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죽음의 섬 (5)
쿵! 쿵! 쿵! 쿵!
문어가 당장이라도 배를 부수기 위해 난리를 치는 상황.
배 위에서 모두가 녀석을 사냥하기 위해 열중하는 가운데.
옆으로 나란히 선 유지한과 이미아는 방패를 앞세운 칠라를 마주 봤다.
“찍찍! 대장! 밥 동료! 준비됐나?”
“밥 동료는 뭐야?”
“밥 먹을 때의 동료다!”
“뭐가 됐건 시작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칠라의 방향으로 뛰어올랐다.
“찍!!”
[실드 배시]
치이잉!
칠라의 마력이 주입되어 푸르게 빛나는 방패.
바닥에서 점프한 두 사람의 발바닥이 그 방패의 표면에 닿는 순간.
퉁——!
스킬이 만들어낸 반발력으로 유지한과 이미아의 몸이 대각선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당연하게도 배를 가로막은 문어는 그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촤르륵!
8개의 문어 다리 중 바닷속에 숨겨져 다리가 그들을 향해 뻗어졌다.
‘예상대로.’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잡으려고 시도하는 다리.
미리 읽고 있던 공격이 날아오자 유지한에게 붙어있던 실프가 마법을 사용했다.
[에어 슈트]
과거 김시후가 기존의 마법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고유 마법.
공중에서 체공 시간을 크게 늘리는 것과 더불어 몸을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는 마법이었다.
유지한은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든 걸 느끼며.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문어 다리를 피해 몸을 던졌다.
부우웅—!
위협적으로 날아온 문어 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유지한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이미아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여 다리를 피했다.
목표물을 잃은 문어 다리는 바람 소리만을 남긴 채 멀어져갔다.
‘빨판이 무시무시하네.’
잠깐이나마 눈앞에서 마주한 문어 빨판은 냉장고의 문처럼 커다랬다.
몸이 그 빨판에 붙잡히는 순간, 단순히 달라붙는 게 아니라 빨판 안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가자!’
다리를 피하자마자 이미아와 짧게 시선을 교환한 유지한은 문어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에어 슈트]의 효과를 적용받는 그들의 몸은 천천히 문어가 있는 방향으로 떨어져 내렸다.
부글부글!
다리로 그들을 잡지 못한 문어의 주변에서 거품이 끓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유지한은 바닷속에서 마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푸슉!
기습적으로 몸을 들어 올린 문어가 다리 사이에 있는 입에서 위로 물을 내뿜었다.
바닷물 외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는 평범한 물줄기.
허나 엄청난 압력으로 쏘아낸 그것은 화약을 사용한 총알을 뛰어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얍!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실프가 유지한과 이미아의 몸 주변에 바람을 일으켰다.
모두가 탑승한 배를 보호함과 동시에 공중에 뜬 두 사람의 움직임까지 제어하는 것이었다.
푸슉! 푸슉! 푸슉! 푸슉!
바람으로 흔들리는 두 사람의 몸이 문어가 연속으로 내뿜는 물줄기를 요리조리 피해갔다.
이미아는 자신이 아닌 정령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가 어색한 듯 바짝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 위의 떠 있는 구름을 뚫어버리고도 추진력이 남을 정도의 물줄기이기에.
실프가 단 1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공격을 맞고 기절할 수도 있으리라.
—우히히히! 하나도 못 맞췄대요!
하지만 비범한 마법 연산력을 보유한 정령에게 실수 따위는 없었다.
결국, 먼저 포기한 건 입으로 물을 내뿜어대던 문어 쪽이었다.
푸화아아아악——!
몸이 더 빨갛게 달아오른 문어가 여러 개의 다리를 꺼내들었다.
배를 공격하던 다리까지 모두 회수하여 유지한과 이미아를 노리는 것이었다.
“이미아!”
“시작해!”
유지한의 신호를 받은 이미아가 등을 떠미는 실프의 바람을 타고 앞으로 쭉 나아갔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먼저 접근해오는 그녀를 향해 문어의 다리가 집중됐다.
후웅! 후웅! 후우웅—!
공중에서 무섭게 휘둘러지는 8개의 다리들.
모든 다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빨판은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달라붙을 것처럼 꿈틀거렸다.
“흐읏!”
이미아는 날아오는 다리를 최대한 피해서 몸을 뒤틀었다.
다만 공중에 떠 있는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요가를 하는 것처럼 허리를 크게 뒤틀고.
공중에서 몸을 웅크리고, 최대한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몸의 면적을 줄였다.
퍽!
그러다 엄청난 흡착력을 가진 문어의 빨판 하나가 그녀의 등에 닿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붙잡혀버린 이미아는 이를 악물었다.
끼기긱! 끼기기긱!!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형체가 조금씩 일그러지는 갑옷!
흡착력만큼이나 엄청난 힘으로 닿은 물체를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흡!”
이미아는 갑옷과 함께 몸을 집어삼키려는 빨판에 맞서 몸을 꼿꼿하게 폈다.
자꾸만 오그라드는 갑옷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배에 탑승한 일행 중에서도 완력과 몸의 내구도, 단단함만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첨벙!
휘둘러진 다리와 함께 물속에 들어가서도 그녀는 숨을 참으며 버텼다.
콰직!
그리고 끝내 그녀의 몸이 빨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보다 그녀가 입고 있던 갑옷이 먼저 부서져 버렸다.
빨판이 부서진 갑옷과 찢겨나간 옷을 집어삼키는 사이, 이미아는 계속 숨을 참으며 문어의 밑으로 이동했다.
눈으로 열심히 유지한을 좇고 있는 문어는 아래에서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바닷속에 떨어진 뒤에는 아래에서 문어를 노려.
이미아가 빨판에 붙잡혀 물에 빠지는 것까지.
전부 유지한의 설계 안에 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다니…….’
너무 과감하다고 말을 해야 할지.
하지만 그녀에게 문어를 직접 공격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실프는 아직 공중에서 떠다니는 유지한에게 말했다.
—내가 물속에서 숨을 쉬게 해줄 수도 있는데!
“최대한 존재감을 숨겨야 해.”
물에서 살아가는 놈이니만큼 물속에서의 마력 사용에 더 민감할 터.
이미아를 처치했다고 믿고 있는 문어가 그 생각을 바꿀 수 없게 해야 했다.
‘나한테 정신이 팔렸군.’
촤륵! 촤르르륵!
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유지한을 노리는 문어.
녀석에게 포화 공격을 받던 유지한은 슬슬 버티기가 힘들어질 때쯤.
허리춤에서 큐디를 뽑아 들었다.
‘딱 한 번이면 된다!’
솨아아아—!
초록빛 오러가 둘러지고 바람의 정령인 실프까지 큐디에 깃들자.
돌풍을 압축하여 휘감은듯한 검날에서 무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콰앙!
날아오는 문어 다리에 유지한이 일부러 몸을 부딪치면서 검 끝을 깊게 꽂아 넣었다.
“크윽!”
다리와 함께 날아가면서도 유지한은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표면을 얇게 베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매끈한 피부를 뚫어내고 아주 깊숙하게 베어서 문어의 피를 봐야만 했다.
꿀렁!
이윽고 문어 다리를 완전히 뚫고 들어간 큐디는 그 몸속에서 푸른색의 피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든 빨판에 닿지 않고 물속에 빠진 유지한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미아를 발견했다.
이내 그가 목에 푸른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힘과 마력을 담아서 소리쳤다.
“2번째와 3번째 다리, 그리고 가운데 입의 사이!”
큐디가 전해준 거대 문어의 약점이었다.
다리의 숫자는 문어의 정면을 기준으로 시계방향과 동일하게 정해놓은 것.
‘저기구나!’
원하던 정보를 전해 들은 이미아는 주저하지 않고 문어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정확한 약점 앞에 다다른 뒤.
[강타]
민유리가 준 하이퍼 드래곤의 뼈를 손 틈 사이로 빠져나오게 쥐고는.
혼신의 힘을 담아 주먹으로 그곳을 후려쳤다.
쿵——!!
충돌 부위를 중심으로 도넛의 형태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파동!
그 파동은 그대로 바닷물을 타고서 유지한의 몸까지 전해졌다.
‘내가 맞으면 죽겠구만.’
물에 들어와 있음에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착각이 들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다.
드드드드드드!
약점을 얻어맞은 거대 문어는 경련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떨림은 더 커지고 녀석의 몸을 품은 바닷물은 요동쳤다.
“공격!”
배에 탑승한 영웅들은 각종 추가 공격을 감행했다.
약점에 처박힌 드래곤의 뼈가 제 역할을 했는지, 더 이상 문어의 상처가 재생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쿵!
죽은 문어의 몸이 완전히 뒤집힌 상태로 수면 위에 떠 올랐다.
*****
김시후와 민유리가 배 위로 올라오는 유지한과 이미아에게 각각 손을 뻗었다.
옷이 물로 흠뻑 젖어버린 두 사람은 그 손을 잡고 갑판 위에 올라섰다.
“괜찮으세요?”
“저놈 죽었지?”
“죽었어요. 확실히.”
“그럼 괜찮아.”
유지한은 젖은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사냥에 성공한 문어를 바라봤다.
바로 몇 초 전에 죽음을 맞이한 녀석은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카를렘에서 마주친 놈들 중에 가장 무서운 놈이었다.’
저놈이 바다에만 머물지 않고 육지 근처로 다가갔더라면.
이 세계에서 멸망의 징조가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팡! 팡!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와타나베는 손바닥으로 유지한의 등을 때렸다.
“느하하하……! 넌 역시 정상이 아니구나?!”
“그거 칭찬이시죠?”
“칭찬이고 말고!”
유지한이 실패하면 직접 바다로 뛰어들 생각이었던 와타나베였다.
하지만 공격에 성공하여 문어가 죽는 것으로, 그는 자리의 누구보다 기쁘게 웃었다.
‘나를 위협할만한 거인이 또 한국에서 등장했다!’
카를렘에서 유지한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보며 들었던 와타나베의 생각이.
지금에 와서 더욱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박재경은 옆에 있는 윤도하에게 말했다.
“지한 씨는 너무 무모한 걸 좋아해요.”
약간이라도 실수가 나온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유지한의 시도.
윤도하를 되찾기 위해 여수에서부터 그와 지방 원정을 함께 했었던 박재경은.
무모함을 감수하는 유지한의 결정을 옆에서 만류하고, 또 걱정했다.
하지만.
“그걸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내가 어떻게 데서에게 구출됐는지 말해줬잖아?”
“…….”
“쟤는 그만한 실력과 자신감이 있는 거야.”
자잘한 걱정 따위는 평범한 사람, 범인(凡人)에게나 해당하는 것.
이미 그를 자신과 동급의 존재로 인지한 윤도하였다.
박재경과 같은 기준으로 유지한을 바라보기에는 그가 지금껏 보여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무무. 배 수리는 끝났어?”
“음믐! 부서진 거. 고쳤어.”
“슬슬 출발해도 되겠네.”
“그전에 저 문어의 몸뚱이 좀 떼어가죠.”
유지한은 다시 죽음의 섬으로 출발하기 전에 거대 문어의 다리 살과 빨판, 이빨을 일부 잘라서 챙겼다.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을 대장장이 남호열을 위한 선물이었다.
물론, 사용이 끝난 하이퍼 드래곤의 뼈를 회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다른 영웅들은 말했다.
“저희도 챙겨도 되나요?”
“마음대로 하세요. 너무 커서 다 가져갈 수도 없으니까.”
“돈은 얼마든지 낼게요!”
“예? 이건 제가 혼자 잡은 것도 아닌데…….”
거대 문어의 몸을 잘라서 가져가는 대가로 지구에서 돈을 지불하겠다는 사람들!
데서는 괴물 같은 문어에게서 겁도 없이 전리품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군.’
잘라낸 문어를 한가득 실은 배는 곧 죽음의 섬이 기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긴가.”
“오…….”
술집에서 뱃사람들이 종이에 그려준 죽음의 섬과 비슷한 형체로 보이는 섬이 등장했다.
유지한이 종이에 그려진 것과 현실의 섬을 번갈아 보는 비교해보는 사이, 배는 섬 근처에 다다랐다.
그리고 모두가 배에서 내려가려던 찰나.
“다들 잠깐 멈춰라.”
얼굴을 잔뜩 찌푸린 데서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