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악연 (3)
무언가를 알고 있는듯한 제리의 중얼거림.
유지한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뭐가 어떻다고?”
“자기야! 그 마법사가 온몸에서 초코 우유를 내뿜었던 걸 기억해?”
평범한 몬스터를 돌연변이로 바꿔버리는 아제시아의 약물이자 칠라의 말문이 트이게 된 원인.
인질로 잡혀갔던 정영욱의 몸에는 그 약물이 잔뜩 숨겨져 있었다.
“초코 우유는 매우 낮은 확률로 인간의 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독극물이기도 해.”
“……!”
“입에다 들이부어도 금방 몸 밖으로 배출돼서 문제가 없긴 한데, 정영욱은 몸 전체가 약물에 절어있었으니까……. 지금쯤 완전히 맛이 가버렸을지도.”
설명을 전해 들은 유지한이 뒷목을 부여잡았다.
이번 사태의 원인이 그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결국 너희 때문이었냐……!”
“어어? 그때 걔들이랑 우리를 하나로 묶지 마.”
“맞아! 지금의 우리는 사실상 명예 지구인이라고.”
다급하게 변명을 내뱉는 아뎀과 제리.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뎀은 그 당시 현장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제리는 끝까지 유지한의 곁에 붙들려 있었으니까.
“치료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지.”
“운 나쁘게 중독된 놈들의 최후는 하나같이 좋지 않았어.”
“세상에 멸망이 찾아오기도 전에 전부 다 뒈져버렸거든.”
이미 초코 우유에 중독된 인간을 되돌려놓을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정영욱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우리가 나설 수도 있겠는데?”
“너희가?”
“벌써 잊었어? 초코 우유를 만든 게 우리였잖아.”
“사람을 찾아낼 방법은 없어도 그 약물을 찾아낼 방법은 있지.”
생물에게 투여된 약물을 탐지하는 마법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탐지 마법의 범위를 크게 늘릴 수만 있다면.
정영욱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부탁 좀 하자.”
“맨입으로?”
“돈은 충분히 줄게.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따로 말해도 좋고.”
“돈은 딱히 필요 없는데…….”
제리가 은근슬쩍 유지한에게 입술을 들이밀었다.
다만 그 행동에 익숙해진 아뎀은 그녀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널 도와주는 대가로 우리에게 걸린 활동의 제약을 풀어줘.”
한국이라는 환경에 나름 잘 적응했어도 어디까지나 침입자 취급을 받는 제리와 아뎀.
그들은 항상 영웅부의 감시 아래에서 활동해야만 했다.
밤 시간대에는 감시자를 동반하고도 외출이 차단될 정도로 빡빡한 제약까지 걸려 있었다.
따라서 아뎀은 그 제약의 해제를 원했다.
“그건 내 권한이 아니야.”
“알아. 하지만 네 부탁이라면 영웅부에서 검토는 하겠지. 넌 지금 한국에서 가장 주가가 높은 영웅이니까.”
지금까지도 주가가 높게 상승 중인 유지한 파티의 파티장.
당장 그가 영웅부 장관 조두진과 대면하길 원한다면 조두진이 먼저 그에게 찾아갈 것이었다.
그 정도로 영향력이 생긴 남자의 부탁은 쉽게 무시할 수 없겠지.
“뭐……. 그 정도는 가능할지도.”
“나이스! 약속한 거다?”
“잠깐만, 아뎀! 나는 아직 동의 안 했어!”
“제리. 너 지금 유지한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는 거야?”
“아,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유지한을 미끼 삼아 계획에 제리를 꼬드기는 아뎀.
제리는 유지한을 힐끔대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뭐해? 한 마디 해줘.
실프의 재촉에 유지한이 짧게 혀를 찼다.
그는 지금 뭐가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나는 물건 잘 찾아내는 여자가 좋더라.”
“그런 뻔한 수작에 내가 넘어갈……!”
콱!
유지한은 제리의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뒤이어 토끼 눈을 한 그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찾아줘.”
“……네.”
그러자 얌전히 꼬리를 내리는 제리였다.
*****
정영욱이 일으킨 택배 사건이 벌어지고 며칠 뒤.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김시후의 부탁으로 찾아온 엘프 마일리가 산뜻한 눈웃음을 지었다.
유지한 파티를 안내하고자 찾아온 영웅부 관계자들은 모두 그녀를 힐끔거렸다.
도저히 50대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빼어난 외모 덕분이었다.
“설마 제가 다시 그루디아의 일에 관여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루디아라는 차원에서도 시오론 왕국의 왕위 계승을 두고 발생했던 갈등을 피하고자.
3왕녀였던 김시후의 어머니 에르나 하스와 함께 왕국을 떠났던 하녀 마일리.
그녀는 연락이 끊긴 그루디아 원정대를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누나는 옆에서 조언만 해주시면 돼요.”
“최대한 노력해볼게. 그리고…….”
친절한 말투로 모두를 대하던 마일리가 이내 차렷 자세를 했다.
그리고는 유지한의 정수리에 내려앉은 실프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위대하신 정령을 뵙습니다.”
—어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인터넷 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처음 듣는 실프의 목소리.
내가 감히 위대한 존재의 시간을 뺏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면서 지금까지 실프를 찾아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마일리는 조금 감격한 얼굴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말씀을 하시는군요.”
—말하는 정령 처음 봐?
“실프 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에르나랑 맨날 붙어 다니던 친구였잖아. 거의 껌딱지였지.
“제, 제가 어찌 에르나 님의 친구라고 불릴 수 있겠습니까.”
마일리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왕녀와 단지 그녀를 맡아서 담당했을 뿐인 미천한 하녀.
그루디아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고 한들, 둘 사이에는 커다란 신분의 격차가 존재했다.
—뭐야? 불만 있어?
“아, 아니요! 제가 감히 불만을 가질 리가.”
—내가 친구라면 친구인 줄 알아!
“네…….”
—우히히히!
차마 실프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 에르나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내 일행은 안내원들을 따라 영웅부에서 준비해준 사무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오직 그루디아로 떠난 원정대를 지원해주는 인력들이 모여 있었다.
“우와! 유지한 파티다.”
“거 봐, 내가 오늘 오신다고 했지?”
“내 최애인 민유리 님이 안 보이네…….”
“흑흑. 칠라도 없어.”
유지한 파티를 보고 놀라 수군거리는 직원들.
흡사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듯한 반응이었다.
유지한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된 반응을 뒤로하고 별도로 준비된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익숙한 형태의 차원 전화기 1대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저게 그루디아 원정대와 연결되는 차원 전화기군요.”
“맞습니다.”
유지한은 눈을 빛냈다.
저것만 어떻게든 작동시킨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여행자의 종이를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맞습니다만,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습니다.”
“고장 난 건 아니고요?”
“지금까지 300번이 넘는 횟수의 점검을 진행했습니다.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카를렘과의 연결에 성공한 물건과 비교해도 전혀 다를 바 없는 차원 전화기.
그런데도 연결이 안 되는 것으로 보아,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은 몇 가지로 나뉘었다.
김시후는 그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큰 추측을 내뱉었다.
“그루디아 원정대의 차원 전화기가 망가진 건…….”
소형 추적 아티팩트가 붙어있는 차원 전화기는 잃어버리더라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루디아 원정대에는 시안 피어스처럼 실력이 뛰어난 영웅들이 여럿 있었으니 분실의 염려는 적었다.
하지만 기기가 망가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꿈의 금속이 드리미움이 소량이나마 첨가된 물건인 만큼 수리하기가 매우 어려울 테니까.
“그건 아닐 거다.”
“카지미르!”
그때 기다란 백의를 두르고 등장한 카지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이 아티팩트는 한쪽이 고장 나면 반대쪽에서 알아챌 수 있다.”
“언제 그런 기능을 넣었대.”
“일부로 기능을 넣었다기보다는……. 너희가 제공한 드리미움 덕분이다. 나를 포함한 연구진들조차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다면 그루디아 안에 있는 차원 전화기는 아직 멀쩡하다는 뜻이네.”
정상적인 전화기 사이에 연결이 이뤄지지 않았을 뿐인 상황.
과거의 카를렘 원정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었다.
한동안 전화기를 손으로 만져보며 살펴보던 유지한은 말했다.
“슬슬 시작하자.”
“네!”
먼저 앞으로 나선 건 김시후였다.
품에서 작은 크기의 마법 스크롤을 꺼낸 그가 그 위에 차원 전화기를 올렸다.
[디멘션 윙]
지팡이로 마력을 주입하자 스크롤의 마법진이 파랗게 빛났다.
그 위에 놓인 차원 전화기는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신호를 증폭시키고 마구잡이로 흩뿌려서 응답하는 전화기를 찾아볼게요.”
파앗!
차원 전화기를 둘러싼 김시후이 마력이 작은 날개의 형상을 이루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던 날개는 활짝 펼쳐지며 요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은 암컷 새에게 구애하는 수컷 새의 날갯짓과도 닮아 있었다.
‘카븜에서 배운 마법이군.’
날것의 느낌이 많이 느껴지는 그 마법은 카븜의 마법사로부터 습득한 마법이었다.
팔짱을 낀 유지한은 극도의 집중 상태로 들어간 김시후를 기다렸다.
“흐으음…….”
그리고 10분쯤 흘렀을까.
마력으로 생성된 날개의 날갯짓이 아주 격해졌을 무렵.
김시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서가 잡힐 듯 말 듯 한 데……. 참 쉽지 않네요.”
“그렇습니까…….”
기대가 한풀 꺾이며 실망하는 영웅부의 직원들.
그때 마일리가 셔츠의 소매를 걷으며 앞으로 나섰다.
“마법을 계속 유지해. 내가 도와줄게.”
“네!”
“실프 님!”
—으응?
“잠깐만 저를 도와주십시오.”
실프는 마일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 무례를 용서하소서…….”
마일리가 실프의 빛나는 초록색 몸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차원 전화기를 향해 반대쪽 손을 뻗었다.
[XXX XXX]
시를 읊조리듯,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내뱉는 마일리.
그러자 유지한은 몸을 움찔했다.
‘저건……!’
김시후가 처음으로 나무 거인을 소환하여 바바리안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던 순간의 모습이.
마일리에게 똑같이 비춰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원 전화기 위로 돋아난 마력의 날개가 벽에 닿을 정도로 커졌을 무렵.
김시후는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있다.”
“네?”
“아주 희미하지만, 차원 전화기의 기척이 느껴져요. 그것도 3개씩이나.”
“그루디아 원정대가 챙겨갔던 차원 전화기도 정확히 3대였다.”
“다, 다른 차원의 전화기를 찾아내신 건가요?!”
“허어억……!”
그 많은 인력과 고생을 겪었음에도 작은 단서 하나 잡지 못했거늘!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김시후의 말에 영웅부 직원들이 경악했다.
“그런데 3개의 전화기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요.”
“원정대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건가.”
“연결도 가능한 겁니까?”
“잠시만요.”
입술을 오므린 김시후가 지팡이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차원 전화기의 스피커에서 노이즈가 들려왔다.
지직! 지지지직…….
전화기가 서로 연결되기 직전에 발생하는 징조.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모든 잡음이 사라졌을 때, 김시후가 말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있으면 대답해봐요!”
한국을 떠난 원정대원의 대답을 바라며 건넨 인사.
시안 피어스가 대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감돌던 그때였다.
—가늠조차 안 되는 거리에서 소리를 전달하는 물건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구나.
기대와는 다르게 대답을 해온 인물은.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뭐라는 거야?’
한국어가 아닌 매우 낯선 언어.
아마도 그루디아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리라.
여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유지한은 김시후를 바라봤다.
다만 어머니로부터 해당 언어를 접했던 김시후조차 자유로운 회화까지는 불가능했기에.
옆에 있는 마일리가 그 대신 나섰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후후! 나? 나 말이더냐?
여인의 목소리에서는 어째서인지 즐거움이 잔뜩 묻어났다.
그리고.
—에블린. 에블린 커드스타.
“……커드스타?”
전화기 너머 상대방의 이름을 듣고서 마일리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째서 다크 엘프가……!”
커드스타는 그루디아에서도 매우 악명 높은 다크 엘프 일족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