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인연 (5)
—단, 저희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방금 요청하신 물건들을 전달하는 건 시안 피어스를 찾아낸 이후로 하겠습니다.
시안 피어스를 찾아낸 뒤에 요구 사항을 들어주겠다는 엔젤스 가든.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이기도 했다.
시안을 찾지도 못하고 먼저 물건을 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김시후가 말했다.
“저, 질문이 있습니다!”
—네.
“그래서 엔젤스 가든이 저희에게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뭐예요?”
—그루디아로 떠난 시안과의 전화 연결, 혹은 현지에서의 자세한 행방을 알아내는 겁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루디아에 계신 시안 피어스 님께서 이미 전사하셨다면 어떡하죠?”
—…….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던진 질문에 클라크 힐이 입을 다물었다.
그루디아와 연락이 닿은 뒤 시안 피어스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번 거래에 대한 최종 정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영약까지는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영약 말고 종이를 요청한다면요?”
—그건 조금 어렵겠습니다.
“두 번째 요구 사항이었던 종이는 줄 수 없다는 건가요?”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저희가 시안 님의 생명까지 구해낼 수는 없는데요.”
김시후는 엔젤스 가든에게 아쉬움을 드러내며 유지한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케로즈 출신인 영웅으로부터 김시후가 처음 입사 지원 메일을 받고.
실프와 계약을 맺은 그를 중심으로 꿀잼이 지금처럼 거대 길드와 독대를 할 정도의 높은 위상을 얻기까지.
유지한은 조직과 파티원들의 성장에 집중하며 개인적인 요청 따위를 해온 적이 거의 없었다.
——난 그 종이가 필요해. 반드시.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엔젤스 가든이 보관 중인 한 보물을 강하게 원한다는 유지한이었다.
카를렘에서 그와 똑같은 물건을 봤다나 뭐라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어도…….’
그렇다면 길드장으로서 꼭 구해주고 싶었다.
그가 꼭 갖고 싶다는 물건을.
—그러면 요구 사항에 한 가지 항목을 더 추가하죠. 시안 피어스가 죽었다면 저희가 그의 시체라도 수습하게 해주십시오.
“그 말씀은 즉, 저희 보고 그루디아로 가서 시체를 가져오라?”
—꼭 이세계로 가달라는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고…….
아닌 척 말하지만, 시안의 행방을 조사하는 걸 뛰어넘어 유지한 파티가 이세계로 출장을 가길 원하는 엔젤스 가든이었다.
그러자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이미아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타산이 안 맞아. 직접 이세계로 가는 건 위험 부담이 커.”
나름 일이 잘 풀렸던 카를렘에서도 몇 차례 위기를 겪은 유지한 파티였다.
그런데 연달아 또 다른 이세계로 향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결정.
충분히 거부감을 느낄만했다.
“엔젤스 가든이 이렇게 쪼잔한 길드야?”
—쪼, 쪼잔하다니요!
“겨우 영약이나 보물 한두 개로 끝낼 문제가 아니잖아. 당신들도 모르진 않을 텐데?”
—…….
“양심이 정도껏 있어야지.”
쏘아붙이는 듯한 이미아의 말에 클라크 힐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팔짱을 낀 이미아는 계속해서 불만을 드러냈다.
—당신들은 카를렘에서 아주 빠르게 돌아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쉽게 보는 거야?”
—쉽게 보는 게 아니라 그루디아로 가서 도와주시면…….
“당신. 우리가 우스워?”
—……!
이미아가 눈을 부릅떴다.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화를 내며 더 무섭다고 하던가.
그녀의 눈동자에서 흉흉한 빛이 맴도는 걸 보고 클라크 힐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너무 만만하게 봤나.’
클라크 힐은 카메라 너머에 있는 이미아의 눈치를 살폈다.
케로즈가 해외 마케팅을 열심히 진행한 덕분에 엔젤스 가든은 유지한 파티원들 중에서도 그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저돌적인 전투 외에는 항상 얌전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이미아.
그래서 별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
“…….”
“…….”
정적이 맴도는 회의실.
턱을 괴고 앉은 유지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시안 피어스와 교신이 이뤄지는 것이 최선이겠지.’
하지만 차원 전화기를 통한 연락이 실패하거나.
시안 피어스가 사망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경우.
엔젤스 가든의 종이를 얻기 위해서 직접 그루디아로 가야만 했다.
‘나 혼자 갈 수는 없어.’
파티장으로서 파티를 이끌어가는 몸.
개인적인 소망을 위해서 이제껏 함께한 파티원들을 두고 혼자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파티 전체를 이세계에 데려가는 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
‘다만,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어보던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클라크 힐 길드장님.”
—네.
“만약 저희가 그루디아로 가게 됐을 때의 요구 사항을 추가하죠.”
—어떤……?
“엔젤스 가든의 보물고를 완전히 개방하고, 그 안에서 보물 10개를 고르게 해주세요.”
—뭐, 뭐라고요? 10개?!
보물을 무려 10개나 꺼내달라는 말에 클라크 힐이 입을 쩍하고 벌렸다.
엔젤스 가든의 보물고가 어떤 공간이던가?
세계의 수많은 재벌들이 큰돈을 내고서라도 구경하길 원하고.
1급 영웅인 윤도하마저도 그곳을 다녀온 뒤에 부러움을 드러냈다던, 그런 공간이었다.
희귀품 수집을 즐기는 시안 피어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보물고!
거기에서 10개의 보물을 자유롭게 꺼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건 보통 쉽지 않은 요구였다.
“저희 파티원 1명당 2개씩, 보물고에서 원하는 걸 갖게 해주시면 제법 괜찮은 거래가 될 것 같네요.”
—10개는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꿀잼의 유지한 파티는 4명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칠라까지 합치면 5명이 맞습니다.”
—허어! 말도 안 되는……!
“어? 지금 칠라 무시하시는 겁니까? 회의실로 불러올까요?”
—아니, 이건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당황한 듯 손을 허우적대는 클라크 힐.
—잠시만요…….
또다시 엔젤스 가든의 마이크가 꺼졌다.
직전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들리지 않는 의논을 나누는 사람들.
마찬가지로 마이크를 꺼둔 주사위의 회의실에서 김시후가 넌지시 말했다.
“지한이 형. 10개는 너무 많지 않아요?”
“너무 많은 편이지. 저쪽에서 절대로 10개는 안 줄 거야.”
“……처음부터 그 이하로 줄일 생각이셨네요?”
“그렇지.”
유지한은 김시후의 질문에 긍정하며 커다란 모니터에 비치는 엔젤스 가든의 회의실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가 켜졌을 때.
—여러분에게 보물고를 개방하되 가져갈 수 있는 보물의 개수는 5개……. 아니, 6개로 하시죠.
유지한은 자신이 원하던 것 이상의 합의점에 이르렀다.
“썩 나쁘진 않네요.”
단지 겉으로 마음에 든다는 티를 내지 않았을 뿐.
*****
“저는 엄마 친구들 통해서 그루디아 쪽 조사 좀 해볼게요.”
“내가 도와줄 거 생기면 바로 연락해.”
“나도 도울게.”
만족스러운 결과로 회의를 마친 유지한은 파티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현재 시간은 하늘에 어둠이 가득한 늦은 저녁.
엔젤스 가든이 있는 유럽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저녁에 회의를 진행한 것이었다.
‘돌아가서 집안 정리나 할까.’
이따금 고모인 한서인이 들리긴 했지만 구석구석 먼지가 존재하는 집안.
유지한은 대청소를 계획하며 집으로 향했다.
“어라? 혹시 영웅 유지한 씨 아니세요?”
“커흐흠.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쓰읍, 맞는 거 같은데…….”
반쯤 얼굴을 가린 유지한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민들.
유지한의 주머니 속에서 잠자코 있던 실프는 말했다.
—아닌데! 유지한 아닌데!
“어? 이게 무슨 소리지?”
“머릿속으로 때려박는듯한 이 소리……!”
“실프! 실프의 목소리다!”
“진짜 유지한이었잖아!”
실프의 개입으로 정체가 들통난 유지한이었다.
넓은 길가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전부 그가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와, 여기서 유지한을 보다니!”
“오늘 대박이다.”
“악수! 악수 한 번만요!”
“사인 좀 해주세요!”
“실물이 영상보다 훨씬 낫네?”
무수히 많은 악수와 사인의 요청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차마 모든 요청을 무시하지 못했던 유지한은 오른손으로 펜을 잡고 왼손으로는 다른 사람과 악수를 했다.
그럼에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더 몰리자.
후웅!
그는 바람을 타고 건물 위로 뛰어올랐다.
“다들 다음에 봅시다!”
“앗! 도망간다!”
“잡아라!”
그의 뒤를 쫓아가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바람처럼 사라지는 영웅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달한 유지한은 곧장 실프에게 꿀밤을 먹였다.
—으갹!!
“너 인마, 눈치가 있어야지.”
—하, 하지만 요새 계속 가만히 있어서 심심했는걸! 지한, 너도 그냥 인기를 즐기라고!
“피곤해.”
—피할 수 없는 인기인의 숙명이다!
급격하게 치솟은 인지도는 그만큼 귀찮은 과정들을 가져오는 법.
실프의 입단속을 시킨 유지한은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뚫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내 집 근처에 도착한 그는 입구 앞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을 발견했다.
—지한! 너희 고모 아니야?
혹시 따라온 사람인가 경계했지만, 그의 고모인 한서인이었다.
“고모?”
“왔구나.”
“오셨으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지.”
조카가 이세계에서 돌아온 이후 첫 만남.
한서인은 유지한을 중심으로 빙 돌면서 그의 몸을 요리조리 살폈다.
“다친 곳은?”
“보시는 바와 같이.”
“내상은?”
“전혀요.”
“그 저주라는 마법은?”
“어…….”
유지한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목에 나타났던 그 의문의 점은 저주라는 계열의 마법이 거의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한서인도 마찬가지였기에.
괜히 알린다면 걱정만 늘어나겠지.
“문제없어요.”
—지한!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면…….
“입 다물라.”
—으갸각!
“……뭐, 일단 들어가자.”
유지한과 정령과의 몸싸움을 보며 어깨를 으쓱인 한서인은 그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섰다.
다만 한서인은 집 현관을 보자마자 한숨을 내뱉었다.
“얼마 전에 정리한 현관이 벌써 난잡해졌구나.”
“남자 혼자 사는 집이 그렇죠. 그냥 두세요.”
“이런 건 참을 수가 없어.”
착! 착! 착!
어질러진 신발들을 각을 맞춰 정리하는 한서인.
여전히 군 복무 시절의 습관이 남아있는 그녀에게 무질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먹고 왔다.”
“냉동실에 이세계에서 가져온 문어 요리 남아있는데.”
“……그런 건 너나 많이 먹어라.”
눈살을 찌푸린 한서인은 과일이 든 봉투와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외투를 대충 정리해둔 유지한은 그녀의 곁으로 이동했다.
“아버지의 조사는 어떻게 됐어요?”
고모에게 말을 꺼내는 유지한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오늘 그녀와 만난 이유는 단지 서로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카를렘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한서인이 알아보던 아버지의 정보를 전해 듣기 위함이었다.
“네가 소개해준 문정희라는 정령사와 내가 만났던 오빠의 친구 기억하지?”
“예.”
“그 사람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정리한 정보다.”
한서인은 가방의 지퍼를 열고 겹겹이 접혀있는 커다란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활짝 펼쳐서 벽에 붙이자 관계도와 비슷한 표가 드러났다.
유지한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여 나뭇가지처럼 옆으로 뻗어 나가는 구조.
생각보다 커다란 표를 보고 놀란 유지한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언제 이런 걸 정리하셨대.”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그리고 조사를 하다 보니 하나둘씩 이상한 점이 늘어나서.”
“어떤 점이요?”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한서인은 이름 위에 물음표가 그려진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목하며 말했다.
“지금 가리킨 사람들은 전부 과거에 오빠 쪽과 교류가 많았던 사람들이야.”
“물음표의 의미는요?”
“실종됐다는 뜻이다. 그것도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말이지.”
하나같이 제대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실종 사건들.
그리고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실종자들은 대부분 입양아거나, 나처럼 이복형제를 갖고 있어.”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요.”
유지한의 아버지와 한서인의 관계처럼 가족 간에 조금 다른 핏줄을 보유한 이들.
한두 사람이면 모를까, 모두가 그런 상황에 놓여있다는 건 분명 석연치 않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다 어떻게 알아내고 조사하신 거예요?”
“아는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았지.”
“아는 사람?”
“……영웅부 장관.”
“어? 조두진 장관님이랑 서로 아는 사이였어요?”
“과거에 조금.”
한서인과 조두진의 관계를 전해 들은 유지한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봐야 할지…….
“그런데 고모, 저기 저 사람은 물음표가 없는데요.”
“실종되지 않았으니까.”
“오! 그럼 한번 만나볼 수 없나?”
“그건 어려워.”
“왜요?”
“지금 병원에서 연명 치료를 받는 사람이야. 자가 호흡조차 안 돼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더라.”
짧은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태라는 환자.
그런데 이어지는 한서인의 말에.
“그게 무슨, 증후군이라고 했던가.”
“……마력 변색 증후군?”
“아, 그거! 맞아.”
“허!”
왜 저 이름의 고모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걸까.
유지한은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젠장.’
그 빌어먹을 저주를 풀어내야 할 이유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