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죽음의 섬
절대로 우연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윤도하가 현재 상황에 만족함으로써 멸망의 징조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카를렘으로 오자마자 원정대에서 이탈했던 이탈자들도.
카븜에서 골칫덩이로 여겨졌던 혼돈조차도.
그 혼돈을 만들어낸 데서조차도 멸망의 징조가 생겨난 원인이 아니었다.
멸망의 징조가 생겨난 원인은 데서의 계획에 휘말렸던 윤도하 때문이었다.
유지한은 직감적으로 그러한 결론에 다다랐다.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개인의 감정 변화만으로 한 세계의 멸망이 결정된다니.
누가 듣는다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말할 테지.
그럼에도 그는 확신이 있었다.
‘소름이 돋는군.’
그는 바짝 마른 입술에 혀로 침을 발랐다.
본래 카를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윤도하라는 인물이 카를렘에 멸망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가 아닌 다른 누구도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심지어 나조차도!’
그것은 유지한 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 자신이 다른 세계가 멸망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유지한에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프. 어떻게 생각해?”
—으음! 듣기로는 꽤 그럴듯해.
실프는 확신이 담긴 유지한의 추측에 동의하는 쪽이었다.
—윤도하, 마즈를 몽땅 부숴버리고도 남을만한 사람이야. 심지어 무무 없이 자기 힘으로. 그대로 폭주했다면 카를렘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었겠지.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어.”
—우히히!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혼란만 커질걸.
영웅 개인이 세계의 멸망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건 카를렘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이 정보를 악용한다면 지금보다 많은 피해자가 생기겠지.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정보이기에, 유지한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다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멸망의 징조는 모종의 이유로 사라질 수 있다.
멸망이 예견된 차원에서 멸망을 피해 가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
요거 상단의 상단주 알로의 저택.
그곳의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알로의 아버지는 민유리가 건넨 찻잔을 받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따뜻할 때 마시세요.”
“하지만 이런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켜도 되는데…….”
마력 변색 증후군으로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데서의 협력으로 깨어난 알로의 아버지.
그는 매우 부담스럽다는 얼굴로 민유리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부쩍 성장한 요거 상단의 최고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중 한 명이 직접 차를 끓이고, 심지어 가져다준다니!
이런 자질구레한 일은 민유리가 아니라 얼마든지 저택의 하인들에게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민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크흠…….”
“식기 전에 드세요.”
호로록.
거듭되는 요청에 진 알로의 아버지는 결국 찻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민유리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가요?”
“쓴맛이 강하긴 하지만, 이전처럼 몸에 활력이 도는 기분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요.”
“트, 특히 다리에 힘이 생기는 것 같군요. 그리고…….”
민유리는 눈을 빛내며 그가 들려주는 몸의 변화를 체크했다.
찻잔에 담긴 건 기력회복이 도움이 되는 약초를 달인 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구로 돌아가서 그녀의 동생에게 먹일 약초이기도 했다.
‘우리 소연이에게는 효과 좋고 안전한 것만 먹여야 해.’
아버지는 그녀의 동생에 앞서 일종의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카븜에서 검증된 약초인 덕분에.
알로와 알로의 아버지도 기꺼이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찍찍……. 그 맛없는 걸 잘도 마시는군.”
“넌 조용히 하고 있어.”
“주인아! 사실 너는 저 남자에게 고문을 하는 게 아닐까? 찍?”
“조용히 하래두.”
칠라는 맛없는 약초물을 마시는 알로의 아버지를 두고 고개를 저었다.
쓴맛을 혐오하는 칠라에게 약초물은 지옥에서 올라온 흙탕물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딸각!
알로의 아버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리 씨. 동생 분의 나이가 몇이라고 했죠?”
“쓰러지기 전에는 18살이었으니, 지금은 22살쯤 됐네요.”
“20대 초반. 저는 딱 그 나잇대에 요거 상단을 꾸리고, 또 상단이 지금처럼 커지는 꿈을 꾸었답니다. 개인의 인생에서도 굉장히 활력이 넘치고, 또 중요한 시간대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하는데 말이죠…….”
민유리가 병실에 누워있는 동생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중요한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보내고 있는 동생이었다.
“언니 분이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걸 알아줘야 할 텐데요.”
“그냥,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어요.”
“제가 깨어나는 거 직접 보셨잖아요. 그 데서라는 친구, 너무 악독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분명 실력은 있을 겁니다.”
데서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알로의 아버지.
그는 민유리의 동생도 깨어날 수 있을 거라며 그녀를 응원했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도 넘치고, 마음씨가 참 착한 여성이야. ’
알로의 아버지는 조금 아깝다는 눈으로 민유리를 흘겨봤다.
‘이런 사람이 알로의 짝이 되어주면 좋을 텐데…….’
상단에만 집중하느라 카를렘의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그의 아들 알로였다.
아들에게 민유리 같은 짝이 생긴다면 부모로서는 둘도 없는 행복이리라.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칠라는 눈을 좁히며 말했다.
“찍찍! 그런 탐욕스러운 눈으로 내 주인을 보지 마라.”
“커흐흠! 타, 탐욕스럽다니…….”
“그 누구도 날 속일 수는 없다! 찍!”
하지만 민유리를 붙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로의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저들은 조만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고향으로는 언제 돌아가시는 거죠?”
“지금도 계속 방법을 찾고 있어요.”
“미개척 대륙으로 가는 길이 만만찮은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렇네요.”
카를렘 원정대의 마법사들은 카븜에서 차원 마법을 연구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들이 한데 모여있는 간이 연구소는 며칠째 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고향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유리 씨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앗! 아직 일어나시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알로의 아버지가 느릿한 걸음으로 작은 탁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손으로 잡아당겨서 연 탁자의 서랍 속은 텅텅 비어있었다.
통! 통통!
하지만 그 내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것으로 감춰져 있던 비밀의 공간이 드러나자.
그 안에서 작은 크기의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반지 따위의 장신구가 들어갈 만한 크기.
그 상자는 딱 봐도 귀중한 것이 들어있다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민유리가 말했다.
“그게 뭔가요?”
“혹시 드라구라는 걸 아십니까?”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 단어가 나오자 민유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라구.
지구에서 용, 드래곤이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생명체였다.
“드라구는 카를렘에서 과거 역사에만 기록된 존재입니다. 살아있는 드라구를 만나본 사람은 현재 카를렘에 존재하지 않겠죠.”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리고 이건 그 드라구의 뼈입니다.”
“……!”
고급스러운 상자의 덮개가 열리자 안에서 엄지손톱만 한 하얀 구슬이 나왔다.
언젠가 카를렘에 실존했던 드라구의 뼈로 만들어졌다는 구슬이었다.
흠칫 놀란 민유리가 말했다.
“진짜로 드래곤, 아니 드라구의 뼈인가요?”
“제가 젊은 시절 한 떠돌이 상인에게 구매했던 물건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재미 삼아 구매한 물건이라며 웃어 보이는 알로의 아버지.
하지만 유지한으로부터 하이퍼 드래곤의 뼈를 선물 받았던 민유리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짜가 아니야.’
기존에 갖고 있던 드래곤의 뼈와 유사한 기운을 품은 저것이.
정말로 실존했던 드래곤이 맞다는 것을.
“요거 상단의 역사와 함께했던 물건입니다만, 이걸 유리 씨께 선물로 드리고 싶어요.”
“왜 그걸 저한테?”
“절 자주 챙겨주시니 뭐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동생분의 치료를 기원하는 의미에서도.”
영웅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데 이런 물건 따위는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가족이 있다니, 어쩐지 민유리에게 정이 가는 그였다.
“그……. 감사하게 받을게요.”
먼저 주겠다는 걸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겠지.
결국, 드라구의 뼈는 고급스러운 상자에 담긴 채로 민유리의 손에 주어졌다.
“고향에 돌아가시거든, 그걸 보면서 가끔은 저희를 떠올려주세요.”
“물론이죠.”
알로의 아버지가 섭취했던 약초물은 민유리의 공책에 모두 그 종류와 배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동생의 치료에 앞서 실험체가 되어준 인물을 결코 잊을 수는 없으리라.
*****
“아……. 누가 커피 좀 타줘.”
“저기 물통에 담아놨어요.”
“하아암…….”
“잠깐만 잘까…….”
카븜에서 차원 마법을 연구 중인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졸린 기색이었다.
영웅의 육체를 가진 이들조차 며칠째 이어진 강행군으로 극한의 피곤을 느끼는 것이었다.
“367번째 시도 끝났습니다.”
“네? 벌써요?”
“마력 패턴 살짝 수정한 걸로 바로 다음 거 진행할게요.”
그런 가운데 아직도 눈에서 빛을 뿜어내는 사람은 오직 김시후뿐이었다.
커피를 마시던 한 마법사는 질린다는 듯 말했다.
“시후 씨. 지치지도 않아요?”
“전혀요! 이렇게나 재밌는 걸 하고 있는데 지치겠어요?”
“재, 재밌다니…….”
“재미없어요?”
차원 마법 연구를 두고 재밌다고 평가하는 김시후.
기운 넘치게 대답하는 그를 향해 다른 마법사들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김시후보다 훨씬 긴 경력을 가진 마법사조차 마법에 관한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으로는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회잖아!’
영웅들을 좋게 봐주는 카븜의 왕은 그들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마련해주었고.
카븜의 마법사들은 지구와는 다른 마법 지식을 아낌없이 제공해주었다.
낯선 세계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새로운 마법을 연구해볼 기회가 인생에 얼마나 있을까.
김시후는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모든 걸 쏟아붓고 싶었다.
—저, 저도 돕겠습니다아…….
한국에 있는 양지철 또한 차원 전화기를 통해 하루 20시간 이상을 대기하고 있었다.
물로 잠깐 목을 축이던 김시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차원의 경계로 넘어가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네요.”
차원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차원의 경계로 이동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아제시아에서 넘어온 이세계인들과 한 차례 충돌은 겪었던 한국은 차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법을 터득했다.
다만 그것은 지구에서도 오직 한국에 있을 때만 가능한 방법이기에.
카를렘에서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역시 다른 마법진을 그려 하는 게 좋겠는데…….”
“아뇨. 마법진은 문제없습니다. 그보다 차원 마법진이 그려지기에 적합한 지역을 찾는 편이 옳아요.”
“윤도하 씨가 계속 조사하고 있지만, 마땅한 곳이 없잖아요?”
“그냥 지한 씨를 불러오죠. 차원의 경계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계시니까.”
“지한이 형과는 제가 따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으음…….”
윤도하와 유지한에게 도움을 구해도 진척이 더딘 상황.
그에 따라 마법사들은 카를렘에 더 체류할 기간을 최소 3주 이상으로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컹!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이 연구소의 주인인 카븜의 마법사가 등장했다.
“알아냈다.”
“네?”
“카를렘에서 통로를 열기에 가장 완벽한 장소를 알아냈다!!”
“오!”
카븜의 마법사가 말하는 통로는 차원의 경계를 가리키는 단어.
졸고 있던 마법사들도 졸음이 확 달아날 정도의 소식이었다.
“카를렘에서 가장 마력이 풍부하고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땅! 그곳에 가면 10살짜리 마법사도 통로를 열 수 있을 테지.”
“진짜로요?!”
“역시 난 대단하다!”
스스로 다른 차원을 인지하고 차원 마법을 연구해온 마법사다운 실력이었다.
카를렘의 마법 수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저자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찬양하던 마법사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거기로 가서는 안 된다.”
“네?”
“……?”
좋은 장소를 찾았는데 가서는 안 된다니.
모두가 의문이 담긴 표정을 짓자 카븜의 마법사가 말했다.
“그곳은 한번 발을 들여놓은 그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못한, 죽음의 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