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왜 (2)
예상치 못했던 발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민유리.
그녀는 적잖게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요?!”
“정확히는 오늘 밤 정도면 될 겁니다.”
“그렇게 빨리…….”
“일 처리가 늦어질 것 같아서 미리 요청해뒀어요.”
데서가 카를렘에서 일으킨 범죄와 그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는 여러 과정들.
원칙대로라면 그것들이 모두 해결된 뒤에나 영웅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테지만.
유지한은 양지철이 동행하는 등 몇 가지 조건을 걸고서 미리 그를 민유리의 동생이 입원한 병원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어, 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부모님께도 연락을 해둬야 하는데!”
“안전을 위해 일반인의 동행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그것도 그렇네요.”
데서는 확실히 마력 변색 증후군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아픈 곳 없이 멀쩡한 인간에게 직접 그 저주를 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협력을 약속한 그가 갑자기 폭주하여 일반인에게 저주를 퍼트린다면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축하해요, 유리 씨.”
“네? 아뇨. 아직 축하까지는…….”
이미아가 축하를 건네자 난감하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민유리.
다만 행동과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커다란 기대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에 유지한은 조금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기대에 걸맞은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
카를렘에서 벌어졌던 일은 어디까지나 카를렘의 일이다.
데서가 보유한 능력이 이곳에서도 통용된다는 법은 없었다.
——날 너무 맹신하는군.
알로의 아버지가 치료된 직후 데서에게 더 달라붙던 민유리.
데서 본인조차도 그녀의 큰 기대에 부담을 느끼는 언급을 했었다.
그에 조금은 기대를 낮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걸 보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미소 짓는 민유리를 보고서.
유지한은 차마 그런 우려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
“돌아온 걸 축하한다.”
“그래, 고맙다.”
퉁!
유지한은 자판기에서 뽑아낸 콜라를 카지미르가 앞으로 내민 캔음료에 가볍게 부딪혔다.
뒤이어 그는 카지미르의 음료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취향은 한결같구나.”
“너 또한 민트 초코의 아름다움을 몰라보는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
민트 초코 사이다의 라벨이 붙어있는 알루미늄 캔.
카지미르는 손가락으로 그 캔을 가볍게 튕겼다.
“이걸 마셔보면 알게 된다. 민트 초코가 얼마나 멋진 존재인지…….”
“민트는 좋아도 민트 초코는 싫어.”
“그 두 개가 합쳐져서 비로소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감히 인간의 피를 대체하는 물건이라고 단언하마.”
“나는 너의 취향을 존중하마.”
“뭐, 끝까지 그렇게 무지한 채로 살아도 나쁘지 않겠지.”
호록!
사이다를 들이켜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카지미르.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휴게실의 창문을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카를렘에 떠올랐다던 멸망의 징조는……. 정말로 사라진 건가?”
“사라졌다. 흔적조차 없이, 아주 깔끔하게.”
“혹여나 네가 잘못 본 게 아니고?”
“나 아직 시력 좋아. 날아오는 화살도 보고 피한다고.”
“…….”
카지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지한의 반응 속도나 시력이 평범한 인간의 것을 뛰어넘는다는 걸 알고 있는 그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제시아의 인간들이 즐겨 사용하던 환각까지도 유지한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심지어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멸망의 징조를 미리 확인하기까지 했던 유지한이 그것을 착각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사진이라도 찍었으면 좋았을걸.”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차원의 경계에서는 카메라가 전혀 동작하지 않았고.
차원을 뛰어넘은 순간에는 원정대가 챙겨온 모든 카메라의 렌즈가 영구적인 손상을 입어버렸다.
평범한 카메라로는 다른 차원의 영상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너희가 한 세계의 멸망을 막아낸 것이로군.”
“윤도하 씨를 생각하면 그 반대이기도 해.”
“윤도하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 데서란 놈은 움직였을 거다.”
“그건 그렇지.”
윤도하는 어디까지나 데서의 계획에 휘말렸을 뿐.
카를렘에 영웅들이 없었더라도 데서는 다른 방법으로 계획을 꾸몄을 터.
그게 카를렘의 멸망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멸망의 징조는 없앨 수 있는 것이었나…….”
“적어도 카를렘에서는 그게 가능했어.”
“나와는 많이 다르군.”
피의 저주.
체내의 피가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
유지한이 카를렘에서 멸망을 막아낸 것과 다르게.
카지미르와 다른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그 피의 저주를 도저히 막아내지 못했다.
‘내게도 힘이 있었다면 가능했을까.’
내 세계의 멸망도 카를렘처럼 막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구로 정착한 지금은 그 답을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카지미르였다.
“카지미르 오빠!”
“……?!”
퍽!
그때 뜬금없이 옆으로 달려온 니로치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카지미르에게 로우킥을 날렸다.
그에 무릎이 살짝 꺾일뻔했던 카지미르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갑자기 뭐냐.”
“오빠! 뭐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어?”
“진지한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진지한 고민? 꼴값 떠네! 저기서 다 듣고 있었거든?”
니로치는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목을 가리켰다.
“오빠 생각은 딱 봐도 뻔해. 보나 마나 자책하고 있었겠지.”
“그건…….”
“그딴 거 고민해서 어쩔 건데? 오빠는 지금 한국에 있다는 걸 잊지 마.”
평소 카지미르의 생각을 예측할 정도로 그를 잘 파악하고 있는 니로치였다.
정확한 지적에 할 말이 없어진 카지미르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지한 오빠.”
“전보다 건강해 보이네.”
“어릴 때는 잘 먹고 잘 자면 튼튼해지는 법!”
“어리다고? 하지만 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허, 조용히 해.”
어려 보이는 외견과는 다르게 거의 60에 가까운 나이를 보유한 니로치.
하지만 살벌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유지한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샘플링은 어땠어?”
“훌륭했지.”
어떤 방식으로든 끝내 원하는 해답에 이르는 잔상들.
그 해답에 정말로 도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발전된 샘플링의 능력은 여러 상황에서 유지한에게 핵심적인 도움을 주었다.
“한 번에 많이 사용하니까 머리가 아프긴 하더라.”
“구체적으로 몇 번 정도?”
“횟수는 잘 기억 안 나고……. 눈앞에 보이는 잔상이 20개씩 겹쳐지던데.”
“아잇! 이거 또라이 아니야?!”
퍽!
니로치는 유지한의 정강이를 향해 진심의 분노가 담긴 로우킥을 날렸다.
“꺅!”
하지만 튼튼한 몸으로 인해 오히려 다리가 아픈 쪽은 니로치였다.
그녀는 자신의 정강이를 매만지며 소리쳤다.
“그렇게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 뇌가 터져버린다고!”
“딱 한 번뿐이었어.”
“야! 실프!”
—으응?
날카로운 부름에 몸의 크기를 줄이고 숨어 있던 실프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니로치는 그런 실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 계약자 제대로 관리 안 해?”
—그치만 지한이 말을 안 듣는걸!
“그전에 그럴만한 상황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50년 넘게 살았다던 정령이 그것도 못 하면 어떡해?”
—끄으응……!
“똑똑히 기억해. 지한 오빠가 스킬을 사용하다가 다치면, 그건 전부 네 탓이야.”
—알겠어.
이해했다는 것처럼 몸을 빙그르르 굴려대는 실프.
유지한과 계약 관계에 놓인 실프는 그의 고유 스킬인 샘플링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실프가 그를 막아설 수 있는 것이었다.
“최대한 필요한 상황에서만 사용했으니까 너무 혼내지 마.”
“오빠는 조금 더 조심스러울 필요성이 있어.”
단순히 확률을 계산하던 것에서 많은 발전을 이뤄낸 고유 스킬.
위험성은 크게 줄었고, 효과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해졌다.
허나 니로치는 걱정을 줄이지 못했다.
‘이 남자가 죽는다는 건, 범우주적 손실이야.’
그에게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너희를 만난 김에 상의해보고 싶은 게 있어.”
“어떤 거?”
“내가 카를렘을 떠나기 전 발견했던 이상한 종이가 있는데…….”
유지한은 여행자라는 의문의 존재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며.
카지미르, 니로치와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눴다.
*****
해가 떨어지고 달이 떠오른 밤.
유지한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1개뿐인가.’
카를렘과는 다르게 오직 1개뿐인 달.
크기도 작고, 내리쬐는 달빛도 카를렘보다 훨씬 약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을 올려다보는 유지한에게는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참으로 외롭고도 초라한 달이로군.”
“그래서 불만이냐?”
“……내게는 저 달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
양손에 단단한 마력 수갑을 착용한 데서는 유지한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주위에는 그의 파티원들과 양지철을 포함한 영웅부의 관계자들이 함께였다.
김시후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렇게 많이 몰려가도 괜찮을까요?”
“찍찍! 내가 입구를 지키고 있겠다!”
“넌 어차피 몸뚱이가 커서 못 들어가잖아.”
“무, 문을 부수면 들어갈 수는 있다. 찍…….”
이미아의 지적에 조금 분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칠라.
빠른 걸음으로 걷던 양지철은 휴대폰의 시계를 살폈다.
“병원 측에는 저희의 방문을 알렸습니다. 간호사와 의사 1분도 자리에 참석할 거예요.”
“알겠어요.”
유지한은 곧 민유리의 동생인 민소연이 입원한 대학병원 앞에 도착했다.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들을 발견하고서 조금 긴장된 얼굴을 보였다.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랑 놀아주고 있어 칠라.”
“알겠다! 찍!”
칠라가 병원 앞에서 자신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사이.
나머지 일행은 의사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리고 도착한 1인 병실에 조명이 켜지자.
하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민소연이 보였다.
“약초는요?”
“카븜의 배합법대로 제작한 수액을 투여했어요.”
카를렘에서 몇 차례씩이나 검증된 바 있는 안전한 체력증강제.
그 덕분인지 민소연의 혈색은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병원의 수많은 의사들이 이 자리에 참관을 요청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시작할까요?”
“……네.”
민유리가 작게 대답하자 유지한은 열쇠로 데서의 수갑을 풀었다.
철컹!
수갑이 해제되며 모든 자유를 되찾은 데서.
그는 풀려난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무기를 들고서 자신을 노려보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아주 무서운 눈빛들이군.”
“치료를 시작해.”
“이건 치료가 아니라 저주를 푸는 거다.”
마지막으로 유지한의 목을 바라보던 데서가 몸을 돌려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민유리는 그 옆에서 마력 화살을 시위에 물렸다.
여차하면 바로 데서를 날려버릴 수 있도록.
“시작하마.”
데서가 민소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에 반응하여 비쩍 마른 손목은 곧바로 검게 물들어버렸다.
두근! 두근!
눈을 감고 집중하는 데서를 보며 민유리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소연이가 드디어……!’
코와 입으로 숨을 내뱉을 때마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숨이 흘러나왔다.
몇 년간 누워있었던 동생이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활은 내려놓으시죠.”
그녀의 상태가 불안정함을 느낀 유지한은 활을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데서가 눈을 감고 약 1분쯤 흘렀을까.
그는 살포시 쥐고 있던 손목을 다시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까맣다.’
바랐던 기대와는 다른 결과.
병실의 조명이 비춰주는 민소연의 손목은 여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기에.
유지한은 말없이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이윽고 몸을 돌린 데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왜?”
민유리의 입에서 의문과 탄식이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겨우 몇 초 만에 알로의 아버지를 치료했던 그가.
왜 병상에 누워있는 어린 동생은 깨우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왜?”
기대감이 차갑게 식어 얼음장처럼 싸늘한 얼굴을 한 민유리는.
어느새 다시 들어 올린 활로 데서를 겨눴다.
“대답해! 왜?!”
“저주를 푸는데 필요한 부담을 짊어지기에는 이 여자의 몸과 체력이 너무 약해. 이대로 해주를 계속하다간 부작용이 일어날 거다.”
“하지만 카를렘에서는 분명…….”
“그건 내가 사용한 저주였고, 저주에 걸린 지 얼마 안 된 인간들이었으니까.”
“……!”
“그나마 카븜에서 구해온 약초가 아니었다면 네 동생은 어림잡아 3달 내로 죽었을 테지. 운도 좋군.”
끼이이익!
아주 세게 잡아당긴 민유리의 활시위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처럼 팽팽해졌다.
화살에 집중된 거대한 마력은 데서뿐만이 아니라 이 병실을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데서는 정면에서 그걸 보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네 동생이 평생 걷지도, 말하지도, 보고 듣지 못하게 되더라도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저주를 풀어주마.”
“닥쳐——!!”
“멈춰요!”
“유리 누나! 그만두세요!”
파랗게 활활 타오르는 듯한 화살의 마력이 주위로 번져갔다.
피부를 스치는 살기에 화들짝 놀란 양지철과 의료진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주변의 만류에도 민유리가 활을 놓지 않자, 유지한은 그녀의 활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엇……!”
“화살 거두세요. 지금 당장.”
살벌한 명령이 떨어진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꺼트리는 민유리.
그대로 활을 떨어뜨린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이어 유지한이 외쳤다.
“데서! 치료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치료가 아니라 해주다.”
“토 달지 말고.”
“쉽지는 않을 거야.”
“불가능이 아니라면 됐어.”
유지한은 이를 까득 깨물었다.
“내가 어떻게든 가능하게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