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전면전 (6)
유지한은 반쯤 누워있는 윤도하의 앞에서 자세를 낮췄다.
데서가 자기 자신을 인형으로 만든 직후.
힘없이 누워있던 윤도하의 눈은 정확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네가 왔었어.”
“정신이 드신 겁니까?”
“그런 것 같네.”
눈을 뜬 윤도하는 양쪽 눈알을 빙빙 굴렸다.
몸을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겁니까?”
“응. 기분이 아주 더러워.”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건 목 위의 얼굴뿐이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상반신과 하반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력 변색 증후군……!”
한편, 김시후가 손으로 만진 윤도하의 팔과 어깨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윤도하가 지금 마력 변색 증후군에 걸려있다는 증거였다.
‘그 병에 걸리고도 의식이 있다고?’
마력 변색 증후군을 앓고도 의식을 유지하는 인간이라니.
상식을 뛰어넘는 능력에 유지한은 혀를 내둘렀다.
이 얼마나 강인한 정신력인지.
“그 친구 상태는 어때?”
“자고 있어요.”
“다치지 않게 잘 챙겨줘.”
윤도하는 걱정되는 눈으로 김시후에게 안긴 어린 드워프를 바라봤다.
그가 데서에게 사로잡힌 원인이 된 드워프였다.
사실상 이 사달이 벌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지만.
그는 끝까지 신세를 진 인물을 지켜내고 싶었다.
“그놈이 내 힘을 가져갔구나.”
의식을 되찾은 윤도하는 유지한 일행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정확한 경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딱 하나만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욕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데서가, 끝내 그의 힘을 얻었다는 걸.
“그게 가능한 겁니까?”
마력은 기본적으로 단일 생명체에게 귀속되는 것.
정령과 인간 사이의 계약처럼 아주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면.
다른 이의 마력을 아무런 부작용 없이 몸으로 받아들이는 게 가능한 존재는 없었다.
“선천적인 능력에 더해 큰 위험을 감수하면 가능성은 있었겠지.”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던 건가…….”
인형을 제작하고 조종하는 데 특화된 데서의 능력.
인형 제작에 사용되는 문양을 자기 몸에 미리 새겨놓았던 걸 보면.
그는 처음부터 계획이 이런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리라.
“음믐믐! 도하.”
“재경이는 무사하지?”
“응. 구했어.”
윤도하가 마지막으로 내렸던 명령.
박재경의 보호를 완벽하게 수행한 무무였다.
“지한. 무무는 너와 계약을 맺은 건가?”
“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임시로 맺은 계약이니까.”
“탓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라고.”
윤도하는 유지한이 무무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2마리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유지한이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이런 처지만 아니었다면 신나게 연구를 하자고 했을 텐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알아. 그놈을 쫓아가려는 거잖아.”
데서의 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윤도하 본인의 마력이 가득 차 있었다.
윤도하의 분신과도 같은 생명체로 변해버린 데서.
따라서 이 순간, 윤도하만큼 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 머리카락을 만져봐.”
“……?”
유지한은 조심스럽게 윤도하의 앞머리를 만졌다.
그러자 얇은 머리칼을 타고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고작 머리카락으로 선보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도 강렬한 마력이었다.
“이게 뭡니까?”
“무무의 마력으로 이걸 똑같이 따라 해.”
“예?”
“굳이 머리로 이해할 필요는 없어. 계산은 끝내뒀으니까.”
유지한은 조금 의문이 담긴 얼굴로 윤도하의 요청을 수행했다.
달아난 데서를 두고 조급해진 마음 때문인지 한두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
그의 눈앞에서 새로운 마법이 펼쳐졌다.
[웨이브 오브 그라운드]
꿀렁!
평평하던 바닥이 거친 파도처럼 울렁이더니.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몸을 앞쪽으로 쭉 밀어냈다.
김시후는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어? 부딪혀요!!”
“안 부딪혀.”
하지만 앞을 가로막던 벽은 좌우로 쩍 벌어지며 그들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후 그와 똑같은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며 모두의 몸은 무섭도록 빠르게 나아갔다.
그때 윤도하가 말했다.
“이동하는 동안 짧은 강의를 해줄게.”
“예?”
“내 마력을 가져간 놈이야. 나보다 그놈을 잘 알고 있을 수는 없지.”
윤도하는 데서를 사냥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띄웠다.
*****
고지대에서 장거리 저격을 이어나가던 민유리는 또다시 지면으로부터 자그마한 지진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인형들이 등장할 때와 달리 지진의 세기가 커지기만 하자 그녀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내려가자!”
“찍찍!”
결국 그녀는 바닥에 고정된 활을 챙겨서 칠라와 함께 아래로 뛰어내렸다.
방패를 발밑에 깔고 경사진 벽을 썰매처럼 타는 칠라의 등 위로 그녀가 올라탔다.
“찍? 주인아! 저게 뭐냐?”
방패 썰매를 타던 칠라의 시선이 바닥 어딘가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향했다.
이윽고 구멍의 지름이 더 커지고, 그 안에서 윤도하의 얼굴을 가진 인간이 튀어나왔다.
푸슝!
윤도하를 발견하자마자 재빠르게 활을 들어 올린 민유리가 주저 없이 마력 화살을 쏘아냈다.
하지만 그 화살은 목표를 닿지 못하고 뜬금없이 위로 툭 튀어나온 흙기둥에 처박혔다.
“크핫! 찾았다.”
“……!”
지금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가짜 윤도하가 말을 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지배자들이 숨어있는 대피소.
불길함을 느낀 민유리가 활을 조준하자 그의 손바닥이 민유리를 향해 뻗어졌다.
콰앙!
“꺄악!”
“찍—!!”
땅속에서 폭탄이 터지는듯한 충격과 함께 칠라와 민유리의 몸이 하늘 위로 높게 떠 올랐다.
민유리는 어떻게든 칠라의 털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넌 또 뭐야?”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려온 이미아가 재차 공격을 시도하려던 가짜 윤도하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발차기가 너무나도 쉽게 막혀버리자, 그녀는 이번 상대가 매번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던 인형들과 다른 분위기를 가졌다는 걸 알아보았다.
매우 정적인 태도인 인형들과 달리 아주 생기가 넘치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네가 데서?”
“오! 날 알아보는 건가?”
“죽어!”
“매너가 꽝인 여성이로군.”
쾅! 쾅! 쾅! 쾅!
이미아의 단단한 주먹이 데서를 보호하는 흙벽을 두드렸다.
때릴 때마다 격렬한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흙의 파편들.
하지만 단 한 차례도 유효타가 들어가지는 못했다.
“읏!”
되레 이미아의 주먹에 날카로운 흙알갱이가 파고들려고 할 뿐이었다.
“아주 재밌는 걸 보여주지.”
[그라운드 캐논]
콰과과과과과!
바닥에서 솟아오른 수많은 흙알갱이가 커다란 대포의 형체를 이뤘다.
데서가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마법이었다.
“아니……!”
포신으로 대량의 황색빛의 마력이 모여들자 이미아의 표정이 급변했다.
대포가 발사되려는 방향이 지배자들이 모인 대피소였기 때문이었다.
저런 공격을 맞았다가는 대피소가 건물째로 소멸해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기사단장들이 마즈의 지배자들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한들, 대처 방법을 찾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당장 멈춰!”
“으하하하!”
퍼엉——!
대포에서 한 점으로 집약된 마력의 포탄이 튀어나왔다.
황색빛 마력을 본 이미아가 경악하며 앞으로 달려갔으나, 포탄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때 포탄이 날아가는 곡선의 탄도 사이로 민유리의 마력 화살이 등장했다.
[형태 변화 - 젤리]
아주 작은 크기였던 화살은 순식간에 커다란 젤리로 모습을 바꿨다.
폭신하고 탱탱한 젤리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덩어리였다.
토옹!
마력이 가득 담긴 포탄이 그 젤리에 닿았으나, 젤리가 충격을 흡수한 덕분에 포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리고 경로가 크게 뒤틀린 포탄은 대피소 건물을 지나쳐 그대로 옆으로 빠져버렸다.
콰아아아앙——!
바닥에 떨어진 포탄은 굉음을 발생시키며 터져버렸다.
커다란 진동과 함께 생겨난 구멍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그 위력을 실감케 했다.
“저걸 빗겨나가게 하다니……!”
데서는 활을 든 민유리를 바라보며 으르렁댔다.
그가 고개를 살짝 까닥거리자 바닥에서 튀어 오른 흙더미가 민유리를 노렸다.
민유리는 상반신을 뒤로 크게 꺾으며 공격을 피했지만.
데서가 노렸던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활이었다.
‘안 떨어져!’
흙에 붙들린 활이 떨어지지 않자 입술을 깨문 그녀는 유지한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목걸이의 체인에서 떨어져 나온 검 모양의 장식은 곧바로 그녀의 손에 맞는 크기로 변했다.
‘한 번 더!’
그리고 데서가 계속해서 달라붙는 이미아를 피해 대포의 재장전을 시도하려는 찰나.
파앗!
어느새 그를 뒤따라온 유지한과 김시후가 지면 아래에서 위로 등장했다.
그중에서 김시후는 지팡이를 들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신병의 약속]
허공에 거대한 타원이 생성되어 그 안에서 거인의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윤도하의 마력을 얻고 자신감으로 가득 찬 데서마저도 도저히 얕볼 수가 없는 마법이었다.
슈와아아아악!
땅으로 내려온 거인의 손가락은 포탄을 쏘아낸 [그라운드 캐논]을 그대로 짓눌렀다.
형체가 완전히 일그러진 대포는 마력이 주위로 분산되며 끝내 사라져버렸다.
뒤이어 눈을 날카롭게 치켜뜬 김시후가 거인으로 데서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부족하다.]
“윽!”
기괴한 목소리와 함께 거인의 손가락은 타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김시후는 몸에 무리가 온 듯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죽여주마!’
빈틈을 발견한 데서는 김시후가 재차 마법을 사용하기 전 그를 죽이려고 들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단연코 거인을 다루는 김시후였기에.
“무무!”
쿵!
하지만 유지한은 무무를 이용하여 요동치는 땅을 잔잔하게 되돌렸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데서는 김시후 인근의 땅을 제어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 녀석……!”
“음므믐……!”
쿠궁! 쿠구궁!
쿠궁! 쿠구구궁!
하나뿐인 땅의 제어권을 두고 마력으로 씨름하는 무무와 데서.
그에 따라 바닥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다시 하나로 붙기를 반복했다
의식을 차린 윤도하의 존재 덕분에 무무는 전보다 더 힘을 내는 모습이었다.
‘인형들이 오는군.’
그때 유지한의 눈에 점점 가까워지는 진실의 실이 보였다.
다른 인형들이 조금씩 대피소로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이미아! 유리 씨와 함께 인형들을 막아!”
“알았어.”
이미아는 민유리를 데리고 자리를 이탈하여 인형들에게 달려갔다.
대피소 인근의 기사들만으로 막아내기에는 벅찬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기회다!’
2명의 영웅이 사라지자 데서는 눈을 번뜩였다.
헐떡대는 김시후를 죽이는 것마저 포기한 그는 본래의 목적이었던 대피소를 바라봤다.
그곳에 모인 지배자들과 와타나베가 보호 중인 지배자들을 죽이는 것에 성공한다면, 마즈의 모든 지휘 체계를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손짓 한 번이면 지배자들을 없애버릴 수 있어……!’
마즈 다음에는 카븜, 카븜 다음에는 레론.
3대 세력을 모두 무너뜨린 뒤, 날 무시했던 레론 왕가에 치욕적인 죽음을 선사하리라.
그걸 이뤄낼 수 있는 힘은 데서의 몸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날 방해하는 거냐——!!”
마지막까지 그의 앞을 막아서는 남자.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유지한 한 사람이.
데서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