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전면전 (7)
유지한은 태양 위에 떠 오른 멸망의 징조를 힐끔거렸다.
카를렘에 처음 도착했던 시기보다 2배는 커진 검은색 점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멸망의 징조는 결국 태양을 집어삼켰다.
뱀파이어 카지미르는 그에게 말했다.
저 검은색 점이 점점 커지다 못해 태양을 완전히 집어 삼켜버렸다고.
즉, 멸망의 징조가 커진다는 건 카를렘에 멸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푸화아아아악——!!
땅속에서 지면 위로 튀어 오르는 흙의 창과 칼, 도끼 외의 수많은 무기들.
땅이 마치 무한한 무기고인 것처럼 끝도 없이 생성되는 마법 속에서.
유지한은 위협적인 마력을 품은 그것들을 실프의 바람으로 멀리 밀어내고, 무무의 힘을 이용해 다시 땅으로 되돌렸다.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어 상황이 소모전으로 흘러가자 데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 빌어먹을 놈!”
“방해받기 싫었다면, 우리를 건들지 말았어야지.”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며 짜증을 부리는 데서.
하지만 사실 유지한은 카를렘의 멸망과는 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악에 물든 데서가 마즈를 무너뜨리든, 레론을 무너뜨리든.
그건 처음부터 유지한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자신의 계획에 애꿎은 지구의 영웅을 끌어들였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영웅들이 데서를 막아서는 이유가 되었다.
“드워프와 쓸데없는 수다나 떠는 녀석보다, 내가 이 힘을 훨씬 더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단 말이다!”
“남의 힘을 훔쳐서 쓰는 주제에 욕심만 많아서!”
“닥쳐라!”
콰과과과과과과!
지면이 흔들리고, 균열이 일어나며 갈라지고, 그 균열의 크기가 불어나며 완전히 부서진다.
유지한이 밟고 있던 땅은 단 몇 초 만에 단단한 땅에서 모래사장으로 변해버렸다.
—끄떡없지롱!
“음믐믐!”
비슷한 공격에 당한 적이 있던 유지한의 발바닥과 다리에 정령들이 마력을 퍼부었다.
그를 덮치려는 흙더미는 그의 몸으로부터 밖으로 부는 바람에 튕겨 나가고.
그의 발바닥이 닿는 자리에만 모래가 단단하게 굳어지며 그의 몸을 지탱했다.
타닷!
정령들의 비호를 받는 유지한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땅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은 다각도에서 그의 이동을 방해했으나 모두 큐디의 파괴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져 갔다.
윤도하의 마력이 담긴 마법조차 드리미움을 쉽게 감당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쏙!
데서는 유지한과 가까워지기 전 땅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주변 땅에 미약한 지진을 일으키며 큰 마법을 준비하는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페이크군.’
유지한은 주저 없이 땅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진은 단순한 눈속임일 뿐.
데서가 전투로부터 벗어나 대피소를 먼저 노리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땅속에서는 내가 조금 불리해.’
유지한이 땅의 정령 무무와 계약을 맺었다고는 해도 아직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앞서 겪은 일처럼 윤도하의 마력을 통째로 가져간 데서와 그가 땅속에서 겨루는 건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믿는다.”
“응응!”
그렇기에 유지한은 땅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무무에게만 일임했다.
——전적으로 무무를 믿어.
그것이 윤도하가 그에게 들려준 조언 중 하나였다.
파바바바박!
정령사가 아니라 정령의 자유 의지에 따라 생성되는 땅굴.
무무는 열심히 땅을 파내며 데서를 쫓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고.
유지한은 녀석의 뚫어준 길을 따라 그저 달리기에 바빴다.
—크윽! 너무 분하다……!
실프는 굉장히 분해하며 유지한에게 달라붙는 모래들만 걷어내고 있었다.
유지한이 무무와 계약을 맺는 계기가 된 데서에게 다시금 분노를 불태우는 실프였다.
“저기!”
땅속에 먼저 들어간 데서는 대피소가 설치된 건물의 지하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땅 위에서는 영웅들이 자꾸 그를 막아서고 있으니.
아예 지하에서 지배자들이 모여 있는 대피소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가만 놔둘까 보냐!’
파바바바바박!
무무가 땅을 파내는 속도가 빨라지고, 유지한이 데서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갔다.
그가 다가오는 걸 알아본 데서는 혀를 차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유지한은 그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떨어져! 떨어지라고!”
끝도 없는 추격에 데서는 점점 목을 죄어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하나의 세력을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한 힘이다.
이런 대단한 힘을 지니고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입장이 되어버리다니!
스스로 인형이 되어 몸 안에 가득 찼던 자존심이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땅속을 제집처럼 자유롭게 오가던 데서는 양팔을 위쪽으로 깊게 쑤셔 박았다.
쿠과과과과과——!
데서가 팔을 뻗은 지점으로부터 커다란 지진이 발생하며 주변 일대가 뒤흔들렸다.
땅 위에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거나 무언가를 붙잡고 있었다.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이 주변 전체를 가라앉힐 속셈이었다.
“찾았다.”
스걱!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이 생긴 것으로 예상보다 빠르게 그에게 도달한 유지한은.
검을 길게 찔러넣어 데서의 골반 부근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어냈다.
검 끝이 튀어나오는 지점을 보고 데서가 순간적으로 흙을 조종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복부 정중앙을 뚫고 들어갔을 공격이었다.
“크어억!!”
약간의 상처를 감수할 생각이었던 데서는 생각보다 큰 고통이 밀려오자 신음했다.
윤도하의 본체는 분명 유지한의 검을 막아냈는데도!
그는 진짜 윤도하처럼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유지한은 허리를 부여잡는 데서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많이 아파 보인다?”
“이 노옴……!”
스르륵.
흙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사라져버리는 데서의 몸.
그에 호응하듯 유지한 또한 땅속으로 몸을 숨겼다.
쿵! 쿵! 쿵! 쿵!
서로가 맨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땅을 자유롭게 오가는 두 사람은 오직 마력으로 상대방을 감지하며 공격을 시도했다.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으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상황.
핏!
날카롭게 벼려진 흙의 칼날이 유지한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후 그의 몸에 자잘한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떨어진 그의 핏물을 본 데서의 입꼬리가 조금씩 휘어져 갔다.
파아아앗!
데서의 몸에서 터져 나온 윤도하의 마력이 땅 전체에 퍼져나갔다.
레이더처럼 퍼져나간 마력의 감시망에 잡힌 것은 실시간으로 그에게 접근해오는 무무와 실프의 마력.
교란 작전을 벌이려는 것인지 그와 비슷한 마력이 여러 곳에서 느껴졌지만, 데서는 속지 않았다.
“거기냐!”
꽈아악!
데서가 펼친 손바닥을 걸레를 쥐어짜듯이 접어버리자 상대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법이 적중했다고 생각한 데서가 그곳으로 이동했을 때.
“안녕.”
—우히히히!
“……?!”
그곳에는 오로지 무무와 실프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는 정령들을 보고 당황한 데서가 급히 다른 곳으로 벗어나려 했으나.
서걱!
데서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큐디의 날이 그의 왼쪽 다리를 잘라냈다.
“흐아아악!! 내, 내 다리가……!”
“사라져.”
뼈째로 잘려나간 다리는 이내 무무에 의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단단하게 뭉친 흙으로 의족을 만들어 착용한 데서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대, 대체 어떻게 숨어있던 거냐!”
“잘.”
——그 녀석, 아마도 정령에게 한 눈이 팔려 있을걸.
정령들의 마력을 일부러 여러 곳에 퍼트리는 것으로 유지한의 존재감을 흐릿하게 하고.
정령들과 거리를 벌린 유지한이 데서를 공격한다.
자기가 손에 넣지 못한 정령에 한눈이 팔려있을 거라는 윤도하의 의견으로 꾸민 공격이었다.
“말했잖아. 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이라고.”
“……!!”
자신만만하던 데서의 얼굴에 아주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
“음?”
“어라?”
이미아와 민유리가 상대하던 가짜 윤도하들은 마법을 사용하던 도중 몸을 움찔움찔하며 멈췄다.
인형들에게 일제히 공격 명령을 지시한 데서가 큰 상처를 입어, 그와 인형과의 연결이 불안정해진 것이었다.
[실드 배시]
칠라는 방패에 얻어맞고 쓰러지는 인형을 보며 말했다.
“찍찍! 이것들 맛탱이가 갔다!”
“때려눕혀!”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그저 빈틈을 내주는 인형들을 쓰러뜨리기에 바빴다.
퍽! 퍽! 퍽! 퍽!
살이 터지고, 뼈가 한두 개 부러지는 선에서 인형화로부터 벗어나는 사람들.
극미량의 자비가 섞인 공격 덕분에 그들은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어느 정도 인형들을 정리한 이미아는 민유리와 칠라를 데리고 유지한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시후야!”
“대장은 어디 갔냐! 찍!”
“데서랑 같이 밑으로 내려갔어요.”
땅밑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진동과 서로 다른 마력의 충돌!
아직 거인을 소환한 반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김시후는 마른 침을 삼키며 유지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푸화아아악—!!
땅속에서 유지한과 데서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수분을 머금은 흙을 주위로 퍼트리며 등장한 그들을 보고 다른 일행들의 눈이 커졌다.
유지한이 한 손으로 데서의 목을 꽉 움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앙!!
유지한은 데서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장비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낸 그는 다시 데서를 내려다봤다.
양쪽 다리가 모두 잘려나간 데서는 흙으로 새로운 의족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끄으으윽!!”
잔뜩 핏발선 눈으로 발작하는 데서.
싸늘한 눈으로 그를 보던 유지한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데서의 발작은 줄어들었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본래의 몸으로 돌아와라.”
“…….”
패배감에 휩싸인 데서는 인형화를 해제하고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기존의 인형들과 다르게 의식은 잃지 않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의족은 평범한 흙으로 변해버렸다.
“네가 인형으로 만든 사람들.”
데서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 유지한은 말했다.
“의식도 없고 마력이 닿으면 살이 검게 변하더군. 그게 인형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조건이겠지.”
“…….”
“넌 그걸 없애는 방법도 알고 있을 거야. 안 그래?”
마력 변색 증후군의 치료 방법을 알고 있는 데서.
하지만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그걸 너한테 알려줄 이유는 없다.”
“아니. 알려줘야만 해.”
“내가 왜?”
“그래야 살 수 있을 테니까.”
“……뭐라고?”
많은 인명을 해치고, 카를렘의 멸망을 꿈꿨던 자를 살려주겠다는 발언.
데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유지한은 진심이었다.
‘기억을 읽는 게 만능은 아니야.’
샘플링으로 데서의 기억을 읽어 들이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마력 변색 증후군을 치료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게 누구나 가능한 작업이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이건 저도 불가능해요. 재능의 영역이라서…….
당장 김시후만 하더라도 데서의 마법을 훔치고 연구해서 배운다고 한들.
자신이 데서만큼의 인형사가 되기는 힘들다고 선언했었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이득이 우선이다.’
데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로 기억되겠지.
2팀의 영웅 중에도 그의 인형에 공격당해 죽은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지한은 그가 저지른 범죄를 처벌하는 것보다.
민유리의 동생을 치료하는 걸 우선순위로 두고 있었다.
“앞으로 그 병을 치료하는 데 네 모든 시간을 써라.”
“……!”
유지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민유리가 덜컥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데서에게서 마력 변색 증후군의 치료 정보를 얻고 싶던 그녀였기에.
“살려주겠다는 걸 믿으라고?”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고 싶어?”
잘려나간 다리를 마력으로 간신히 지혈만 하던 데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자신이 정말로 살아남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그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 악랄한 죄인은 이곳에서 죽여야만 해!”
“처형! 처형이다!”
유지한의 뒤에서 마즈의 기사들이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기사단장들을 보며.
김시후는 굉장히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다들 왜 숨어있다가 지금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