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왜
저주의 말을 퍼붓던 여인이 존재감이 사라지고.
갑자기 붉어졌던 하늘은 그 색을 잃어갔다.
그와 동시에 유지한의 몸을 땅으로 끌어 내리던 힘도 점점 약해져 갔다.
“크으…….”
유지한은 얕은 신음을 토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몽롱하던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
이내 그의 시야에는 함께 차원의 경계로 이동했던 일행의 모습이 담겼다.
“바, 방금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찍!”
민유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팔뚝을 쓸어내렸다.
칠라는 차원의 경계에 들어서 전까지의 장난스럽던 기색은 사라지고, 그녀의 곁에서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운 채 방패를 움켜쥐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태도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느꼈어요?”
“저도 느꼈습니다.”
“저도요!”
“정말이지 굉장한 것이 지나간 듯한…….”
“전 잠깐이나마 죽는 줄 알았어요!”
“후아아……!”
차원의 경계에서 지구로 넘어오는 그 짧은 사이.
유지한이 체험한 것과 비슷한 감정의 폭풍이 그들 전체를 휩쓴 탓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무릎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 이마와 등 부근에 식은땀이 흥건한 이들도 있었다.
턱 끝까지 숨이 막혔던 누군가는 연이어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쿠궁!
어느새 땅속으로 들어갔었던 윤도하는 다시 지면 위로 빠져나왔다.
이내 그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반경 500m 내에 그 무엇도 위협이 될만한 건 없어. ……대체 뭐지?”
“느하하하.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군…….”
와타나베는 그의 말을 들으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입으로는 털털한 웃음을 뱉어내되, 바짝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였다.
카를렘에서도 내내 여유를 잃지 않았던 이들이 커다란 경계심을 갖게 할 정도의 기척.
그런데 주변에는 작은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으니, 혼란이 커질 뿐이었다.
콱!
유지한은 김시후가 아래로 뻗은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김시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형. 괜찮으세요?”
“방금 그거, 뭔지 알겠어?”
“아뇨.”
카를렘으로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모두가 감지할 수 있었던 여인의 존재감.
유지한의 귀에서는 조금 전 그녀가 한국어로 또박또박 뱉어낸 저주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분명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인이 말을 건넨 사람은 분명 자신이라고, 유지한은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는 그러한 여성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리라.
‘……모르겠군.’
유지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상한 여인이 건넨 말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일단은 잘 도착한 건가.’
그가 발로 밟고 있는 땅은 원정대가 지구로 돌아올 때 사용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장소였다.
차원의 경계에서 지구로 돌아오는데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좌표가 새겨진 곳.
한번 방문했었던 장소답게 내부 구조가 매우 익숙했다.
“……어?”
그때 확인차 품속에 손을 집어넣은 유지한은 멈칫했다.
분명 품에 챙겼던 여행자의 종이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라졌다?’
주머니 안쪽이 찢어졌거나 실수로 떨어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뿐.
그에 유지한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애초에 가져올 수 없는 물건이었구나.’
여행자 J라는 인물이 다른 여행자를 위해 남겨두었다는 그 종이가.
저주받은 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타다다다…….
그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모인 영웅들의 긴장된 시선이 모두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몬스터라도 다가온다면 곧바로 넝마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허억, 허억…….”
하지만 이내 자리에 도착한 건, 숨을 헐떡거리는 영웅부의 양지철이었다.
긴장감을 풀지 않는 영웅들을 향해 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어서, 어서 오십시오!!”
1급 영웅들이 날려 보내진 총 10개의 이세계.
그곳으로 향한 10개의 원정대 중.
첫 번째로 복귀하는 데 성공한 이들을 격하게 환영하는 양지철이었다.
*****
카를렘으로부터 한국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한 원정대원들은 곧장 영웅부에 위치한 의료센터로 향했다.
현지에서 찾아온 이종족들의 언급 외에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미지의 세계.
그곳에서 새로운 종류의 병균 따위를 가져온 건 아닌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혹여라도 치료제가 없는 전염병 따위를 몰고 오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으니까.
치이이익!
소독 성분이 포함된 증기가 유지한의 전신을 뒤덮고.
여러 힐러들이 준비한 치유와 정화의 마력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에취!”
“다, 답답하다! 찍!”
젖은 생쥐 꼴이 된 칠라와 함께 검사를 마친 유지한은 하얀 가운을 두르고 대기실로 이동했다.
그보다 검사를 마친 이들은 소파에 앉아 늘어지게 쉬고 있었다.
“캬! 역시 지구의 소파가 최고다!”
“쿨쿨…….”
지구와 비교해 스프링이나 쿠션 따위의 개발이 더뎠던 카를렘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푹신함!
앉아서 곯아떨어진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한 씨! 여기요!”
“지철 씨?”
일행을 처음 맞이했던 양지철은 유지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복귀한 영웅을 대상으로 약 2시간 넘게 검사가 진행되는 걸, 유지한을 위해 계속 기다리고 있던 그였다.
의료센터 내에 마련된 독방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지철 씨가 신경 써주신 덕분이죠.”
“아이고, 제가 뭘 했다고…….”
자기는 전혀 한 게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양지철.
서로 짧게 덕담을 건넨 두 사람의 얼굴이 이내 진지해졌다.
“전사자들의 유품을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카를렘에서 인형사 데서에 의해 목숨을 잃은 영웅들.
유지한이 지구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시신과 유품을 양지철에게 전달해준 것이었다.
“전사자의 유족들도 한국에 도착하셨습니다. 장례는 내일 치러질 예정이에요.”
“데서는요?”
“그 데서라는 마법사의 관리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러셔도 상관은 없는데……. 당장이라도 그놈을 데리고 갈 곳이 있습니다.”
“유리 씨의 동생분 말씀이신가요?”
“예.”
데서는 현시점에서 마력 변색 증후군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절대로 죽이시면 안 돼요. 절대로……!
민유리가 그를 아주 거칠게 끌고 가려는 이들의 어깨를 붙잡고 날 선 경고를 날린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마력 변색 증후군 외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신변은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하죠.”
지구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불치병들.
단순한 병이 아니라 저주라는 종류의 마법으로 분류되는 것이라면 데서가 거기에 큰 도움이 되리라.
“다른 원정대의 상황은 어떤가요?”
“……마지막으로 알려드린 것과 거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양지철이 책상을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0개의 차원으로 출발한 10개의 원정대.
그중에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복귀까지 성공한 건 카를렘뿐이었기에.
“4개의 차원은 여전히 연락조차 닿지 않았어요.”
심지어 10개 중 절반에 가까운 4개의 차원은 차원 전화기를 통한 연락조차 불가능했다.
당장 그들이 살아있는지, 혹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게 어디 어디랬죠?”
“칼펠, 파야호우, 로브너, 그리고 그루디아.”
“그루디아…….”
김시후의 어머니인 에르나 하스의 고향이자 레드홀의 길드장 백강천이 존재하는 차원.
그곳으로 향한 원정대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소식에 유지한은 생각에 잠겼다.
엔젤스 가든의 시안 피어스도 그 원정대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종이를 한번 보고 싶은데.’
윤도하가 영국에서 구경했다던 의문의 종이.
그것이 죽음의 섬에 존재하던 그것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라면.
그 위에 어떤 메시지가 적혀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난 그걸 읽을 수 있겠지.’
유지한은 거기에 적혀있을 글자를 읽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외에 연락이 닿은 차원에는 지한 씨가 전달해주셨던 방법들을 전달해드렸습니다.”
“문제는 없다던가요?”
“문제라면 마법사가 문제죠.”
양지철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김시후만큼 차원 마법에 능숙한 마법사가 드물다 보니, 다른 차원에서는 지구로 복귀하는 차원 마법을 짜내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아까 관계자들에게 카를렘 원정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스웨덴에서 파티를 보냈던 길드는 지한 씨와의 만남을 요청하더군요.”
“왜요?”
“제발 자기들 좀 도와달랍니다.”
이세계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영웅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유지한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길드들.
어찌나 급한지 대가를 지급할 의사도 있다는 말에 유지한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 될 거 없죠.”
굳이 주겠다는 건 거부하지 않는 신조니까.
*****
다음 날.
영웅부 서울 지부 인근의 장례식장에서 카를렘 원정대 전사자들의 합동 장례식이 치러졌다.
사망자는 모두 해외의 영웅들이었기에 유족들도 전부 외국인으로 가득했다.
“여기는 저희가 맡을게요.”
그들을 죽기 전까지 이끌었던 박재경과 사태의 원인이었던 윤도하는 장례식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외부에서의 모든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유지한은 파티원들과 함께 장례식장에 잠깐 들린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유지한 씨! 잠깐만 인터뷰를…….”
“박재경 씨는 안쪽에 계십니까?!”
“이미아 님! 이번에 사망한 영웅들은…….”
…….
…….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는 영웅들을 수많은 카메라가 감쌌다.
세계 최초로 이세계에 다녀온 인물들을 화면에 담으려는 것이었다.
그때 유지한과 함께 빠져나온 와타나베가 말했다.
“지금은 인터뷰를 할 기분이 아니다만.”
“……!”
“……!”
약간의 짜증을 담아서 뱉어낸 한 마디.
그것으로 장례식장 앞에 모인 기자들이 전부 숨을 헉하고 집어삼켰다.
모두가 입을 다물어 조용해진 자리에서 와타나베 파티는 유지한 파티와 함께 영웅부 서울 지부로 이동했다.
그 앞에는 와타나베 파티를 위한 차량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한국에서 쉬고 가려고 했더니, 서둘러 돌아오라는 분위기다.”
일본의 정치인들과 일본 영웅청의 압박과도 비슷한 요구로.
생각했던 일정보다 더 빠르게 출국하게 된 와타나베였다.
“다음에 일본으로 놀러 오면 극진하게 대접하마.”
“그것참 영광입니다.”
카를렘 원정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예상치도 못한 인연.
이 세상에 대체 몇 명이나 일본 최강자의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카산드라도 너를 만나보고 싶어 하더군.”
“카산드라 님께서요?”
“미래를 점치는 여인과의 만남은, 어쩌면 너희에게도 도움이 될 테지.”
“흐음…….”
유지한은 옆에 서 있던 김시후를 슬쩍 바라봤다.
“어때?”
“아, 저는 무조건 좋죠!”
김시후의 아버지인 김건오 또한 현재 일본에서 바쁘게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카산드라와의 만남과 더불어 일본에 방문할 동기로서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마. 느하하하!”
팡! 팡! 팡!
유지한의 등짝을 기분 좋게 두들긴 것을 끝으로 와타나베는 공항으로 가는 차량에 탑승했다.
한동안 멀어지는 차량을 바라보던 유지한이 말했다.
“유리 씨.”
“네.”
“슬슬 준비하죠.”
“뭘요?”
“동생분이 입원하신 곳으로 가야죠.”
“……!”
그녀가 바랐던 숙원을 해결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