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죽음의 섬 (7)
크게 당황한 유지한이 펼친 종이를 데서에게 들이밀었다.
“데서! 이걸 한번 읽어봐라.”
“그게 뭔데?”
“여기랑 여기, 뭐라고 적혀 있잖아.”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묻고 있다.”
“모르겠어?”
“전혀 모르는 글자다.”
데서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카를렘에 존재하는 섬 깊은 곳에 묻혀있되, 평생을 그 카를렘에서 보냈던 데서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
적어도 이 세계에 거주하던 인간이 적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건 우리 같은 외부인이 만든 물건이다.’
여행자.
지구에서 카를렘으로 넘어온 영웅들처럼 차원이라는 개념에 관해서 알고 있고.
마치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듯한 이들.
‘지구인인가?’
과거 카를렘으로 찾아왔었다던 러시아인과 그 외의 몇몇 지구인들.
그들이 스스로를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수도 있겠지.
다만 언젠가 세계의 각종 외국어를 찾아봤었던 유지한은 알고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자는 그가 알고 있는 외국어와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기가 막힐 노릇이군.’
차원 이동을 통해 카를렘의 공용어를 습득했다는 느낌과는 달랐다.
어릴 때 배운 한국어처럼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으니까.
“왜 그래?”
“……별거 아니야.”
그는 잠깐 앉아서 졸고 있던 이미아의 물음을 얼버무렸다.
도저히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섬 안쪽으로 들어갔던 김시후가 다시 배 근처로 돌아온 건 약 30분 후였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것인지, 유지한의 눈에는 김시후를 비롯한 마법사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듯 보였다.
“이 섬의 중심이라면 차원 마법도 가능할 것 같아요.”
“카븜이나 마즈와는 달라?”
“완전 달라요! 카를렘이 아니라 지구인 줄 알았다니까요.”
카를렘보다는 지구의 땅을 더 닮아있는 섬.
이 일대가 저주로 물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차원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저희가 마법진을 설치할 테니 배에 실린 짐 챙겨서 출발할 준비 좀 해주세요.”
“얼마나 걸리죠?”
“시후 씨가 중심이 되어 설치한다면 약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지한이 형 말대로 전투에서 제가 안 나섰던 게 천만다행이에요!”
각자 도구를 챙긴 마법사들은 미리 봐둔 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한편, 유지한은 다른 영웅들을 도와 배에 실린 짐들을 내리며 정리해갔다.
“지한.”
“예.”
“무슨 고민 있어?”
복잡해진 감정이 얼굴에 잠깐 드러났던 것인지.
함께 짐을 내리던 윤도하가 그의 상태를 물었다.
들고 있던 상자를 잠시 내려놓은 유지한은 말했다.
“제 목에 있는 검은색 점 보이세요?”
“점? 어디?”
“……!”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윤도하의 반응.
유지한은 손으로 황급히 목을 더듬었다.
‘없어졌다?’
목 위로 흐릿하게 떠올랐던 점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어쩐지 다시 복귀한 사람들이 점에 관해 묻질 않더라니!
“잠깐 이것 좀 봐주세요.”
유지한은 수상한 글자가 적힌 여행자의 종이를 윤도하에게 건넸다.
“누가 희한하게 낙서를 해놨냐.”
“낙서요?”
“이 꼬불꼬불한 게 낙서 아니면 뭐겠어?”
당연하게도 윤도하는 거기에 적힌 것들을 해석하지 못했다.
그는 글자를 들여다보는 대신 종이를 좌우로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쉽게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엄청 질기다! 이거 어디서 났어?”
“땅속에서 끌어올렸어요.”
“흠……. 왜 이게 거기 있었을까.”
거대 길드의 대표로서 나름 상당한 지식을 보유한 그도 잘 알지 못하는 물건.
종이를 꼼꼼히 조사하던 윤도하는 유지한에게 다시 그것을 돌려주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그거랑 비슷한 걸 본 적은 있어.”
“어디서요?”
“영국에서.”
영국의 거대 길드인 엔젤스 가든(Angels Garden)에게 초청받아 과거 영국을 방문했던 윤도하.
그때 엔젤스 가든 측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길드에 보관 중인 여러 보물들을 구경시켜주었다.
“그 보물고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봤던 종이가 칼로 찢기지도 않고, 젖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는 종이라더라. 그렇다고 아티팩트로 만들 수도 없어서 계속 보관만 하고 있더랬지.”
“신기한 물건이네요.”
“길드장님!”
짐을 나르던 박재경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낯익은 길드명이 들린 탓이었다.
“엔젤스 가든이라면……. 제가 기억하기로 다른 차원으로 가는 원정에 참여했을 겁니다.”
“누가 왔는데? 설마 그 불덩이?”
“맞습니다. 시안 피어스 님께서 한국으로 오셨어요.”
“웬일이래? 외부 활동은 그렇게 싫어하더니.”
“……!”
시안 피어스.
그 이름을 접한 유지한은 원정대가 꾸려졌을 당시 참여했던 OT를 떠올렸다.
——유지한! 너도 나중에 나랑 싸워보자!
——날 실망시킨다면 죽여버리겠어—!!
강당에서의 식사 도중 고유 스킬을 사용하여 강당 전체의 온도를 뜨겁게 달궜던 인물.
그와 동시에 약혼녀에게 로우킥을 얻어맞고 질질 끌려갔던 남자.
그도 윤도하와 접점이 있던 모양이었다.
“재경 씨. 그 사람이 엔젤스 가든의 길드장인가요?”
“길드의 전체적인 운영을 도맡는 길드장은 따로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시안 피어스님이 길드의 대표 영웅입니다.”
“그렇군요.”
유지한이 몸을 담았던 케로즈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는 엔젤스 가든이었다.
케로즈로 비유하자면 김현태와 같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그 불덩이가 한번 폭주하면 주변이 불바다가 될 텐데, 혹시 억제기도 같이 왔어?”
“네. 함께 오셨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억제기라는 표현은 좀…….”
“억제기는 억제기라고 불러야지!”
“시안 피어스 님께서 들으시면 정말 화내실 텐데요.”
“억제기가 같이 왔다니까 괜찮아. 그 여자가 날 영국으로 초대했던 사람 중 한 명이잖아.”
억제기는 시안 피어스의 약혼자를 가리키는 단어.
성격이 불같은 시안 피어스가 폭주하거든 그를 쉽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 사람의 길드에 이것과 같은 종이가 있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국에 도착하거든 엔젤스 가든에 관해 한번 알아볼 필요성이 있으리라.
*****
“마법진 설치 끝나갑니다!”
“다들 준비해주세요!”
차원 이동 마법진의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마법사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자리를 피했던 이들은 모두 짐을 들고 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칠라 님! 그거 많이 무겁지 않아요?”
“찍찍! 하나도 무겁지 않다!”
등에 가장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건 칠라였다.
커다란 덩칫값을 하는 칠라를 보며 많은 여성 영웅들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저랑 사진 하나만 더 찍어요!”
“저는 동영상으로!”
“후! 이놈의 인기란! 찍!”
찰랑!
손으로 이마의 털을 털어내면서 멋진 척을 하는 칠라.
그동안은 카를렘에서의 활동에만 집중하느라 여유가 없었지만.
본래의 목적을 이뤄낸 지금은 한명씩 칠라에게 달라붙는 분위기였다.
“저러다가 애 성격 나빠지겠어요.”
“요새는 밥 먹을 때 제 음식도 뺏어가더라고요.”
“하아…….”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민유리는 이미아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으로서 칠라가 귀여움을 받는다는 건 좋지만.
말이 트인 이후로 녀석의 성격이 부쩍 거만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화를 들은 실프는 칠라에게 날아가서 말했다.
—칠라! 너보고 성격 나쁘대!
“찍? 무슨 일이냐? 나보다 인기 없는 정령아?”
—뭐라?! 이 들쥐가 말하는 것 좀 보게?
“찍찍! 슈퍼스타는 바쁘니까 저리 가라!”
다가온 실프를 귀찮다는 듯이 밀어내는 칠라.
그러자 끝내 녀석의 행동을 보다 못한 유지한이 나섰다.
“칠라.”
“찍?”
“적당히 하자.”
“찌, 찍찍……. 알겠다, 대장.”
지시가 떨어지자 그 뜻을 이해한 칠라의 둥근 귀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장난기가 넘치게 행동하더라도.
유지한의 지시라면 철석같이 따르는 칠라였다.
‘찍! 대장에게 반기를 드는 건 곧 죽음이다!’
파티의 리더이자 모든 행동의 중심점.
그를 거역하는 것은 파티를 망가뜨리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칠라의 몸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보호 마법 걸어야 하니까 다들 짐은 여기 내려두세요!”
유지한은 짐을 마법진 위로 내려놓으며 여행자의 종이를 따로 챙겼다.
여행자 J라는 인물은 그의 동료들을 위해 종이를 준비해둔 모양이었지만.
그는 조사를 위해 그걸 한국으로 가져갈 셈이었다.
“지한이 형이랑 누나들은 이쪽이요.”
“마법진은 어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나무들을 뽑아내고 윤도하가 평평하게 다듬어낸 넓은 땅바닥.
그 위에 그려진 원 안에서 육망성과 삼각형 따위의 무늬가 반복되고 있었다.
“출발합니다!”
척!
모든 일행과 데서까지 마법진에 올랐다.
지팡이를 위로 치켜든 마법사들은 입으로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우웅!
가장자리로부터 빛으로 물들어가는 마법진.
이윽고 시야가 하얀 빛으로 덮여버리기가 무섭게.
“……성공했나?”
“성공했다!”
카를렘 원정대는 차원의 경계에 도달했다.
“해냈다! 해냈다고!”
“키아아아!!”
“집으로 가즈아아—!”
카븜에서의 연구 결과가 마침내 눈 앞에 펼쳐진 마법사들은 만세 합창을 했다.
“뭐, 뭐냐 여긴?! 방금 대체 무엇을……!”
“음믐믐! 여기 싫어.”
“나도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아무런 출입구조차 없는 공간에서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홱홱 돌려대는 데서.
그리고 이곳으로 납치당했던 윤도하와 무무를 제외하고는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같이 마음이 들뜬 분위기였다.
“자, 자! 다들 좋아하는 건 너무 이릅니다.”
“축배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들죠.”
“차원 이동 스크롤 여기 있습니다!”
스르륵!
미리 준비해온 마법 스크롤들은 주입된 마력에 반응하며 땅으로 스며들었다.
쿠구구구구구!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차원의 경계.
마음이 한껏 들뜬 영웅들의 시야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정면을 노려보던 유지한은.
‘……또야?’
지구에서 카를렘으로 처음 넘어오던 순간처럼 고요한 정적을 마주해야만 했다.
시야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고, 귀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곳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그의 몸과 의식뿐.
——사랑.
——사랑스러운…….
‘들린다.’
정적이 이어지던 가운데 낯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듣고서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던.
한없이 포근하고 그리우면서도, 동시에 소름이 끼쳐 듣기 싫던 목소리.
——사랑스러운 우리 아들.
그녀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말투로 아들을 불렀다.
입술을 일자로 다문 유지한은 가만히 그 부름을 듣고 있었다.
——날 위해서 죽어줄 수 있겠니?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요청을.
“싫습니다.”
유지한은 아주 차갑고, 또 단호한 말투로 거부했다.
‘뭔지 몰라도 싫어.’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타인을 향해 죽어달라고 하다니.
설령 그 대상이 그녀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어머니는 아들에게 죽어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되레 아들을 위해 희생할 뿐이지.
그런데 그가 거부의 대답을 뱉은 직후…….
쿵!!
땅에 두 발을 딛고 멀쩡하게 서 있던 유지한의 몸이 쓰러졌다.
“커헉!”
100배는 강해진 중력에 의해 아래로 당겨지는 듯한 느낌!
손으로 땅을 세게 밀어내도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힘껏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었기에, 유지한은 필사적으로 폐가 짓눌리지 않고 호흡을 유지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끼기기긱!
——끼기기기기기긱!
곧이어 까맣기만 하던 시야가 피처럼 붉게 물들며.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분노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친구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미워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남에게 무시당하고 그 누구의 인정조차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너는 절망하고 절망한 끝에 자신의 손으로 네 생을 마감할 것이야……!
저주라는 마법을 말로써 하나하나 풀어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만큼 여인의 말투에는 무서울 정도로 상대를 증오하는 마음이 실려있었다.
그리고.
“아, 그러시던가……!”
어떻게든 몸을 뒤집는 것에 성공한 유지한은.
시뻘건 하늘을 향해 중지를 펼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