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죽음의 섬 (3)
“트레인! 꼭 연락해라.”
“네, 네! 고맙습니다!”
“나중에 또 괴롭히는 놈들 있으면 말해.”
“음믐믐. 혼내줄게.”
윤도하는 카를렘에서 신세를 졌던 드워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옆에서는 유지한과 크루바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무운을 빌지.”
“마즈를 부탁드립니다.”
첫인상은 그닥이었으나 유일한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썩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는 크루바였다.
유지한은 한동안 주로 크루바의 곁에서 마즈의 혼란을 잠재우는 일에 동참했다.
그 덕분인지 크루바는 그가 떠나는 걸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거든, 다시 마즈로 돌아와도 좋네.”
“그건 생각해 볼게요.”
“마즈도 너희의 고향과 비교해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
설령 다른 지배자들이 살아서 돌아오더라도.
크루바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지지도를 얻게 된 건 바로 유지한 덕분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영원히 마즈에 남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마즈 전체를 넘겨준다고 한들, 이들은 떠날 테지.’
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단념하는 것이었다.
“찍찍! 너희의 음식은 매우 훌륭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건 가문의 보고로 간직하도록! 찍!”
칠라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도장을 찍은 종이를 근래 가장 고생했던 요리사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걸 받아든 요리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이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이었어요.”
“아, 네…….”
그리고 이어지는 이미아의 칭찬에 요리사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매번 단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먹어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그였다.
“출발할까요?”
“도와줄게.”
유지한은 준비를 마친 일행들을 데리고 김시후가 기다리는 카븜으로 출발했다.
땅을 조종하는 윤도하의 도움까지 더해진 덕분인지 마차로 하루 정도를 꼬박하는 이동하는 것으로 문제없이 카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한이 형!”
“……!”
김시후는 왕의 거처가 있는 카븜의 7구역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런데 유지한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는 피골이 상접한 얼굴이었다.
살짝 안쪽으로 패인 그의 볼을 보며 칠라가 소리쳤다.
“찍찍! 마법사가 해골이 됐다!”
“요새 잠을 적게 자서…….”
“주인아! 고기! 우리 마법사에게는 고기가 필요하다! 찍!”
“네가 먹고 싶은 거 말하지 마.”
“찍? 들켰나?”
민유리는 손가락으로 난리를 치는 칠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내 다시 모인 유지한 파티는 카븜의 왕이 기다리고 있다는 궁전으로 들어섰다.
카븜의 왕은 여느 때처럼 커다란 황금 왕좌에서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드디어 왔군.”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유지한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카븜의 왕은 손을 좌우로 휘휘 저었다.
“오늘 같은 날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어.”
“예.”
“준비는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주저 없는 유지한의 대답에 카븜의 왕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카를렘 원정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돕는 조건으로.
그들이 떠나기 전 유지한과 대련을 치르기로 약속한 그였다.
함께 왕의 거처에 들어온 윤도하는 말했다.
“그거 내가 하면 안 되나?”
“너도 굉장한 실력자 같지만……. 내가 원했던 건 유지한이라는 전사다.”
“쩝, 아쉽구만.”
카를렘에서 마주친 이들 중 가장 강한 기운을 보유한 카븜의 왕.
윤도하는 그를 앞에 두고 매우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
“시작하지.”
유지한과 카븜의 왕이 입장한 대련장.
카븜의 왕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들고 있던 커다란 망치로 땅을 내려찍었다.
콰아아아앙—!!
망치질 단 1번으로 유리처럼 산산이 조각나는 땅바닥.
그의 우락부락한 근육이 증명하듯 무식한 괴력이 대련장을 포함한 왕의 궁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여파를 피해 위로 뛰어오른 유지한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다 부숴버려도 되는 겁니까?”
“그러라고 만든 장소니까!”
“화끈하시군요.”
“그렇다! 나는 화끈하다!”
꾸드드득!!
카븜의 왕이 다리와 팔에 마력을 힘껏 불어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단한 그의 근육들은 마력이 더해져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우롸—!!”
후우웅!
그는 들고 있던 망치를 하늘 높이 날렸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릴 정도로 아주 높게 날아간 망치.
유지한이 그에 의문을 가지려던 찰나.
[자이언트 해머]
왕이 사용한 스킬로 망치가 대련장의 하늘을 완전히 덮을 만한 크기로 크게 불어나더니.
그대로 유지한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허억!
거대한 망치가 만들어낸 그늘 아래에서 실프는 기겁했다.
그때 유지한은 망치를 피해 카븜의 왕에게 돌진했다.
그 자신은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을 테니까.
“정면 승부를 할 셈이냐!”
카븜의 왕은 매우 기쁜 얼굴로 유지한을 맞이했다.
캉!
유지한이 휘두른 검을 카븜의 왕이 맨주먹으로 받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먹은 매우 멀쩡했다.
인간의 주먹과 검이 닿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소리는 덤이었다.
‘역시 엄청난 몸이다.’
이건 지켜보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카븜의 왕이 정말로 강철같은 육체를 보유했다는 것을.
‘하긴, 바바리안이니까.’
신에게 축복받은 육체를 보유한 바바리안.
카븜 사람들은 본인들을 인간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은 인간과는 그 강도가 차원이 다르다.
그들 사이에서도 정점에 있는 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콰아아앙——!!
끝내 땅으로 떨어진 망치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일으키며 대련장 전체를 산산조각냈다.
직전의 망치질보다도 더 강한 마력과 힘이 실린 공격.
그 여파는 당연하게도 대련장 왕의 궁전으로 이어졌다.
쩌적! 쩌저적!
궁전의 벽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나고.
그 균열은 잠시 후 천장까지 이어졌다.
“구, 궁전이 무너진다!”
“으아아! 왕이시여!!”
대련이 끝나는 걸 기다리고 있던 저택의 사용인들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대련이 이어지다가는 궁전이 폭삭 내려앉을 분위기!
그럼에도 두 사람의 대련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됐다.
캉! 캉! 캉! 캉!
오러가 실린 검을 휘두르며 카븜의 왕을 몰아치는 유지한.
공격에 의해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 카븜의 왕은 여전히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솨아아아—!
왕의 주먹에서 시작된 오러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한곳에서 피워올린 오러를 사용자의 몸으로 옮겨 사용하는 오러 전이였다.
‘역시 괴물이야.’
유지한은 그걸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조차 사용한 상태로 1분을 버티지 못하는 오러 전이를 카븜의 왕은 3분을 넘기고도 여유롭게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이어 공세를 이어나가는 건 여전히 유지한 쪽이었다.
파츳! 파츳!
큐디가 왕의 주먹과 몸을 조금씩 긁어낼 때마다 접촉면에서 작은 불꽃이 튀겼다.
한 번의 마찰로 생겨난 불꽃이 사라지기도 전, 유지한의 연격에 의해 그 다음 불꽃이 일어났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왕의 피부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갔다.
‘이놈…….’
방어에서 벗어나 공격을 시도하면 그 움직임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대응하는 유지한이었다.
망치를 내던진 후 특유의 강인한 몸으로 공격을 버티던 카븜의 왕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아니라 바람을 상대하는 것만 같군.’
유지한을 상대하는 카븜의 왕은 바람을 떠올렸다.
피부로 그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지되 절대로 손에 쥘 수 없는 자유로운 바람!
그만큼 유연하고 불규칙한 유지한의 움직임은 카븜의 왕조차 따라잡기 힘든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흉악한 짐승도 한 번에 기절시킬 수 있는 주먹은 날카로운 검에 의해 막히고.
카븜의 전사 10명이 모여도 막아낼 수 없는 그의 발차기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때렸다.
상대의 빈틈을 노렸다고 생각했지만, 빈틈을 내어주는 건 항상 카븜의 왕뿐이었다.
당장이라도 팔을 뻗으면 유지한을 잡을 수 있을 만한 거리임에도 말이다.
“합!”
카븜의 왕은 자신을 향해서 떨어지는 검날에 강력한 힘을 실어 주먹을 꽂아 넣었다.
파르르르—!
“……!”
검에서 손으로, 손에서 팔로. 그리고 어깨와 전신으로 퍼지는 진동.
전신을 울리는 진동에 유지한이 순간 멈칫했다.
충분히 쳐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임에도 주먹에 담긴 힘이 예상치를 훌쩍 넘긴 것이었다.
어찌나 강하게 받아쳤는지 그토록 단단하던 왕의 손가락에 상처가 생겨날 정도.
카븜의 왕은 그 틈을 노리고 유지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공격을 피하는 방법>
그때 샘플링을 사용한 유지한의 시야로 흐릿한 잔상이 떠올랐다.
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며 카븜의 왕으로부터 벗어나는 단 2개의 잔상!
‘이거다!’
옆으로 몸을 던지는 잔상과 위로 높게 뛰어오르는 잔상.
거기서 유지한이 선택한 것은 왕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는 잔상이었다.
[윈드 밤]
펑!
유지한의 몸이 머리 위로 높게 치솟았다.
그러자 카븜의 왕은 손으로 그의 다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딱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 때문에 그를 붙잡지 못했다.
‘또 놓쳤군!’
이번에는 정말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유지한은 정말 얄밉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공격에 실패한 카븜의 왕은 되레 즐거워서 미소를 짓더니.
땅에 박혀버린 자신의 망치를 회수했다.
[자이언트 해머]
뒤이어 또다시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망치!
‘궁전을 아예 부숴버릴 셈인가?’
왕에게는 이 궁전이 아깝지도 않은 것인지.
얼굴을 찌푸린 유지한은 하늘에서 왕을 향해 대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실프!”
—기다렸다고!
두둥실 떠오른 실프의 몸이 큐디의 안으로 흡수되었다.
푸화아아아——!!
초록빛 오러가 둘린 검에 정령의 존재감이 더해지고.
종이처럼 얇게 압축된 바람이 검 전체를 뒤덮었다.
드리미움에 촘촘하게 박힌 하얀 점들은 오러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신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카븜의 왕은 순간적으로 하늘에서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허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그럴 리는 없을 터.
“와라!”
마지막 충돌이 될듯한 예감.
카븜의 왕은 전신의 오러를 더욱 두껍게 둘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충돌과 땅으로 떨어진 [자이언트 해머]로 인해.
쿠과과과과과광——!!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했던 대련장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모든 짐을 배에 싣고 출발 준비를 마친 카를렘 원정대가 육지를 바라봤다.
카븜의 사람들과 손과 팔에 하얀 붕대를 두른 카븜의 왕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가라.”
“……궁전은요?”
“사람을 불러서 수리하면 된다.”
“수리가 아니라 다시 지어야 할 것 같던데.”
“커흠!”
“그러게 적당히 좀 하시지.”
유지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련의 결과로 사라져버린 대련장과 반파되어버린 왕의 궁전 때문이었다.
——내 패배다.
그 덕분에 대련은 승부가 나지 않고 중단되었지만, 카븜의 왕은 자신의 패배를 선언했다.
난생처음으로 몸에 의미 있는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느하하하! 아주 화끈한 싸움 구경 잘 했다. 보는 내 몸이 달아올랐다고!”
“너와도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와타나베는 카븜의 왕에게 윙크를 날렸다.
카븜에서 지내는 동안 왕과 묘하게 죽이 잘 맞았던 와타나베였다.
“그래,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차원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법사들은 앞으로도 통로를 연구할 계획이다. 언젠가 카를렘과 지구, 두 차원이 자유로운 교류가 가능해질 때까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왕과 인사를 마친 유지한은 그의 옆에 있는 카븜의 전사, 투타를 바라봤다.
“네 덕분에 모든 일이 잘 풀렸어.”
“내가 잘한 건가?”
“잘했지. 아주 잘.”
“으흠!”
카븜에서 처음 마주쳤던 카븜의 전사.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가 영웅들을 믿어주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지금처럼 잘 풀리지는 않았으리라.
왕에게는 투타에게 후한 보상을 내려달라고 말해뒀으니, 그는 앞으로 카븜의 전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전사가 될 수 있으리라.
“갑니다!”
“다들 잘 지내요!”
“찍찍! 음식 챙겨줘서 고맙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다시 여기로 와라!”
펄럭!
돛을 펼친 배가 푸른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실프는 널따란 돛의 중심에서 바람으로 돛을 밀어내고 있었다.
—지한! 속도는 이 정도면 돼?
“어.”
사정상 항해사는 데려오지 못했지만.
목적지인 섬의 위치는 완벽하게 파악해뒀다.
계획대로 배를 움직이기만 하면 섬에 도달할 수 있을 터.
그런데 그들이 배를 타고 약 30분을 이동하던 그때였다.
카가가각!!
큰 문제 없이 질주하던 배가 갑자기 멈춰서는 느낌에 배에 타고 있던 모두가 흠칫 놀랐다.
윤도하의 지시를 받은 무무는 그 즉시 바닥을 뚫고 내려가 상황을 살폈다.
“배가. 미역에 걸렸어.”
“미역? 해초를 말하는 거야?”
“음므믐? 몰라.”
미역처럼 생긴 질긴 해초가 배의 바닥에 걸려 항해를 방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자른다?
물속에서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실프는 그것들을 손쉽게 잘라냈다.
유지한은 비로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배를 보며 생각했다.
‘죽음의 섬이라더니…….’
시작부터 불길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