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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추방된 영웅이 너무 뛰어남-280화 (280/300)

280화. 악연 (4)

유지한은 마일리를 향해 낮게 속삭였다.

“다크 엘프라고요?”

“……네.”

다크 엘프.

피부가 대체로 밝은 편인 엘프들과 다르게 피부가 흑색인 엘프들을 가리키는 말.

딱 피부색 하나만 빼면 전체적으로 커다란 차이점이 없는 엘프들이었지만.

평범한 엘프와 다크 엘프는 항상 대립하고 서로를 배척했다.

“우에에엥! 엄마는 나만 미워해!”

“너 그렇게 울면 다크 엘프가 와서 잡아간다?”

“흑…….”

우는 아이에게 다크 엘프가 잡아간다는 말을 하면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나빴다.

오래된 역사 속 두 엘프가 화합을 이루어 평화롭게 지냈다는 건 글귀로만 남아있는 과거.

마일리가 가장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전쟁도 엘프와 다크 엘프 사이의 전쟁이었다.

왕녀로서의 모든 걸 내려놓은 에르나 하스와 함께 지구에 도달하기 전에도 그들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하필 커드스타라니…….’

마일리가 지구로 넘어온 지 20년이 넘어가는 지금.

그녀는 그루디아에서만 사용되던 지식들을 많이 잊어버렸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커드스타라는 성을 가진 다크 엘프는 잊을 수 없었다.

협박, 폭행, 살인 등의 범죄를 일상처럼 저지르는 그들은 언젠가 마일리가 있었던 시오론 왕국과도 여러 차례 마찰을 빚은 일족이었기에.

—너는 내 이름을 알고 있구나?

“…….”

마일리는 여인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여인은 웃음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니라 엘프겠지. 피부부터 머릿속까지 전부 하얗기만 한 하얀 뇌들.

“……어째서 다크 엘프인 당신이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거야.”

—전화기? 이게 전화기라고 부르는 물건인가?

“맞아.”

—우후후!

다시금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여인의 웃음소리.

그에 마일리는 바짝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웃지만 말고 대답해!”

—네까짓 게 감히, 내게 소리치는 거냐?

“……!”

—내 눈앞에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렇지 않았다면 목이 날아갔을 테니.

날카로운 송곳으로 피부를 찌르는 듯한 음성.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여인의 말투에 마일리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 살벌하네.’

유지한으로서는 마일리의 번역 없이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상대방의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처지였지만.

지금 통화를 나누는 다크 엘프 여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단단하고 힘이 실려있는 목소리였다.

“그…….”

상대방의 태도에 살짝 겁을 집어먹은 마일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그루디아에서도 지극히 평범한 마법사에 불과했던 인물.

어릴 때부터 몸에 각인된 다크 엘프에 대한 두려움이 에블린 커드스타라는 인물로 인해 다시 깨어난 것이었다.

그녀의 상태를 알아본 김시후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미안. 미안해.”

“누나. 지금부터는 저희가 하는 말만 번역해주세요.”

김시후의 요청에 마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정신을 차린 그녀는 한국어를 그루디아어로 번역하는 일에 집중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왜 당신이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구나? 뭐, 상관없겠지.

“…….”

—땅에서 주웠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루디아 원정대에서 차원 전화기를 지급받은 건 최소 2급 이상의 검증된 영웅들.

지구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니만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분실 방지를 위해 위치 추적 마법까지 숨겨진 아티팩트를 실수로 떨어뜨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빼앗은 겁니까?”

—우후후! 그게 궁금하더냐?

“네. 궁금하니까 대답하세요.”

—빼앗은 게 아니라 죽은 인간들이 떨어뜨린 물건을 주웠을 뿐.

이름 모를 인간의 죽음을 언급하는 에블린.

그에 자리에 모인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언급한 인간은 틀림없는 한국을 떠난 원정대원일 것이기에.

“당신이 죽였어요?”

—그건 비밀이다.

“……?”

—알리지 않는 편이 더 재미있지 않느냐! 우후후후!

차원 전화기의 스피커를 통해 여인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김시후는 이를 악물고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누군가의 죽음을 마치 장난감처럼 대하는 저 태도!

아무래도 보통 미친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유지한이 나서서 말했다.

“위대하신 다크 엘프시여.”

—흐음? 다른 인간인가? 너의 그 태도는 참 마음에 드는구나.

“혹시 그쪽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너희가 뭘 바라는지는 모르겠다만, 없었다.

에블린은 처음 차원 전화기를 주웠던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모양이었다.

무슨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인지 몰라서 보관만 하고 있다가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혹시 죽은 인간들의 인상착의를 기억하십니까?”

—모른다. 이 내가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에블린은 그루디아에서 소수 종족인 인간을 귀찮고 하찮은 존재처럼 여겼다.

그에 조금 발끈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지한이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이 전화기라는 물건, 참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한데……. 너희는 이런 걸 얼마나 더 가지고 있지?

“어림잡아 10개 정도 갖고 있습니다.”

—오호라! 그것들을 당장 내게 가져오너라! 그러면 너희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

에블린은 정말로 자신이 자비를 베푸는 것마냥 너그러운 말투였다.

다만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저 황당한 태도는 조금 웃기기까지 했다.

“전화기는 원하시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그 대가로 아까 죽었다는 인간들을 다시 찾아주십시오.”

—인간들의 시체는 굶은 짐승들에게 먹이로 넘겼다. 죽어서라도 쓸모가 있어야지 않겠느냐?

“…….”

—그보다 이 건방진 놈! 감히 내게 대가를 요구해? 내 앞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크나큰 영광으로 여겨라!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대체 무슨 수로 날 죽일 거냐고.

황당함을 참지 못한 유지한은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멍청한 다크 엘프 같으니.”

“……!”

화들짝 놀란 마일리는 정말로 그의 말을 번역해도 되냐는 얼굴을 했다.

유지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마일리가 결국 입을 열었다.

“머, 멍청한 다크 엘프 같으니!”

—……뭐?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느냐?

“아! 미안하다. 다크 엘프는 방금 했던 말도 잊어버릴 만큼 기억력이 떨어지는 모양이네.”

—지금 대답하는 여자의 오른편에 있는 너! 감히 내게 그딴 말을 해……?

에블린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전화기 너머에 있는 유지한의 위치를 특정했다.

그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청력과 감지력.

하지만 유지한은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

“네가 거기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네 이놈!!

콰아아앙!!

유지한이 그녀를 놀리기가 무섭게.

전화기의 스피커에서 강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에블린이라는 다크 엘프가 주변에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단순하네.’

살짝 건드리기만 했는데 불같이 화를 내는 다크 엘프.

유지한은 그녀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차원 전화기의 소음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분노한 에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약 2분 뒤였다.

—지금 당장 머리를 조아려 빌지 않으면,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조아렸다고 말하면 믿을 거냐?”

—…….

“쯧쯧! 커드스타는 멍청이들의 모임이었나.”

—닥쳐라!

다크 엘프 여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유지한의 귀를 찔렀다.

유지한은 그에 응수하듯 말했다.

“네 이름과 목소리. 똑똑히 기억했다.”

—같잖은 인간 주제에 날 협박하는 게냐!

“그래. 지금이라도 머리를 조아려서 빌면 용서해주마.”

—허…….

그대로 되돌려받은 협박에 에블린은 어이가 없는 듯 숨을 내뱉었다.

—절대로! 절대로 너만큼은 용서하지 않겠다. 커드스타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그러시던가.”

—네 팔과 다리를 갈기갈기 찢어 짐승의 먹이로 뿌려주마! 몸뚱이만 남은 네가 반드시 살아서 그걸 볼 수 있도록…….

뚝!

유지한은 에블린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도중에 전화를 끊었다.

“성격 더러운 거 봐. 아마 주변에 친구 1명도 없을 거야.”

—우히히! 동감!

실프는 그에게 공감하듯 위로 튀어 올랐다.

*****

부서진 나무의 파편이 가득한 땅바닥.

먼지가 잔뜩 휘날리는 그 중심에서 에블린 커드스타는 검은 얼굴이 검붉게 물들어버릴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 다음 네 목을 잘라 어린아이들이 공처럼 차면서 갖고 놀게끔 할 것이야! 반드시! 반드시 네게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죽음을 안겨주마——!!”

야생마처럼 거칠어진 숨결.

그녀는 차원 전화기를 터트려버릴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측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녀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왜 조용한 거냐?’

혹시 이제 와서 겁을 집어먹은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늦었다고 말해줄 셈이었다.

녀석을 용서해줄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까.

“……?”

계속해서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

이상함을 느낀 에블린은 전화기를 살폈다.

대화 중이던 인간들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건 약 1분 뒤였다.

“무……. 무시당했어?”

10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다른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해본 적이 있던가.

듣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난동을 부렸다는 창피감.

그리고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정신적 타격이 에블린에게 몰려왔다.

“우후, 우후후후…….”

추위가 아닌 오로지 분노로 인해 파르르 떨려오는 손.

엘프조차 아닌 인간, 그것도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놈에게 진심으로 분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같은 커드스타 일족의 엘프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래도록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여겨지리라.

“에, 에블린 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에블린의 부하들은 헐레벌떡 그녀에게 달려왔다.

멀리서 느껴진 마력과 커다란 충격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와 눈을 마주친 부하들은 곧장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너희……. 내 명령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느냐?”

“아, 알고 있습니다!”

다크 엘프들은 허리를 꼿꼿이 펴서 차렷자세를 했다.

성격 나쁜 그녀의 명령에 거역하는 순간 그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은 단 하나.

오로지 처형뿐이었다.

“하나만 물어보마. 만약 한낱 인간이 날 무시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허어! 감히 그런 인간이 있단 말입니까?”

“저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찾아서 죽여버려야 합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제가 당장이라도 녀석을 잡아다 바치겠습니다!”

쿵! 쿵! 쿵!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명령을 기다리는 부하들.

통화를 나눴던 유지한과는 너무나도 다른 태도였다.

자신에게 충실한 부하들을 보고서야 에블린의 분노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아니. 너희가 나설 필요도 없어.”

솨아아—

에블린의 목에 새겨진 문신에서 피처럼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눈동자 위로 그와 같은 붉은 빛이 떠오른 그녀가 뜨거운 숨을 토하며 말했다.

“이놈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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