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인연 (2)
꿀잼의 공방에서 유지한과 만난 남호열이 가장 먼저 궁금해한 것은 바로 그의 검인 큐디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드리미움으로 제작된 무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제작해낸 물건을 검집에서 꺼내며.
남호열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카를렘에서 펑펑 놀고 오신 건 아니죠?”
“설마요.”
“히야! 그런데도 아주 미세한 흠집 하나 없다니……!”
카를렘에서 유지한과 맞섰던 적들의 수준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드리미움에는 아무런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무기가 완성됐을 당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드리미움 가루가 일부 포함된 다른 장비들도 거친 싸움을 겪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했다.
“제가 그때 어떻게 이런 검을 제작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그건 조금 큰 일인데요.”
“네?”
쿵!
남호열이 어벙한 표정을 짓기가 무섭게.
문밖에 있던 이미아가 커다란 보따리를 땅에 내려놓으며 등장했다.
이윽고 보따리의 포장이 풀리자 그 안에서 쉽게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물건들이 여럿 등장했다.
“응? 저게 다 뭡니까?”
“카를렘에 존재하는 몬스터에게서 긁어온 재료들입니다.”
“……!”
“저 하얀 덩어리는 떠나기 전에 마주쳤던 거대한 문어의 살점이에요. 마력이 주입되는 순간 엄청난 재생 능력을 보여주더군요. 그리고 그 옆에는 카븜이라는 곳에서 선물 받은 물건인데…….”
유지한은 카를렘에서 챙겨온 물건들을 손으로 하나하나 가리켜가며 설명했다.
본래 지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강력한 몬스터의 사체.
마즈의 지배자인 크루바와 카븜의 왕이 직접 건네준 희귀한 소재들!
카를렘 내에서도 쉽게 얻지 못하는 고급품만 모여있었기에.
평소 장비 소재에 관심이 많은 남호열로서는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살짝 만져보기만 해도 아주 대단한 물건들이라는 게 느껴지는군요……!”
“카를렘에 재방문하더라도 구하지 못할 물건들이 많습니다.”
꿀꺽!
남호열은 입에 고인 침을 집어삼켰다.
현시점에서 오직 꿀잼 길드만이 갖고 있는 신비의 소재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로서의 욕심이 자꾸만 남호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저것들을 망치로 두드리고, 가위로 찢고, 바늘로 연결해서 새로운 장비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어, 엄청 비싸겠네요! 아니,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나 있을지…….”
굳이 저것들을 경매에 올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난 가격을 받을 수 물건이라는 걸!
뛰어난 효과와 희귀성까지 보유한 소재들은 부르는 게 값이나 다름없었다.
‘차마 달라고는 못 하겠어.’
이세계 진출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는 지금.
저것들은 엄청난 프리미엄 가격을 덧붙이더라도 팔려나가겠지.
그렇기에 남호열은 자신에게 저것들을 넘겨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경매만 매끄럽게 진행한다면 꿀잼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유지한이 말했다.
“저것들 전부 다 호열 씨 겁니다.”
“네? 뭐요?”
“멋진 장비 기대하고 있을게요.”
“……정말로요?”
“그럼 거짓말이겠습니까?”
남호열이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같은 부피의 금덩이보다 비싼 것들을 팔지 않고 사용하겠다니.
“하지만 저걸 팔면 한국 길드의 자본 순위가 요동칠 정도로 굉장한 돈이 들어올 수도…….”
“우리 그렇게 궁핍한 길드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 들어올 돈도 많구요.”
“돈은 저희가 다 벌어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팍팍 쓰세요!”
“키아……!!”
유지한과 김시후의 대답에 남호열은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금전적인 문제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제작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
자신이 그만큼 대단한 길드에 들어왔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한.”
“응?”
“나 부탁이 있는데.”
“어떤?”
“문어빵이 먹고 싶어.”
“문어빵? 타코야끼?”
“이 문어의 살점으로.”
이미아는 거대 문어의 살점을 요리해서 먹길 원했다.
평소에도 먹는 것을 좋아했으나 카를렘에서 미식(美食)에 새로운 눈을 뜬 이후.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그녀였다.
“호열 씨. 저거 조금 떼어가도 괜찮죠?”
“아휴, 그걸 저한테 허락을 받으실 필요는…….”
“괜찮은 요리사를 구해봐야겠네.”
“어? 전에 사임 씨가 불러주셨던 분 있잖아요!”
돌연변이 괴아리, 몬치킨을 요리했었던 요리사 백종언.
일반 식당에서 몬스터 레스토랑으로의 이직을 꿈꿨던 남자.
김시후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자 유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 간이 조금 달긴 했지만, 요리 솜씨가 아주 괜찮았지. 사임 씨한테 연결해달라고 하자.”
“이참에 길드에 요리사도 고용할까요? 앞으로 사람도 늘어날 텐데.”
“음, 아주 좋은 생각이야.”
요리사를 고용하자는 김시후의 말에 드물게도 이미아가 반응했다.
그만큼 긍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함께 오신다던 호열 씨 아내분은 어디 계세요?”
“이미 근처 카페에 와 있습니다. 부르면 이쪽으로 바로 올 거예요.”
“바로 부르시죠.”
“정말이지……. 뱀파이어라고 하길래 깜짝 놀랐어요!”
남호열이 기혼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렇게 임신한 아내가 이종족이라는 건.
유지한이나 김시후나 모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아내 이야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대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종족에 관한 대중의 인식이 나쁜 상황.
뱀파이어 아내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남호열의 공방에 어떤 소문이 퍼질지 뻔했다.
월세를 걱정할 정도로 파리만 날리던 과거 그의 공방에 그런 소문까지 퍼진다면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기에.
그동안 아내의 정체에 대해서 꼭꼭 숨겨온 것이었다.
“어, 여보! 지금 오면 될 것 같아.”
남호열과 아내의 통화가 끝나고 약 3분 후.
닫혀있던 공방의 문이 열리며 장신의 여성이 등장했다.
“드, 들어가도 돼요?”
“걱정하지 말고 오세요.”
유지한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여성을 주시했다.
검정색 가발로 적발을 감추고, 갈색 서클렌즈로 적안을 감추고.
하얀 마스크로 뱀파이어 특유의 송곳니까지 모두 가린 여성.
“성공하셨네요, 호열 씨.”
“하하…….”
하지만 하얀 피부와 뛰어난 미모는 마스크를 그대로 뚫고 나오고 있었다.
남호열의 아내는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그의 옆에 멈춰섰다.
“처, 처, 처, 처음 뵙겠습니다. 시리오딘입니다.”
“유지한입니다. 이쪽은 김시후고, 저쪽은 이미아…….”
“저, 전부 다 알고 있어요! 우리 남편이랑 일하시는 분들은!”
많이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뱀파이어 시리오딘이 눈을 반짝였다.
비록 첫 만남이었지만, 남호열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그녀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거동이 많이 불편하실 텐데.”
“아뇨아뇨아뇨! 괜찮아요.”
임신 6개월 차.
활동이 편한 옷을 입은 시리오딘의 배는 살짝 불러 있었다.
“뱀파이어의 아기는 인간과 조금 다르다고 들었어요.”
“아……. 피가 정말 많이 필요해요.”
체내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피를 24시간 내내 조금씩 흡수하는 아기.
뱀파이어 산모들은 잦은 빈혈 증상은 기본에 생명의 위험에 처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 때문에 임신한 뱀파이어에게는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인간의 피를 제공하도록 국제 메뉴얼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여, 영웅부에서 도와주신 덕분에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영웅부가 그런 일은 잘 해서 다행이네.”
“그래서 저도 뱀파이어의 출산 과정을 전부 기록하며 연구를 돕고 있고요.”
“카지미르라는 이름도 아세요?”
“네! 같은 세계에서 온 사이예요. 아까 전화해서도 여러분에 관해 물어봤어요.”
영웅부에 소속되어 한국 뱀파이어들의 관리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카지미르였다.
단지 서로 개인사를 공유하지 않았기에 유지한과 얽힌 관계를 몰랐을 뿐.
그때 김시후가 시리오딘에게 말했다.
“뱀파이어와 인간과의 혼혈은 해외에 4명 정도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인간의 피를 원하는 갈망은 줄어들고 적발, 적안, 송곳니 등 뱀파이어의 모든 특성은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하더군요.”
“네. 그래서 조금 걱정이…….”
시리오딘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세계에서 달아나 도착한 한국에서 여러 종족 차별을 경험했었던 그녀였다.
그 과정에서 남호열과 같은 친절하고 따뜻한 인간을 만나기도 했지만.
숱한 협박을 당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은 순간도 많았다.
“뭐라고요? 협박?”
“피로 적은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어떻게 알아냈는지 임신했다는 내용까지 담아서…….”
“와, 씨 미친놈이네.”
“와이프가 최근에 집에서만 생활하는 것도 그때의 일 때문이에요.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안 되니까.”
“다음에 그런 일 생기면 바로 저한테 말해주세요!”
임신한 뒤에도 협박을 당했다는 말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김시후.
복수를 약속해준 뒤에도 그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그는 시리오딘의 불룩한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리오딘 씨! 제가 여기서 약속 하나 할게요.”
“야, 약속이요?”
“언젠가 저 아이가 자라서 사회에 나갈 즈음에는, 아이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놓을 거라고……!”
콱!
김시후는 자신의 뾰족한 왼쪽 귀를 붙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얼마 전, 다른 차원에서 심하게 차별받던 이종족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그였다.
비록 지구가 카를렘보다 훨씬 방대하고 복잡한 사회를 이뤄낸 곳이라지만.
‘적어도 내 손이 닿는 곳만큼은……!’
모든 걸 바꿔놓겠다고, 김시후는 다짐했다.
*****
세로로 기다란 타원형의 테이블이 존재하는 공간.
뻥 뚫려있는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그 공간을 밝게 비추는 가운데.
붉은 십자와 푸른색이 가미된 영국의 국기, 유니언 잭(Union Jack) 배지와 하얀 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배지를 가슴에 매단 이들이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톡, 톡, 톡, 톡.
머리가 하얗게 물든 한 남성은 검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반복해서 두드렸다.
엄숙함이 요구될법한 자리에서 나오기에는 다소 산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와 비슷하거나, 혹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의 연락은?”
“……없습니다.”
쿵!
결국, 감정의 동요를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폭발했다.
“대체 시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들은 영국의 거대 길드인 엔젤스 가든의 간부들.
한국에서 다른 차원인 그루디아로 향한 영웅 시안 피어스를 보좌하는 이들이었다.
명목상 엔젤스 가든의 길드장을 맡고 있는 남자, 클라크 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길드 창설 이래 최악의 사태다.”
자신 있게 출발했던 시안 피어스와 엔젤스 가든의 부길드장이자 그의 약혼자인 페니 로스까지.
그루디아와의 연락이 닿지 않는 지금.
엔젤스 가든은 최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럴 거면 두 사람을 이세계로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설마 시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헛소리! 감히 누가 시안을 해칠 수 있단 말이야?”
“상상이 너무 지나치군!”
여러 추측이 난무하고, 서로 간에 날 선 언성이 오갔다.
애초에 지구로 돌아올 방법이 없었으니 시안을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대체 그놈들은 어떻게 돌아온 거야?!”
“카를렘이 그루디아보다 훨씬 더 쉬운 세계였을 거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보다는 험난한 과정이…….”
이미 한국으로 돌아와서 보란 듯이 활동하는 카를렘 원정대.
원정대원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이세계에서 얻어낸 성과들을 언론에 자랑할 때마다 엔젤스 가든은 초조함만 늘어갈 뿐이었다.
“다들 진정하고 내 얘기부터 들어라.”
“……?”
“내가 2시간 전, 한국 영웅부의 직원으로부터 재밌는 정보를 들었어. 그가 말하길 카를렘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던 건, 오직 단 1명의 영웅 덕분이라더군.”
“1명? 당연히 와타나베 요스케겠지.”
“아니야.”
“뭐라고?”
“그럼 대체 누구야!”
엔젤스 가든의 간부진 모두가 말을 꺼낸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에 남자는 이세계 진출에 참여한 영웅의 명단을 펼치며 말했다.
“바로 이 남자다.”
[Honey Jam - Yoo Jihan]
[꿀잼 - 유지한]
그가 검지로 가리킨 원정대원 명단에는.
유지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