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죽음의 섬 (2)
유지한은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멸망의 징조가 사라진 직후.
밤하늘에 떠 있기에는 너무나도 밝았던 3개의 보름달은 천천히 그 크기를 줄여가고 있었다.
—지한. 마력이 줄어들고 있어.
실프는 점점 줄어드는 대기의 마력을 언급했다.
모든 달이 보름달로 변했을 때 마력이 최고치를 찍은 것과 비교하면 실제로 마력의 농도와 양이 비교적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데!
정령으로서 활동하기에 짙고 풍부한 마력은 천국이나 다름없으므로.
실프는 변화하는 카를렘의 환경을 두고 조금 아쉬워했다.
“이상 현상은 끝날 때가 됐지.”
—갸아아악! 아쉽다, 아쉬워!
“너만 좋을 수는 없잖아.”
대기의 마력이 너무 짙어지면 여러 부작용도 일어나곤 한다.
땅에 과도한 영양이 부여되어 각종 농작물이 죽어버린다든지.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평소보다 훨씬 늘어난다든지.
정령에게 좋은 환경이 모두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다만, 우리는 마력이 더 줄어들기 전에 떠나야 한다.’
차원 마법에 사용하기에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대기의 마력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마법의 어려움이 증가하기 때문에.
카를렘을 떠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맞았다.
—오! 저기 온다.
실프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몸의 초록빛을 더 강하게 반짝였다.
그 밝은 빛에 이끌리듯 다가온 자는 중년의 드워프.
프란 페이저의 아버지인 가단 페이저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괜찮아요. 그리고 말씀은 예전처럼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저, 정말 그래도 되나?”
가단 페이저는 머쓱해진 얼굴로 목을 긁적였다.
마즈에서 크루바가 유일한 지배자의 자리에 오른 뒤, 그와 자주 함께하면서 모습을 비췄던 유지한.
덕분에 유지한이 매우 높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가단의 머리에 박혀있었다.
“그럼 편하게 말하지.”
“예. 저도 그게 편합니다.”
“먼저……. 고맙다.”
가단은 유지한에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최근 광산에서 근무하는 드워프들의 처우가 매우 긍정적으로 개선된 이유가 바로 그의 개입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임에도 드워프에게 희망을 안겨준 그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룬을 기억해?”
“저희에게 광산을 안내해준 드워프잖아요. 제가 직접 인형화를 풀어주기도 했고.”
“그룬을 포함해 모든 어린아이들이 따뜻한 집으로 되돌아갔어. 위에서 더는 그 아이들에게 노동을 강요하지 않아. 음식의 양이 모자라서 굶는 드워프는 사라졌고, 다들 전보다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지. 이게 대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저보다는 시후에게 감사해주세요.”
김시후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이종족들에게 이렇게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따라서 드워프가 생기를 되찾을 수 있던 건 모두 하프엘프인 김시후 덕분이었다.
“혹시……. 조만간 떠나는 건가?”
“맞습니다.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요.”
“…….”
미개척 대륙에서 왔다는 그가 떠난다는 말에 가단이 입을 다물었다.
영웅들이 사라졌을 때 크루바의 태도가 달라지는 걸 걱정하는 것일까.
하지만 유지한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카븜의 왕에게 크루바를 견제해달라고 부탁을 해두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마즈의 체제는 지금처럼 유지될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생각 중이었네.”
“……?”
“잠깐 날 따라올 수 있겠나?”
유지한은 가단의 뒤를 따라 밤길을 걸었다.
그리고 서로 짧은 대화만을 나누며 20분 정도를 걸어간 끝에.
두 사람이 도착한 장소는 가단이 머무는 집이었다.
“한때는 프란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지.”
“건물 외양만 보면 대장간 같은 분위기군요.”
“실제로도 대장간이었어. 내 아버지, 그러니까 프란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대장간.”
“호오…….”
“나는 기술이 부족해서 아버지를 따라 대장장이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광산의 작업반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버지라는 배경 덕분이기도 해.”
가단은 혼자 사는 집으로 유지한을 안내했다.
중년의 남성이 혼자 사는 것 치고는 의외로 상당히 깔끔한 내부.
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낡은 방패와 무기들이 걸려있었다.
—술 냄새난다! 나이 든 아저씨 혼자 사는 집에 술 냄새!!
“……그거 좀 조용히 시킬 수는 없나?”
—우히히히! 주모! 어서 여기 막걸리 하나 가져와!
술 냄새를 감지하고 가단을 놀리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실프.
뾰로통한 얼굴로 그걸 올려다보던 가단은 이내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고처럼 물건이 잔뜩 쌓여있는 곳을 뒤적거렸다.
덜그럭! 덜그럭!
물건을 요란하게 파헤치던 가단은 곧 원하는 걸 찾아내고서 손을 멈췄다.
“받아라.”
“예?”
“무거우니까 조심하고.”
유지한은 그가 던진 물건을 손으로 받았다.
‘꽤 무겁다.’
부피에 비교해 그가 조금 놀랄 정도의 무게감을 가진 그것은.
은박지와 비슷한 종이로 꽁꽁 싸여있었다.
“이게 뭡니까?”
“내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보관하던 광석. 그 어떤 손님이 대장간에 방문하더라도 그 물건만큼은 꼭꼭 숨겨두셨지. 과장 조금 보태서 가문의 보물이라고 해도 좋아.”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중요한 걸 저한테 줘도 되는 겁니까?”
“저 동그란 놈 말마따나 이건 술 냄새나는 집에 두는 것보다는 너희가 훨씬 더 잘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우히히! 화끈하네!
“마즈를 바꿔 준 보답이라고 생각해.”
프란의 할아버지가 소중히 여겨온 보물을 넘겨주겠다는 가단.
진지한 표정을 한 그를 보며 유지한은 언젠가 하늘보호소에 처음 방문했던 때, 자신에게 마결정을 선물했던 프란을 떠올렸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똑같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보물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입은 자에게 그 보물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태도.
아무래도 프란과 가단은 피로 이어진 혈육이 분명한 것 같았다.
“열어봐도 되죠?”
“마음대로.”
유지한은 조심스럽게 가단이 선물한 물건의 포장을 뜯었다.
한 겹 한 겹, 얇은 은박지가 겉면에서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얼마나 두껍게 포장한 거야?’
포장의 양이 상당하여 광석의 크기가 생각보다 더 줄어들었을 무렵.
두근!
유지한은 그 안에서 기묘한 마력을 느꼈다.
하늘에 떠 있던 실프는 어느새 그 옆에서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건…….”
마침내 포장지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매우 투명한 광석이었다.
아직 가공되지 않아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모양새.
언뜻 보면 평범한 유리가 떠오르는 물건이었지만.
‘드리미움?!’
유지한은 그것으로부터 환상의 금속인 드리미움과 매우 비슷한 마력을 느꼈다.
보여지는 외관부터 같은 부피의 돌덩이보다 무거운 무게까지, 드리미움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광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무서우리만치 큐디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어떤가?”
“……확실히 보통 물건은 아니군요.”
“역시 그렇겠지.”
“이거 이름이 있습니까?”
“아버지는 그걸 루미움이라고 불렀지. 그 어딜 가서도 그런 물건은 구할 수 없을 거야.”
가문의 보물과 다름없는 루미움에 자신감을 내비치는 가단.
유지한은 자신이 벗겨낸 은박지를 내려다봤다.
광석을 둘러싸고 있던 그것은 마력 차단 효과가 있는 포장지인 것 같았다.
루미움이 보통 물건이 아닌 것을 알고 철저하게 숨겨둔 것이리라.
우우웅!
유지한이 허리춤에서 진동을 느낀 건 바로 그때였다.
표정을 찡그린 그는 황급히 큐디를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이거 왜 이래?”
공들여 관리하지 않아도 여전히 예기가 느껴지는 새까만 칼날은.
날이 2, 3개로 겹쳐 보일 정도로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루미움이?!”
가단이 손으로 가리키는 루미움도 드리미움을 따라 진동했다.
서로 다른 2개의 광물이 공명하는 것이었다.
‘알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유지한이 큐디의 검 끝을 루미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큐디와 루미움에서 느껴지던 진동이 한순간 뚝 멎어버리더니.
파삭!
한없이 투명하던 루미움의 형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화들짝 놀란 가단이 입을 쩍 벌린 가운데.
루미움은 눈으로 보기조차 힘든 작은 입자가 되어 큐디의 검면에 달라붙었다.
‘드리미움이 루미움을 흡수할 수 있는 건가?’
큐디는 루미움의 모든 것을 작은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전부 받아들였다.
광석 상태에서 상당한 무게가 느껴지던 루미움이었으나 큐디에는 별다른 무게 변화가 없었다.
일정 수치까지는 무게를 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드리미움의 특성 때문이리라.
—여기,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뭐?”
—슝!
유지한이 신기한 눈으로 루미움을 흡수한 큐디를 살펴보는데.
광석에 가까이 붙어 있던 실프가 큐디를 향해 몸을 던졌다.
쏙!
그러자 동그란 실프의 몸이 큐디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밤하늘처럼 새까만 검날 위에 별처럼 박혀있던 하얀색 점이 영롱한 초록색 빛을 내뿜었다.
‘플로른과 같은 구조구나!’
유지한과 계약하기 전, 실프가 몇 년씩이나 머물렀던 김시후의 지팡이.
큐디는 루미움을 흡수함으로써 그와 비슷하게 정령이 깃들 수 있는 구조로 변한 것이었다.
—오! 꽤 안락한데?
“뭐, 뭔가 크게 잘못된 건 아니겠지?!”
큐디와 합쳐져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실프와는 달리.
가단은 매우 당황한 목소리였다.
“전혀 아닙니다. 덕분에 훌륭한 물건을 얻었네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심 걱정이 컸던 가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가 유지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기, 녹음기라고 했었나? 예전에 나한테 들려줬던 아들놈의 목소리 말이야.”
“예.”
“그 물건을 나한테 줄 수 있겠어?”
“혹시 프란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신 겁니까?”
“…….”
아버지를 두고 홀로 카를렘을 떠나간 프란 페이저.
사라진 아들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던 가단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가 오늘 루미움을 준비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녹음기 때문이기도 했다.
“프란이 보고 싶다면, 저희와 함께 미개척 대륙으로 가시는 게 어떤가요?”
“고맙지만 거절하마. 여길 떠날 자신은 없으니.”
자기가 태어난 카를렘을 떠날 수는 없다는 가단.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살아온 지역을 떠난다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이리라.
그에 유지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녹음기는 필요 없습니다. 직접 대화하시면 되니까.”
“그게 무슨…….”
“차원 전화기를 카를렘에 두고 가겠습니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프란과 연결해 드리죠.”
“저, 정말로?!”
“예.”
프란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말에 가단이 반색했다.
‘받은 값은 해야지.’
돈주고도 못 살 물건을 공짜로 먹었으니.
부자간의 통화 정도는 얼마든지 주선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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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찍! 이 생선 조림은 마치 사막의 오아이스 같다!”
“그거 내 꺼야, 이 못된 생쥐야.”
“식탁 위에서 네꺼 내꺼가 어딨냐! 찍!”
“그러면 이 고기는 내꺼.”
“찍! 찍찍!! 그건 안 된다—!”
이미아는 원형 식탁에서 칠라와 마주 앉아 식사를 즐겼다.
평온함 따위는 1도 보이지 않는 전투적인 식사!
그들의 블랙홀 같은 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음식은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 덕분에 요리를 준비하느라 고용된 요리사들은 며칠째 주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찍찍! 마지막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이다!”
“입에 묻은 거나 닦고 말해. 경박한 생쥐야.”
“자꾸 생쥐라고 하지 마라! 찍!!”
마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기는 그들에게 유지한이 다가왔다.
“카븜으로 출발할 시간이야.”
“찍찍?! 대장! 아직 아이스크림이 남았다!”
“포기해. 실컷 먹었잖아.”
“찍……!”
쿠궁!
칠라는 차마 반항을 하지 못하고 의자에서 쓰러지듯 내려오며 절망했다.
이미아는 식탁보로 깔끔하게 입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는 거야?”
“그래.”
접근한 모두가 죽어버렸다는 소문이 도는 카를렘의 섬.
그 흉흉한 소문을 깨부수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