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죽음의 섬 (4)
유지한은 배에 탑승한 유일한 외부인인 데서를 바라봤다.
팔이 단단하게 묶인 그는 민유리와 박재경의 살벌한 감시 아래.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카를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렘에 미련이라도 남았나?”
“전혀.”
“그런 것 치고는 시선이 끈적한데.”
“단지…….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을 뿐.”
납치한 윤도하를 이용하여 마즈와 카븜, 최종적으로는 왕실마법사였던 그를 내다 버린 레론의 붕괴를 원했던 데서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시작 단계였던 마즈에서부터 망가졌다.
그로 인해 죽음을 각오한 뒤에는 영웅들의 손에 이끌려 카를렘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으니.
묘하게 감상적인 기분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진작에 이런 식으로 카를렘을 떠나는 것도…….’
다른 차원을 가리켜 비유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미개척 대륙.
그곳을 찾아 카를렘을 떠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데서는 생각했다.
그에게 찾아온 윤도하는 물었다.
“죽음의 섬에 관해서는 뭐 아는 거 없어?”
“내가 아는 거라곤 그곳이 본래 이름 없는 섬이라는 것과,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된다는 소문이 돈다는 정도다.”
“거기로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며.”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뱃사람들이 만들어낸 헛소문일 뿐일 수도 있고.”
“카븜의 왕실마법사도 우리에게 가지 말라고 했어.”
“흥! 나도 전에 그놈을 만나본 적이 있지. 근거 없는 미신이나 소문 같은 걸 잘 믿는 놈이었다.”
왕실마법사 시절 만나본 적이 있는 카븜의 마법사가 언급되자 데서는 코웃음을 쳤다.
섬과 관련된 소문을 믿는다는 그를 비웃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데서와 이야기를 나누던 윤도하는 박재경을 바라봤다.
“재경아. 얘는 내가 감시할 테니까 저쪽에서 쉬고 있어.”
“아닙니다. 길드장님.”
박재경을 대신해서 데서를 감시하려던 윤도하는 볼을 긁적였다.
며칠째 그에게 평소보다 매우 딱딱한 말투를 보여주는 박재경이었다.
“아직도 삐졌어?”
“삐졌다뇨? 무슨 말씀이신지?”
“삐졌네, 삐졌어.”
“두부처럼 물렁해진 길드장 님에게는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무, 물렁해? 내가?”
박재경의 대답에 윤도하는 무척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가 주사위라는 길드를 처음 창설하고 눈여겨보던 박재경을 영입한 뒤.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서 그 고생을 하고 계셨을 리 없죠.”
“음므믐! 도하. 물렁해.”
“너까지 그러기냐…….”
박재경의 질타에 이어 무무의 추임새까지 더해지자 윤도하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를 구출하려다가 사망자까지 발생했으니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죽은 이들에게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하는 수밖에.
“길드장 님을 말로 공격하시다니.”
“역시 우리 부길드장 님……!”
감히 윤도하에게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하는 주사위 길드원들은 멀리서 박재경을 응원했다.
한편, 김시후와 민유리는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측으로 5도 정도 돌리는 게 좋겠어.”
“부탁해, 실프.”
—쿠아아!
배의 움직임은 바람을 다루는 실프에게 전담해둔 상황.
미리 활을 꺼내둔 민유리는 눈을 부릅뜨고 바다에서 배로 접근하는 것들이 없는지 살폈다.
바다에서도 배를 공격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들은 덕분이었다.
“찍찍! 평화롭구나!”
하지만 처음에 배를 묶었던 해초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분위기가 계속됐다.
출발 직전만 해도 방패를 들고 대기하던 칠라는 어느새 방패를 내려놓은 채 갑판에 대자로 누워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었다.
통! 통!
이미아는 손바닥으로 칠라의 배를 두드렸다.
카를렘에서 전투적인 식사를 누리면서 부쩍 친해진 그들이었다.
“혼자 누워있네. 건방지게.”
“찍! 자고로 탱커는 듬직하면서도 건방져야 한다!”
“누가 그런 말을 했어?”
“대장이다. 찍!”
칠라는 유지한의 조언을 팔아먹으며 휴식을 누렸다.
허나 그 휴식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노곤노곤해진 칠라의 몸에 졸음이 쏟아지기 직전.
후두두둑!
하늘에서 물방울들이 먼저 쏟아진 덕분이었다.
“퉷! 퉷! 짜다! 찍!”
물세례를 받은 칠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가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맑은 하늘.
짠맛이 느껴지는 물방울은 바다에서 튀어 오른 것이었다.
“밑에 뭐가 있어요!”
거칠게 출렁이는 파도를 따라 위아래로 요동치는 나무배.
마력 화살을 생성한 민유리는 바다를 향해 화살을 쏘아냈다.
팍!
그런데 충분히 바닷속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었던 그녀의 화살은 무언가에 막혀서 수면 바로 아래에서 멈췄다.
이윽고 물속에서 등장한 생명체를 보고, 모두가 숨을 집어삼켰다.
“힉!”
“저게 뭐야?!”
“……!!”
붉은 기가 도는 둥그스름한 머리통.
그 커다란 머리와 연결된 기다란 다리들에는 수없이 많은 빨판이 붙어있었다.
‘문어잖아?’
화살을 막아낸 건 8개의 다리를 가진 문어였다.
문제는 녀석의 크기가 유지한이 탄 배의 5배는 된다는 것!
전설상에 나오는 크라켄이 현실에 등장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녀석을 본 유지한은 저도 모르게 검을 꺼내들었다.
출렁!
“배, 배가 너무 흔들려요!”
“우아아악!”
“이러다 뒤집어지겠어!”
문어가 일으키는 파도 이상으로 나무배가 크게 요동쳤다.
녀석이 기다란 다리를 이용해 배를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가자!
“음믐믐!”
유지한과 윤도하의 명령을 받은 정령들은 즉시 배 밑으로 이동했다.
대처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오늘 저녁은 문어 숙회인가.”
와타나베가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그의 검집에서 일본도가 빠져나오기 무섭게.
[일섬(一閃)]
허공 위에 가로로 선이 그어졌다.
—————————
거리를 무시하고 상대의 몸을 베어내는 검사의 일격.
자로 잰 듯 반듯한 그 궤적을 따라 문어의 매끈한 피부에 기다란 상처가 생겨났다.
‘잘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와타나베가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문어의 몸을 2개로 자르고자 했던 일격이 고작 피부가 갈라진 상처로 끝나자 그는 팍 인상을 썼다.
푸후우우욱!
상처를 입은 문어의 몸 전체가 열이 오른 것처럼 뻘겋게 달아올랐다.
“저거 지금 화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실제로 크게 화가 난 문어는 물속에 잠겨있던 다리들을 하늘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우아악!!”
“떠, 떨어진다!”
“공격! 공격해요!”
“소용없어!”
검으로 베어도, 화살을 쏴도, 마법을 날려도 문어의 피부를 뚫어내지 못했다.
영웅들이 보유한 아티팩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킬들이 쏟아져도 녀석의 몸은 멀쩡했다.
매끈한 피부와 그 피부를 덮은 점액질이 대부분의 공격을 흘려내는 것이었다.
‘재생된다고?!’
심지어 벌어졌던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는 모습에 유지한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재생력인지!
첨벙! 첨벙! 첨벙!
문어가 배를 향해 휘두르는 다리가 수면을 마구 두들겼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파도와 함께 배 위로 대량의 바닷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오, 저놈 진짜 성가시네!
“돛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
유지한이 급하게 실프를 배 위로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배가 진작에 뒤집혔으리라.
강제로 일으킨 바람으로 배를 움직이는 것으로 간신히 문어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상황!
양팔로 돛대를 껴안고 갑판에서 버티던 김시후는 문어를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지한이 형! 그냥 제가……!”
“아니야! 넌 나서면 안 돼!”
유지한은 거대한 문어에 맞서 나무 거인을 소환하려는 김시후를 막아섰다.
차원 마법을 전개하는 것에 있어 그의 역할이 너무 막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다려봐.”
분을 이기지 못한 김시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문어를 노려봤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여 그에게 마력 탈진이라도 일어났다간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하더라도 그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러야 할 수도 있었다.
앞으로 저런 것들을 얼마나 더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김시후의 마력을 시작부터 낭비할 수 없었다.
‘그 섬으로 갔다던 뱃사람들은 모두 저놈에게 당한 건가?’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이 사람들에게 죽음의 섬이라고 불린 이유.
그것은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저 문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를렘에서 가장 무서운 생명체는 카븜의 왕이 아니라 저 문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하필이면 바다 위에서!’
윤도하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배 위에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었다.
땅이 아닌 바다 위에서 제 힘의 3분의 1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그로서는 적절한 역할이었지만.
일행 중 가장 큰 전력인 그가 전투에서 빠졌다는 것이 유지한은 조금 뼈아팠다.
<—저 문어를 죽이는 방법>
샘플링을 사용하자 그에게 하늘로 날아가는 2개의 흐릿한 잔상이 보였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유지한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미친 짓이다.’
수많은 다리를 피해 하늘을 슈퍼맨처럼 날아다니다가 문어의 머리에 아주 운 좋게, 그리고 아주 어렵사리 검을 꽂는 잔상이 하나.
그리고 일부러 문어에게 붙잡혀 바다로 수십 번 내동댕이쳐진 뒤, 영웅들이 탑승한 배가 완전히 뒤집힌 이후 거의 탈진한 상태로 문어에게 검을 휘두르는 잔상이 하나.
그의 고유 스킬이 정답을 알려주되 도저히 실행하기가 어려운 경우였다.
‘카를렘에서의 일은 전부 끝낸 줄 알았더니만……!’
카를렘의 멸망은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최대의 관문은 바로 이곳에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지한 씨!”
“예?”
“이걸 쏠게요!”
“……!”
그때 유지한은 민유리가 꺼내든 물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이퍼 드래곤의 뼈?’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은 그가 선물했던 하이퍼 드래곤의 뼛조각.
그게 시야에 들어온 순간, 유지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가능성이 있다.’
아티팩트로 제작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알려진 하이퍼 드래곤의 뼈.
그 이유는 그 뼈가 마력을 차단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어의 몸이 재생되는 건 마력이 개입된 현상일 테니.
드래곤의 뼈를 사용하는 것은 효과적인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의도는 좋은데 활로 쏘는 건 반대입니다!”
“왜요?!”
“조금 전처럼 화살이 문어 다리에 잡힐 거니까!”
“그럼 뭘 어떻게 하자고요……!”
애태우는 민유리를 두고 유지한은 다리를 휘둘러대는 문어를 노려봤다.
그리고 실프를 통해 배를 조종함과 동시에, 샘플링의 반복 사용이 이어졌다.
<—하이퍼 드래곤의 뼈로 문어를 죽이는 방법>
<—하이퍼 드래곤의 뼈로 문어를 제압하는 방법>
<—하이퍼 드래곤의 뼈로 문어를 기절시키는 방법>
<—하이퍼 드래곤의 뼈로…….
…….
…….
몇 가지 조건이 더해진 샘플링은 유지한에게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잔상을 제공했다.
풀리지 않는 문제의 답지를 미리 베껴보듯이.
그는 눈앞에 주어지는 수많은 가능성을 살피며 동시에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냈다.
‘그딴 것들 말고 실현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내놔!’
과거 그가 니로치와 만나기 전 스킬을 사용하던 방식과 달라진 건.
그에게 확실한 해결책이 제공된다는 것.
그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정답에 이르는 것들이었으나, 유지한은 보다 나은 선택지를 원했다.
지이잉!
시야에 보이는 흐릿한 잔상들이 서로 겹쳐져 갔다.
한낱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과할 정도의 정보량.
“큭!”
수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몰려들자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하지만 유지한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한! 그만둬!
실프는 황급히 그의 행동을 만류했다.
그가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초! 10초만 더 기다려.”
그리고 마지노선으로 정한 10초가 더 흐른 뒤.
흘러나온 코피를 닦아낸 그가 잔뜩 핏발선 눈으로 이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아.”
“……?”
“도와줘.”
“뭔지 모르겠지만, 알겠어.”
김현태 파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지한을 한없이 신뢰하는 이미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