에게만 처리할 권리가 있는 업무까지 그에게 넘어오는 것이었다.

“이럴 때 출세했다는 말을 쓰는 걸까.”

유지한은 김시후가 깜짝 선물로 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꿀잼]

[부길드장 유지한]

하얀색 종이 명함 위에는 노란색 꿀단지에서 꿀이 흘러내리는 이미지와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대장장이 남호열이 게임 회사에 다녔던 경험을 살려 제작한 명함이었다.

불과 2년 전의 자신에게 이 명함을 건넨다면 어떤 반응을 드러낼까.

‘무슨 이상한 길드에 들어갔냐며 걱정하겠지.’

거기까지 상상이 닿자 입가에 괜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본 실프가 말했다.

—지한. 왜 혼자 웃어?

“아니야. 아무것도.”

—재밌는 게 있으면 나도 알려줘야지!

“다음에 알려줄게.”

—흥! 칫! 뿡!

실프는 유지한을 향해서 툴툴거렸다.

처음 계약을 맺었던 때만 하더라도 하루 8시간 이상을 실프에게 투자했던 유지한.

그랬던 그가 점점 하는 일이 많아지더니, 이제 실프에게 투자하는 시간은 밤늦은 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밤중에 일이나 약속이 잡히면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거 알아? 원래 이 시기에 다른 정령사들은 정령하고 맨날 놀아준대!

실프는 유지한과 많은 교류를 나누고 있지만.

그와 계약을 맺고 보냈던 시간은 생각보단 길지 않았다.

다른 정령들이라면 이제서야 막 마음을 열고 친해지려는 시기.

실프는 계약을 맺고 10년은 된 것처럼 그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것이었다.

—자꾸 그러면 나 삐질 거야!

“알았다, 알았어. 대화하자.”

—대화? 그거 좋지! 우히히히!

끝내 업무를 내려놓은 유지한은 실프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대화에서 어떤 주제를 꺼낼지 고민하던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프! 생각해보니까 너…….”

—엉?

“시후의 아버지를 별로 안 좋아하잖아.”

김시후의 아버지이자 교토몬스터연구소의 한국인 연구원.

그리고 실프의 전 계약자인 에르나 하스의 남편 김건오.

이번 일본 일정에는 그와의 만남도 계획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대화할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했었지.’

실프는 김건오를 영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만났을 당시 몸을 크게 흔들어대며 그와의 접촉을 거부했을 정도.

실프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뒤에도 김건오와는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연락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도통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는 탓에 주변인만 난감해질 뿐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싫어. 내게서 에르나를 빼앗아간 그 인간은 정말 싫어!

실프는 김건오를 두고 자신의 첫 계약자를 빼앗아간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김시후와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차피 일본으로 가면 직접 만나게 될 거야.”

—알아.

“그 전에 이유를 좀 알려줄 수 있겠어?”

—난 말야, 침대에 누운 에르나가 마지막 숨결을 내뱉는 장면까지 전부 옆에서 지켜봤단 말이지.

정령으로서 계약자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실프.

죽어가는 계약자를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함을 느꼈던 기억은.

실프에게 그 어느 때보다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이건 오늘 여기서 처음 말하는 건데……. 에르나의 숨이 끊어진 뒤에도 요상한 의료 기계들은 그녀가 죽지 않은 것처럼 표시하고 있었어. 그리고 에르나가 죽고 나서 가장 먼저 찾아온 인간이 누군지 알아?

“간호사? 아니면 의사?”

—김건오와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는 연구원들!

“……!”

—그놈들은 죽은 에르나의 몸에서 머리카락과 침, 그리고 피부의 각질과 피까지 뽑아갔지. 기계들은 그들이 마법으로 조작을 한 뒤에나 에르나의 죽음을 알렸어.

“확실한 거야?”

—지한! 난 절대로 사람을 헷갈리지 않아.

외모뿐만 아니라 마력과 체취 등 수많은 정보를 조합하여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 정령들.

에르나의 병실에서 들키지 않도록 숨어있던 실프가 마주한 것은 틀림없는 김건오의 동료 연구원이었다.

“하지만 거긴 몬스터 연구소인데?”

—내 말이!

가족도 아니고, 의사나 간호사도 아니고, 그저 몬스터를 연구할 뿐인 연구자들.

그들이 왜 병실에 잠입해서 죽은 환자의 신체 조직을 챙겨갔단 말인가?

실프는 물론이고 유지한의 머리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린 냄새가 진동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언급할 때마다 종종 슬픈 눈이 되는 김시후.

유지한은 그를 떠올리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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