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악연 (2)
칠라가 짤막한 팔을 허우적대며 소리쳤다.
“찍찍! 맙소사!”
김시후에게 벌어졌던 테러 소식이 유지한 파티원들에게도 전해진 덕분이었다.
이미아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마법이었어?”
“다른 것보다 오로지 저라는 마법사를 노리고 설계된 마법이었어요. 이건 절대 보통 집념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김시후는 자신을 공격한 정영욱을 향해 이를 갈았다.
택배 상자의 폭발이 주변에 끼친 영향이 크다 보니 영웅부에서도 그에게 먼저 연락을 걸어왔었다.
한때 원정을 함께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던 그에게 어떤 배신감을 느낄지…….
김현태 파티에서 버려졌었던 유지한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무 급발진인데.’
유지한의 기억 속 정영욱은 제법 뛰어난 마법사였다.
잠깐이나마 함께했던 승급 시험에서는 그와의 협력으로 대련에서 전승을 거두었다.
그와 동급의 마법사 중에서는 그를 따라올 만한 마법사가 거의 없을 정도.
비록 김시후만큼 아니어도 말이다.
“넌 어떻게 하길 원해?”
“제압하거나, 죽여야 해요.”
“…….”
한때 친구였었던 이를 죽이겠다는 살벌한 말에.
유지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그를 내버려 두면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똑똑.
그때 누군가가 길드 사무실의 문을 두들기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은 하늘보호소의 드워프, 프란 페이저였다.
“어……. 형님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렇지 않아도 잔뜩 긴장한 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인 유지한 파티를 보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눈치를 살피는 그를 보며 김시후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럴 리가. 어서 들어와!”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허리를 90도로 꺾어 깍듯하게 인사를 한 프란이 김시후의 옆으로 걸어왔다.
“오늘 왜 부른 건지 알고 있지?”
“네, 네! 영광스럽게도 저를 데려가시겠다고……!”
“이게 네 계약서야.”
곧 영웅 학원의 졸업을 앞둔 프란.
김시후는 미리 태블릿PC에 준비한 전자 계약서를 프란에게 보여주었다.
난생처음으로 진짜 영웅 계약서를 마주한 프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천히 읽어봐.”
영웅 학원에서 계약에 관해 조언을 건넸던 교관들의 말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순간.
프란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계약서 따위 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과……!”
“계약서를 안 읽는다고?”
“얘가 정말 큰일 날 소리 하네.”
“찍찍! 우리 길드에 호구가 왔구나!”
—우히히! 호구네 호구!
“호, 호구?!”
“앞으로 널 호구라고 부르겠다! 찍!”
칠라와 실프에게서 순식간에 호구라는 별명을 따낸 프란은 무척 당황해했다.
유지한이 재차 계약서 읽기를 권유하자 프란은 마지못해 문장들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연봉과 인센티브 관련 내용이 적힌 부분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건……”
레드홀이나 주사위, 워리어즈 등 한국의 거대 길드에서 신입 영웅에게 지급하는 연봉은 예비 영웅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잘 알려진 편이다.
보통 큰 규모가 아닌 길드와 계약을 맺을 때는 그 연봉과 비교하며 조율하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라고 봐도 좋았다.
‘기본 연봉만 2억에, 성과급 지급 조건도 너무 훌륭해.’
하지만 이 계약서에 적힌 건 5급 영웅에게 지급되는 평균치를 뛰어넘는 금액.
영웅 학원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낸 인재라면 모를까.
프란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의 성적을 거뒀던 학생이었다.
거대 길드조차 중위권 성적의 예비 영웅에게 이만한 조건을 먼저 제안하지는 않으리라.
“제, 제가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계약해도 될까요?”
“나중에라도 다른 길드로 떠나지 말라는 뜻이야.”
“따흐흑! 시후 형님……!”
눈시울이 붉어진 프란은 더 재볼 것도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찍찍! 호구야! 환영한다!”
“영광입니다! 칠라 형님!”
—앞으로 잘 해? 엉?
“감사합니다! 실프 형님!”
인간, 친칠라, 정령 등 가리는 것 없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프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지한은 말했다.
“이제 입사 선물을 줘야지.”
“네? 선물, 말입니까?”
“여기 앉아봐.”
프란을 의자에 앉힌 유지한이 품속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이내 그의 손에 잡힌 물건은 차원 전화기였다.
“그게 뭡니까?”
“보고 있어.”
띡! 띡!
차원 전화기의 버튼을 조작하자 잡음이 낀 듯한 노이즈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제 말하면 되는 건가?
전화기 너머에서 중년 남성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말하시면 됩니다.”
—……프란. 거기 있는 거냐?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가 프란을 부르고 있었다.
낯설면서도 어쩐지 그리운 목소리.
무언가를 눈치챈 프란 또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지한 형님……. 이건 대체 뭡니까?”
“카를렘과 이어지는 통신 수단이라고 보면 돼.”
“……!”
“뭐해? 오랜만에 아버지께 인사드리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가 전화기 너머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프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아버지?”
—……그래.
“진짜로 아버지예요?”
—애비만 남겨두고 홀라당 떠나버리더만. 이제 행복하냐?
프란이 집에서 홀로 떠나버린 일을 언급하는 가단 페이저.
상대방이 진짜 아버지라는 걸 깨달은 프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항상 같이 떠나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고 말도 없이 가 버리면 어떡하냐?
“이번에도 지구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거절하셨다고 들었어요.”
—이젠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카를렘도 살만해졌다. 다 네 옆에 있는 사람들 덕분이지.
“…….”
—그래서 프란,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
“아버지야 말로 맨날 딱딱한 빵이나 드시고…….”
—이제 그런 쓰레기 따위는 먹지 않는……
부자간에 몇 년간 밀려있던 대화를 나누는 가단과 프란 페이저.
유지한 파티는 옆에서 흐뭇하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
통화를 끝낸 프란 페이저는 유지한에게 무릎 꿇어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들은 제 은인이십니다!”
“오버하지 말고. 다음에 아버지랑 통화하고 싶으면 또 말해.”
“네!”
고개를 들어 유지한을 보는 프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자신의 우상을 바라보는듯한 얼굴이었다.
“프란의 파티원은 어떡하지?”
“유리 누님. 전 혼자서 활동해도 괜찮습니다!”
파티원 충원이 되기 전까지는 혼자서 활동하는 프란이었다.
길드장 김시후는 그런 그에게 추가적인 인력 충원을 약속했다.
“네 장비는 우리 공방의 남호열 씨가 만들어주실 거야.”
“오오……!”
“길드원들 소개시켜줄 테니까 깍듯하게 인사드려.”
“네!”
똑똑.
그때 다시금 사무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케로즈에서 퇴사한 이현재였다.
선물용 음료를 사 들고 온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흐흐, 저 이제 갈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지한 씨…….”
“케로즈와는 완전히 정리된 건가요?”
“지분 정리까지 전부 끝났어요.”
“그럼 바로 계약서부터 쓰죠.”
미리 전화로 계약 조건을 상의했던 이현재와의 계약은 순식간에 체결되었다.
유지한은 그의 앞으로 프란의 몸을 내밀었다.
“이쪽은 따끈따끈한 신입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프란 페이저입니다!”
“호오? 드워프인가요?”
“맞습니다!”
흥미로운 눈으로 프란의 몸을 꼼꼼하게 살피는 이현재.
그가 프란의 탄탄한 정강이를 만져보며 말했다.
“신체 조건이 좋네! 키는 조금 작지만 뼈도 굵고 튼튼해 보이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현재 씨가 신규 길드원 탐색과 더불어 육성 담당으로 커리큘럼을 짜주셨으면 좋겠어요.”
영웅 매니지먼트와 영웅의 육성에 상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케로즈에서는 한 부서의 관리직에 오르며 직접 발로 뛰는 업무가 적었던 이현재였다.
유지한은 그런 그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업무를 부탁했다.
“육성! 파릇파릇한 신입의 육성이라……! 지한 씨, 그거 아세요?”
“어떤 거요?”
“육성, 그거 제가 아주 좋아하는 단어예요.”
츄릅!
전 직장에서는 풀지 못했던 한을 풀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현재가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으로 혀를 할짝였다.
어느새 그에게 어깨를 붙잡힌 프란은 긴장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프란은 당분간 현재 씨에게 맡겨두면 되겠군.’
이현재라면 저렇게 나올 줄 알았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프란도 조만간 깨닫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지한이 형. 아까 전에 길드 계좌에 카를렘 원정 정산금하고 보상금까지 전부 다 들어왔어요.”
“그래? 다 합해서 얼마쯤?”
“170억 정도? 영화 출연료랑 사임 씨가 처분한 몬스터 사체들까지 전부 포함한 금액이에요.”
오로지 현금으로만 약 170억이 넘게 들어온 길드 계좌.
거기에 길드에 보관 중이던 각종 소재들과 이세계에서 가져온 물건까지 합치면.
감히 측정하기 힘들 정도의 금액이 될 것이었다.
“우리 부자인가?”
“그러게요. 어느새 부자가 됐네.”
16억을 보고서 크게 감탄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이제는 그 10배의 금액이 길드 계좌에 담겨 있었다.
외부의 투자를 받지 않고, 길드에서 아무런 사업조차 벌이지 않고 이뤄낸 결과!
전 세계를 돌아봐도 이런 성장세인 길드는 없으리라.
“이번 기회에 주변에 선물이나 드려야겠어.”
“그건 제가 준비해볼게요.”
“그루디아 쪽 조사는 어떻게 돼가고 있어?”
“아, 조만간 마일리 누나가 도와주시겠대요.”
그루디아 출신의 엘프 마일리.
그녀는 김시후의 요청으로 시안 피어스의 행방을 알아내는 일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실제 그루디아에서 지구로 넘어왔던 인물인 만큼,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터였다.
*****
“현재 씨! 예전에 저희한테 처음 추천서를 써준 길드가 어디였죠?”
“샤프 헌터 길드요. 그쪽 선물은 제가 들고 갈게요.”
“원정에 참여했었던 길드에도 하나씩 보내고…….”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하는 법.
풍족해진 길드 자금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선물을 구매하는 일이었다.
해외에 있는 길드까지 비행기를 타고 발송되는 선물들.
유지한은 그중에서 몇 개를 챙겨 영웅부를 찾았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선물을 받은 양지철은 매우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제법 비싼 선물의 값어치보다도, 괴아리 사냥터에서 그가 직접 발굴해낸 길드가 이제는 이런 여유까지 부릴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뒤이어 유지한이 찾아간 곳은 제리와 아뎀이 머무는 연구실이었다.
“우앗! 자기야!”
“달라붙지 마.”
“이이잉! 오랜만이잖아!”
유지한은 온몸을 던져오는 제리의 이마를 세게 밀어냈다.
계속해서 달라붙는 그녀를 쳐낸 뒤, 아뎀에게 먼저 선물을 건넸다.
“덕분에 차원 이동이 순조로웠어.”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
웃는 얼굴로 선물을 받아드는 아뎀.
유독 김시후의 차원 마법이 남들보다 더 뛰어났던 이유 중에는.
아제시아 출신인 두 사람의 긴밀한 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도 선물 줘!”
“받아라.”
“이거 말고 한 번만 키스해줘!”
—변태녀! 지한에게서 떨어져라!
“갈! 정령은 닥치고 있어!”
서로 투닥거리는 실프와 제리.
그 사이에서 유지한은 말했다.
“너희 정영욱을 기억해?”
“리우스에게 인질로 잡혔던 그 남자?”
“실력도 안 되는데 까불다가 혼난 놈! 저번에 갑자기 사라졌다며?”
“그놈이 택배 상자에 폭발 마법을 심어서 김시후를 죽이려고 했어.”
대화에 갑자기 무거운 주제가 떨어지자.
유지한을 보고 야단을 떨던 제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혹시 아제시아의 마법 중에 실종된 사람을 찾을 만한 마법은…….”
“그런 건 없는데.”
“역시 그렇겠지.”
혹시나 했던 기대였기에 바로 마음을 접는 유지한이었다.
그런데 그때 제리가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설마……. 그때 변해버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