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마즈 (2)
윤도하가 회복됨과 동시에 보름달로 변해가는 푸른 달.
이미아가 넋을 잃고 달을 바라보는 사이, 몸의 자유를 되찾은 윤도하는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좀 괜찮으세요?”
“멀쩡해. 진짜 고맙다, 지한아!”
“다행입니다.”
유지한은 윤도하가 건넨 악수 요청을 받았다.
사라진 윤도하를 찾아내고 그의 몸을 원상태로 회복시켰다는 것.
이로써 카를렘 원정의 목적을 대부분 이뤘다고 봐도 좋았다.
“이렇게나 쉽다고……?”
마력 변색 증후군의 치료.
즉, 저주를 해주하는 장면을 직관한 민유리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고작 손을 잡고 마력을 불어넣은 것으로 환자가 회복되다니!
“찍찍? 주인아. 어디 아프냐?”
“아니야.”
두근! 두근! 두근!
깊은 잠에 빠진 동생을 깨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녀의 몸을 뜨겁게 달궜다.
“이봐, 데서. 다른 애들도 치료할 수 있지?”
“지금 바로 하겠다.”
“조심해. 걔들은 널 보자마자 죽이려고 할 테니까.”
“…….”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기억하는 데서는 조용히 박재경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윤도하에게 해준 것처럼, 마력 변색 증후군에 걸린 그들의 몸을 1명씩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으…….”
2팀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박재경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붙잡으며 신음하던 그녀는 번쩍 눈을 뜨며 주변을 돌아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한쪽 손을 흔들고 있는 윤도하였다.
“요!”
“기, 길드장 님?!”
“재경아. 너도 수고 많았다.”
“진짜 길드장 님 맞죠? 이게 대체 어떻게……!”
“자세한 건 조금 뒤에 듣고, 옆에 그놈은 건들지 마.”
박재경의 고개가 천천히 데서 쪽으로 돌아갔다.
다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2팀은 운 나쁘게 가짜 윤도하를 한무더기로 마주친 것이 전부였으니까.
“……모두 당신이 벌인 짓이었군요.”
하지만 거대 길드의 2인자 답게.
그녀가 대강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빠드득!
죽은 영웅들을 기억하는 박재경이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데서를 죽여버릴 듯한 기세였다.
아마도 그녀가 없었다면 2팀은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터.
“반드시 제가 직접 처벌을 내릴 겁니다……!”
하지만 당장은 그를 건들지 말라는 윤도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그저 데서를 죽일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부담되는군.”
“허튼짓하기만 해봐.”
데서는 박재경의 철저한 감시 아래 쓰러진 영웅들의 저주를 풀어나갔다.
꽤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미아는 조용히 유지한을 호출했다.
“왜 그래?”
“저기 봐.”
손가락으로 창문 너머의 밤하늘을 가리키는 이미아.
거기서 하늘에 떠오른 달을 본 유지한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보름달이 3개라고?”
“윤도하 씨가 회복되던 순간에 보름달로 변했어.”
“하지만 시기가 안 맞는데.”
1년에 오직 3일 동안만 모양이 같아진다는 3개의 달.
같아지는 모양은 대개 보름달이며 그 시기 카를렘의 전 지역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벌어진다.
하지만 이렇게나 이른 시기에 모든 달이 보름달로 변할 거라는 얘기는 레론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조금 전부터 마력이 너무 빠르게 회복되는 것 같더라니…….”
마력 회복 속도에 의문을 갖고 있던 김시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서 데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치료를 이어간 끝에.
마침내 대피소에 모여 있던 이들은 모두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분들은 왜 안 깨어나죠?”
“단순히 체력 문제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영웅들은 곤히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숨소리를 내며 잠든 어린 드워프의 상태를 확인한 윤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마즈를 부숴버리면 되겠다.”
“예?”
그런데 뒤이어 그가 입으로 중얼거린 말에.
유지한은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응? 마즈를 부술 거라고.”
“마즈를 부순다고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박재경이 눈을 껌벅거렸다.
다른 일행들의 반응도 그와 비슷했다.
심지어는 데서마저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농담하시는 거죠?”
“아니. 나는 마즈의 지배자들과 그 관계자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광산의 드워프들을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올려놓을 거다.”
“……?!”
윤도하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잠든 드워프를 내려다봤다.
마즈에 도착하여 카를렘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드워프들이 겪은 수모와 고통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그였다.
“성악설이라는 거 알지?”
“인간의 본성은 본래 이기적이고 악하다는 거요?”
“그래. 내가 마즈에 있는 동안 그 성악설이 많이 떠오르더라.”
작업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관리자라는 인간에게 구타당한 드워프.
길을 걷다 술에 취한 인간들에게 걸려서 시비가 걸린 드워프.
개중에는 이유 없이 맞다가 죽은 이들도 있었고, 평생 큰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윤도하가 몰래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죽을뻔한 드워프의 숫자만 약 7명.
그의 눈길이 닿지 않은 지역까지 합치면 셀 수 없을 만큼의 드워프가 고통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심정인지는 알겠지만…….’
윤도하의 말에 일부 공감하는 김시후는 머뭇거렸다.
“지한.”
“예.”
“궁금하지 않아? 항상 핍박받기만 하던 이들이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
“혁명! 혁명이 일어나는 거지! 그 결과가 난 너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데…….”
혁명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광기로 번들거리는 윤도하의 눈동자.
그와 눈을 마주친 유지한은 잠시 잊고 있던 그의 별명을 떠올렸다.
‘악동(惡童).’
저건 확실히 드워프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거대 길드를 운영하며 잠잠해졌던 윤도하의 본능이.
카를렘에서 새롭게 깨어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게 최선의 방법인가?’
드워프를 생각하는 마음은 유지한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드워프들의 지위를 강제로 지배자까지 끌어올렸을 때.
마즈가 매끄럽게 유지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커다란 의문이 남았다.
‘아마 전쟁이 벌어지겠지.’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못한 마즈의 인간들은 드워프에게 반기를 들 거고.
내부에 시작된 분쟁은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지금보다 많은 피가 흐르고, 필시 더 많은 이들이 죽게 되리라.
그래서 유지한은 말했다.
“반대합니다.”
“반대?”
“따로 준비해둔 게 있으니까요.”
“호오, 그게 뭐야?”
“이미 와타나베 님께서도 저와 함께 움직이고 계십니다.”
3개의 보름달이 카를렘을 밝히는 밤.
유지한은 커다란 흥미를 드러내는 윤도하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
“거인이여. 오랜만이로군.”
“형도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느하하하! 설마 또 가짜가 등장한 건 아닐 테지?”
이틀 후.
오전 중에 대피소에 합류한 와타나베는 윤도하와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던 그들의 사이로 유지한이 끼어들며 말했다.
“서쪽의 지배자들은 잘 처리하셨나요?”
“아아, 못해도 2달은 빠져나오지 못할 거다.”
음식과 물이 풍족하게 보관된 장소에 가둬놓은 지배자들.
누구의 짓인지도 알 수 없게끔 은밀하게 작업을 쳐두었으니 걱정은 없었다.
미리 그 내용을 전해 들었던 윤도하는 피식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 참, 언제 그렇게 깜찍한 짓을 꾸몄대.”
“길드장의 요청을 들어주려고요.”
“크, 시후는 참 훌륭한 동료를 뒀구나!”
“아무튼, 이 내용은 대외비입니다.”
“걱정하지 마.”
유지한은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지배자들과의 만찬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서가 일으킨 사태가 완전히 수습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밤하늘에 3개의 보름달이 떠오른 겸, 그리고 볼일을 마친 돼지국밥 용병단이 마즈를 떠나기 전 지배자들이 감사의 의미로 식사 자리를 제안한 것이었다.
‘멸망의 징조가 어제보다 커진 느낌인데.’
태양 위의 놓인 검은색 점은 어제보다 크게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변해버린 태양과 보름달을 두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유지한은 그것을 아직 카를렘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자자, 어서 들어오게나!”
만찬이 예정된 장소는 마즈의 지배자인 크루바의 저택이었다.
커다란 뱃살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크루바는 저택으로 들어오는 영웅들을 반겼다.
웃음꽃이 핀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지한이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커흠! 그렇게 보이나?”
“예. 그것도 아주 많이요.”
“커흐흠!!”
머쓱한 듯 괜히 헛기침을 해대는 크루바.
그러고도 입술이 씰룩거리는 그의 기분을 유지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꽤 좋은 광산을 가져가기로 했나 봐.’
다른 지배자들과 온종일 진행한 회의로 주인이 사라진 광산을 몇 개씩이나 차지했을 테니까.
사실상 이번 일을 통해 가장 많은 수확을 거둔 건 유지한과 접촉했던 마즈의 지배자들이었다.
“그나저나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다른 지배자들이 조금 늦는군.”
“그러겠죠.”
“음?”
“먼저 들어가 있어도 되죠?”
“어어, 들어가게! 따뜻한 차라도 준비하겠네.”
크루바가 하인에게 명령하여 끓인 차를 준비하는 사이.
유지한을 포함한 영웅들은 식당의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찍찍! 이거 맛있다!”
“차향이 되게 은은하고 좋아요.”
“마즈에서도 손꼽히는 최상품이라네! 카븜의 물건과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지.”
“집에 돌아갈 때 가져가고 싶을 정도야.”
“자네들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챙겨줄 수 있어.”
“여기 차 말고 술은 없나?”
“당연히 준비해뒀네!”
“느하하하! 이거 뭘 좀 아는 사람이로군!”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 가는 저택의 식당.
크루바는 직접 와타나베에게 술을 따라주기까지 하며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자네들, 하늘에 떠 있는 것들이 이상해진 것 같지 않나?”
“아, 저희도 느꼈습니다.”
“해는 점점 까맣게 변하고, 푸른 달도 하루 만에 둥글게 차오르고……. 큰 사건도 벌어졌던 만큼 찝찝해 죽겠군.”
“과거에는 없었던 현상이 맞죠?”
“내 평생 이런 하늘을 보는 건 처음이네. 급하게 축제를 준비하기도 어려운데 말이야.”
이만큼이나 요란한 하늘은 처음이라는 크루바.
그리고 만찬이 약속된 시간이 조금 넘어갔을 때.
식당에 입장한 마즈의 지배자는 오로지 크루바밖에 없었다.
“쓰읍, 말없이 늦을 사람들이 아닌데…….”
주변의 눈치를 보던 크루바가 저택의 집사를 호출하려던 그때였다.
강철 기사단장 크루거가 다급히 식당으로 들어와 크루바의 옆에 섰다.
“크루바 님.”
“무슨 일이지?”
“…….”
주인의 이름을 부르고도 말이 없는 크루거.
눈을 가늘게 좁힌 크루바가 재차 물었다.
“내가 방금 무슨 일이냐고 물었네만.”
“오늘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지배자분들께서……. 갑자기 전부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뭐?!”
화들짝 놀란 크루바가 크루거를 홱 돌아보았다.
바짝 굳은 표정의 크루거는 지금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사라졌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 다른 기사단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라서…….”
“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탄식하는 크루바.
그때 마침 찻잔을 비워낸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밥을 안 먹고 와서 배가 무척 고프네요.”
“……?”
“식사 시작하시죠.”
“아무리 그래도 다른 지배자들이 아직…….”
“다시 말씀드릴까요?”
지배자가 사라졌다는 소식에도 평온함을 유지하는 유지한.
식탁에서 맴도는 묘한 긴장감에 크루바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을?”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유지한은 손가락으로 식탁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 식탁에 더 앉을 사람 없을 것 같으니, 식사 시작합시다.”
만찬에 참석할 마즈의 지배자는 오직 당신 한 사람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