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티에서 추방된 영웅이 너무 뛰어남-275화 (275/300)

275화. 인연 (4)

길드 케로즈의 본사.

길드로 출근하는 매니지먼트 부서의 총괄 팀장 이현재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독 가벼웠다.

즐겨듣는 음악에 맞춰 흥겨운 콧소리를 내는 건 덤이었다.

“흐흐흥.”

날아갈 것만 같은 발걸음으로 건물의 자동문을 통과하여 본인의 사무실에 도달.

항상 앉던 업무용 의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꺼냈다.

타타타타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마저 경쾌하기 짝이 없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부하 직원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다만 그들은 잔뜩 여유가 묻어나는 얼굴의 이현재와는 달리 바짝 긴장하고 굳어있었다.

“저기……. 팀장님?”

“응?”

“길드를 떠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럼, 사실이지! 내가 설마 너희에게 거짓말을 하겠냐?”

본인의 입으로 퇴사를 거론하는 이현재.

이미아와의 만남 이후 유지한, 김시후와도 통화를 나누며 마음을 굳힌 그였다.

그가 케로즈에서 떠난다는 게 확실시되자 그 밑의 부하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아니, 길드 지분까지 갖고 계신 팀장이 대체 왜…….”

“서, 설마 길드장 님께서 팀장님을 버리시는 건!”

“추측들 삼가해. 내가 자진해서 떠나는 거니까. 갖고 있던 케로즈의 지분은 나가면서 전부 정리하기로 했어.”

“저희는 도저히 팀장님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케로즈가 구멍가게였던 때부터 중견 길드가 되기까지.

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길드를 키워온 이현재.

그렇기에 부하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랜 농사 끝에 김현태 파티라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힌 케로즈이거늘.

그 열매의 혜택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떠난다는 것이었으니까.

“너희, 김현태 파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그거야 저희 영웅들이니까 잘 알고 있죠.”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예요?”

명색이 영웅을 관리하는 부서의 직원인데, 길드의 핵심 영웅들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현재는 이세계 원정을 떠난 이후 차원 전화기를 통해 연락에 성공한 김현태 파티.

케로즈의 직원 중 그들에 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현재는 부하 직원들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희는 걔네를 잘 몰라.”

“네?”

“어디 너희뿐이냐? 나도 똑같아. 영웅 길드에 다니는 팀장이라는 놈이 자기가 직접 관리하는 영웅들을 모른다고.”

“에이, 농담도…….”

“그걸 팀장님이 모르시면 대체 누가 압니까?”

이현재의 말을 농담으로 취급하는 부하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농담을 건넨 것이 아니었다.

김현태가 이세계로 떠나기 전에도, 이현재는 케로즈의 핵심 영웅인 그와 마음 터놓고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까.

‘지한 씨가 굉장한 유명인이 된 뒤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지.’

김현태 파티의 서포터였던 유지한이 파티와 길드에서 쫓겨나고.

그가 새로운 둥지에 정착하여 많은 활약을 펼친 이후.

영웅 김현태는 점점 더 매니지먼트 부서와 거리를 뒀다.

——현재 씨가 유지한을 도와줬다면서요?

——이미아를 꿀잼에 꽂아준 것도 현재 씨예요?

특히 이현재가 종종 꿀잼을 뒤에서 도와줬다는 내용을 김현태가 알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마치 자신의 적을 경계하는 눈으로 이현재를 바라보던 김현태.

그때부터 이현재는 김현태와의 직접적인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파티원인 탱커 황준호와 마법사 임시연을 통해서나 이야기를 전해 들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매니지먼트야?’

길드의 핵심 영웅이 관리받기를 거부하는 초유의 상황.

그런데도 길드장 박중섭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김현태를 거드는 입장이었다.

——업무량이 줄어서 좋겠네. 앞으로는 야근도 하지 마. 부하들에게 모범이 되라고.

오히려 업무량이 줄었다고 축하를 건네는 박중섭의 태도는 절대로 이현재가 바라던 길드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케로즈가 규모를 크게 키운 지금보다 되레 다른 길드에 이리저리 치이던 시절에 훨씬 더 보람차고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고 여겼다.

“내 뒤에 누가 팀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보나 마나 고생깨나 할 거다.”

“아니, 팀장님…….”

“업무 인수인계 문서들은 얼추 정리 끝났으니까 보내주는 대로 확인해봐.”

좀처럼 바꿀 수가 없는 이현재의 결정.

끝내 그를 따르던 부하 직원들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 위에 다녀올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본사의 사장실로 올라간 이현재가 닫혀있는 문을 두드렸다.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서자 언제나처럼 중역 의자에 앉아있는 길드장 박중섭이 보였다.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가 이현재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

“너 진심이냐?”

탁!

박중섭이 소리 나게 노트북을 덮었다.

업무 시간에는 항상 자기 업무에만 집중하는 박중섭치고 상당히 드문 행동이었다.

그만큼 길드의 창립 멤버 이현재의 퇴사가 그를 감정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길드 발전에 그렇게 매진했던 놈이, 케로즈를 버리고 떠나겠다고?”

“네. 떠나겠습니까.”

“네가 어떻게 감히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꽈악!

박중섭은 주먹을 강하게 말아쥐며 화를 냈다.

피가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한때는 형제 같은 사이라고 여겼던 두 사람.

케로즈의 운영 방식을 두고 여러 이견이 발생하며 서로의 관계가 조금씩 흔들리긴 했지만.

지금처럼 커진 길드에서 완전히 갈라선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디 한번 들어보기나 하자. 여길 떠나서 대체 어디로 갈 건데?”

“길드장님께서도 잘 아시는 곳으로요.”

“잘 아는 곳?”

“꿀잼. 유지한 씨가 있는 곳으로 갈 겁니다.”

“……!”

유지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박중섭이 이를 악물었다.

카를렘에서 복귀하는 것에 성공하여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영웅.

동행했던 1급 영웅들이 극찬을 마다하지 않는 남자.

이현재와 유지한의 친분을 떠올리며 설마 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케로즈를 버리고 간다는 곳이, 고작 그딴 곳이라고?”

하지만 유지한을 저평가하고 길드에서 내쫓아버렸던 박중섭으로서는.

그의 주가가 치솟는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박중섭의 머릿속에서 유지한은 여전히 어설픈 영웅 중에 하나였으니까.

반면 지금의 그를 잘 알고 있는 이현재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꿀잼은 케로즈를 뛰어넘는 길드로 성장할 겁니다.”

“너 아주 재밌는 농담을 하는구나.”

“아뇨? 이건 진심입니다.”

“……!”

“제가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울 거니까요.”

박중섭의 요청으로 케로즈의 경영에 일부 관여하며 습득한 노하우.

지금까지 영웅 시장에서 쌓아온 크고 작은 인맥들.

길드를 거대한 기계장치라고 본다면, 지금의 이현재는 빠지면 안 되는 핵심 부품 중 하나였다.

길드장인 박중섭도 그가 길드에서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배신자 녀석!”

“거 참, 그건 말씀이 조금 지나치시군요.”

“길드의 지분은…….”

“아시다시피 예전부터 저한테 많이 달라붙던 투자자들이 있는데 말이죠.”

케로즈 설립 당시의 맺은 계약으로 길드가 궤도에 오른 지금 이현재는 얼마든지 외부인에게 주식을 양도할 수 있는 입장.

소중한 길드의 지분이 거론되자 박중섭은 이현재를 찌릿 노려보았다.

“원하시면 길드장님께서 전부 가져가시죠. 외부에서 부른 금액보다는 더 저렴하게 드리겠습니다.”

케로즈에 마음이 떠난 이현재는 박중섭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미 새로운 둥지가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

영국의 엔젤스 가든 길드에서 유지한에게 직접 대화를 요청해온 것은 윤도하의 연락 이후 며칠 뒤의 일이었다.

유지한은 휴식 중인 민유리를 제외한 파티원들을 이끌고 주사위의 회의실에서 그들과의 화상 통화에 나섰다.

—엔젤스 가든의 길드장, 클라크 힐입니다.

“꿀잼의 유지한입니다. 번역기 잘 동작하시나요?”

—네. 문제없습니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번역기를 착용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회의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차마 다 외우기도 힘든 외국인들의 이름을 들으며 유지한은 생각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던가?’

상대는 영국의 거대길드다.

한국의 레드홀이나 주사위와 비교하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길드.

길드의 유명세만 놓고 보자면 엔젤스 가든을 따라잡을 한국의 길드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국어로 먼저 인사를 건네오거나 동양의 예절에 맞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등.

시작부터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급하다는 거겠지.’

시안 피어스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건 엔젤스 가든에게 커다란 불안으로 다가왔을 터.

마지막 관계자의 소개가 끝나자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저희를 먼저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한국에서 직접 찾아뵐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목적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묻는 질문.

상대측의 의도를 재확인하는 절차였다.

옆 사람과 시선을 교환한 길드장 클라크 힐은 말했다.

—영웅부와 엔젤스 가든의 영웅인 시안 피어스가 서로 연락이 닿지 않는 걸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는 이세계로 떠나기 전에 대화도 나눴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죠.”

—저희는 시안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분의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유지한은 고민하는 척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클라크의 얼굴을 살폈다.

거대길드의 길드장답게 신뢰감이 느껴지는 깔끔한 인상.

허나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유지한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유지한은 김시후와 눈빛을 교환한 뒤에 말했다.

“생각나는 방법이 몇 개 있습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희망적인 대답에 엔젤스 가든 측 사람들의 얼굴이 한순간이나마 밝아졌다.

—어떤 방법이라도 좋으니까 부디…….

“단, 조건이 있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시안의 행방을 찾을 수만 있다면 큰 지출이라도 감당할 생각인 엔젤스 가든이었다.

하지만 유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엔젤스 가든의 보물고에는 가치가 높은 보물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보물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중에 단 2개만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그러면 적극적으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엔젤스 가든의 보물고를 개방해달라는 유지한.

그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길드장 클라크는 화상 통화의 마이크를 끄고 길드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혹시 원하시는 보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리고 이내 엔젤스 가든측에서부터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자.

유지한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첫째로 체력 회복에 효과가 매우 탁월한 영약을 원합니다.”

—체력 회복, 말씀이십니까?

“영약의 복용자를 몇 년간 깨어나지 못해서 체력이 크게 떨어진 식물인간으로 가정하고, 복용자에게 그 어떠한 부작용도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엔젤스 가든은 국가의 허락을 받고 커다란 정원에서 소를 방목하듯 몬스터를 기르며 영약 생산과 제조를 겸하는 길드.

복잡한 조건을 걸더라도 쓸만한 영약을 구해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이번에 저주를 풀어내지 못한 민유리의 동생에게 지급하기에는 매우 적합할 것이었다.

—그건 보물고가 아니더라도 저희가 시간을 들여서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뭐죠?

“엔젤스 가든의 보물고에 있는 특별한 종이를 주십시오.”

—네? 종이라뇨?

“아무리 예리한 칼로도 찢기지 않고, 불의 정령과 시안 피어스의 고유 스킬에도 절대로 타지 않는 그 종이 말입니다.”

—……그 정보는 윤도하 씨가 알려주신 건가요?

“정보의 출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유지한의 2번째 요청에 클라크가 침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엔젤스 가든이 보관 중인 그 특별한 종이는.

시안이 절대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처분하거나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했던 보물이었으니까.

——언젠가 반드시 저걸 태워버리겠어!

시안의 도전의식을 끓어 올리게 하는 종이.

길드장의 권한으로도 그 종이 같이 보물고에 저장된 몇 가지 보물은 시안의 허락을 받지 않고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 종이는 별다른 사용 가치가 없는 물건.

고작 그런 것으로 시안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다면…….

썩 괜찮은 거래라고 말할 수 있겠지.

—드리겠습니다.

결국, 2가지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주겠다는 엔젤스 가든.

‘그렇게 나오셔야지.’

유지한은 책상 밑에서 보이지 않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