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전면전 (5)
수많은 명검을 탄생시킨 장인의 공방에는 무릇 그에 걸맞은 자재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미숙한 대장장이가 장인의 공방에 들어간다고 한들, 마트에서 파는 식칼만도 못한 초라한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유지한은 눈앞의 데서를 보며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1급 영웅 윤도하라는 최고의 재료 또는 무기를 얻었으나.
그를 다루는 사용자 데서의 능력은 거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윤도하라면 자기가 밟고 있는 땅에서 이런 빈틈 따윈 주지 않아.”
“닥치라고 했다……!”
“싫어.”
데서는 유지한을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그는 한때나마 레론의 왕실마법사 자리까지 올라섰던 인물!
카를렘의 많은 마법사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봤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한낱 전사 따위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사람과 비교가 되는 걸 어떡하겠냐.”
“……!”
하지만 유지한은 데서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의 시선을 마주 보는 데서의 마음속에서는 커다란 불쾌감이 일었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 따위는 없고, 매우 거북하면서도 낯익은 시선!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라.”
그것은 그가 과거 왕실마법사의 자리에 올라섰을 때.
레론 왕가의 사람들이 그에게 보여줬던 시선과도 비슷했다.
——호오? 인형을 다룰 줄 안다고?
어린 시절부터 인형을 갖고 놀기를 좋아했던 데서.
우연한 기회로 마법사가 된 그는 특히 마력이 깃든 재료를 이용하여 인형을 제작하고 다루는 일에 능숙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인형은 바로 전투 인형이었다.
그가 한 땀 한 땀 공들여 제작한 전투 인형은 레론의 뛰어난 기사들과 맞붙어도 승률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선대 왕실마법사의 추천으로 새로운 왕실마법사가 되었던 데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내지 못했다.
——인형? 고작 그런 힘으로 왕실마법사가 된 건가?
——자네의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군.
——부디 레론의 이름을 더럽히지만 말게나.
——쯧쯧! 우리 마법사들의 수준이 어디까지 내려갈런지…….
데서가 머물던 왕궁 안에서 그를 존중하는 인물은 없었다.
은근한 핍박과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왕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순간의 두근거림과 기대감이 사라지는 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쉽게 물러서지 않았던 이유는.
마법사로서의 긍지와 자신의 고향인 레론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레론을 위해 모든 노력을 쏟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그의 뒤를 봐주던 선대 왕실마법사가 갑자기 사망하고.
그의 어머니도 사고에 휩쓸려 돌아가신 이후 데서의 컨디션은 급격히 악화됐다.
그 시기 귀족들의 견제도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자리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고심 끝에 왕실마법사를 교체하기로 했네.
좋지 않은 여론의 영향으로 왕이 왕실마법사를 교체하겠다고 선언한 날.
데서는 결국 레론에 남아있던 작은 미련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스승과 가족, 그리고 명예까지 잃어버린 그에게 남은 건.
자신을 버린 레론을 향한 복수심뿐이었다.
“그딴 눈으로 날 보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데서를 지그시 바라보는 유지한.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린 데서는 자신의 지팡이를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쿠르르르르!
데서가 제작한 혼돈들이 땅속에서 솟아올랐다.
분홍색 피부와 파란색 피부를 가진 동물들을 이리저리 꿰매 제작한 인형.
사람 팔뚝만 한 길이의 발톱을 보유한 놈들은 매우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끼리릭!!
반쯤 앞으로 튀어나온 눈알을 굴려대는 녀석들이.
유지한과 김시후를 향해 점프했다.
‘단순해.’
유지한에게는 그 움직임이 다소 뻔하게 보였다.
그는 두 발자국 가볍게 물러나는 것으로 혼돈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난 뒤.
땅으로 떨어진 녀석들의 몸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투두두둑!
서로 다른 동물의 피부를 촘촘하게 꿰맨 부위가 큐디에 의해 부드럽게 뜯겨나갔다.
큐디가 전해준 녀석의 약점은 왼쪽 무릎.
아직도 몸을 꿈틀거리는 놈의 무릎에 검을 찔러넣자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제가 맡을게요!”
어린 드워프를 데리고 있던 김시후가 등장한 혼돈들을 처리하기 위해 지팡이를 들었다.
그에 유지한은 길을 막아선 혼돈들 사이로 경로를 탐색했다.
<—혼돈을 뚫고 데서에게 도달하는 경로>
샘플링이 제공하는 흐릿한 잔상들이 혼돈의 사이를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열심히 발을 놀리던 유지한은.
중간에 벽을 밟고 날아가는 경로를 선택하여 땅을 박찼다.
팡!
바람을 타고 데서를 향해 대각선으로 날아가는 유지한의 몸.
데서는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윤도하를 앞세웠다.
콰아앙—!!
큐디의 날은 바닥에서 솟아오른 단단한 흙기둥을 푸딩처럼 잘라내고.
마력을 두른 윤도하의 손바닥과 충돌했다.
‘상처 하나 없다니!’
유지한은 맨손으로 큐디를 막아낸 윤도하의 능력에 감탄하는 한편.
검날에 바람의 오러를 둘러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상대의 마력을 깎아내는 힘을 가진 신비한 오러였기에.
윤도하라도 영원히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을 터였다.
“기묘한 오러로군!”
눈을 감고 오로지 윤도하의 시선을 통해 유지한과 맞붙은 데서는.
이대로 공방이 길어지면 자신이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짝!
조종당하는 윤도하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손뼉을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유지한이 서 있는 위치의 바닥이 위로 떠 오르고, 천장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왔다.
유지한을 바닥과 천장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찍어누르려는 것이었다.
“합!”
유지한은 솟아오르는 땅을 큐디로 베어 급히 자리에서 이탈했다.
뒤이어 위협적으로 울렁이는 땅을 피해 옆으로 뛰었다.
카가가가가가!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날카로운 원뿔 형태의 기둥이 치솟아올랐다
단순히 흙이 만들어진 원뿔이 아니다.
무려 1급 영웅의 마력이 깃든 원뿔이었다.
그 끝에 몸을 스치기라도 한다면 장비에 큰 손상이 가거나 살이 찢어지는 건 각오해야만 했다.
“위대한 힘에 무릎 꿇어라!”
데서는 조종 중인 윤도하의 손바닥을 앞으로 뻗게 했다.
카가가가각!
카가가가가가가—!
바닥과, 벽, 천장에서 온갖 각도로 튀어나오는 원뿔들.
그것들은 모두 유지한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노리고 있었다.
“후우우!”
하지만 원뿔의 끝은 유지한이 이미 지나간 자리를 찌를 뿐이었다.
끝도 없이 생겨나는 원뿔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유지한의 몸놀림.
그는 마치 공격이 어디에서 등장하여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윤도하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도 그럴 것이.
공격을 피하는 방법은 샘플링이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음믐믐!!”
그때 김시후를 돕던 무무가 자리에 등장한 원뿔들을 모두 날려버리자.
반격의 타이밍을 재고 있던 유지한은 돌진기를 사용하여 앞으로 몸을 던졌다.
[에어 러쉬]
유지한이 흙먼지가 가득한 공기를 뚫으며 직선으로 올곧게 나아갔다.
그런데 그가 윤도하와 매우 가까워지기 직전.
끝까지 윤도하를 바라보던 유지한은 급격하게 몸의 방향을 틀어 뒤에 숨어있던 데서에게 향했다.
“……!”
윤도하의 시야에만 집중하던 데서가 급하게 눈을 떴다.
벌써 거리를 좁혀온 유지한은 그의 앞에서 검을 휘두르려는 상황!
데서는 황급히 발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대체 어느 틈에 속박을?!’
그의 발바닥은 바닥에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았다.
데서가 인형 제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지한이 그의 발을 땅에 묶어둔 것이었다.
“칫!”
다리에 아무런 느낌조차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이뤄진 속박.
달아날 방법이 사라진 데서는 자신의 목걸이에 마력을 집중했다.
카앙!!
팔찌를 중심으로 생성된 반투명한 보호막이 유지한의 공격을 튕겨냈다.
유지한은 은은하게 빛나는 데서의 목걸이를 바라봤다.
상당한 수준의 방어 마법이 탑재되어 있는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을 테지.’
진한 오러가 담긴 공격을 튕겨낼 정도로 단단한 방어 마법이었다.
신비의 나무인 플로른이나 드리미움 급의 소재가 양껏 사용된 게 아닌 이상, 그런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는 횟수가 제한되는 등 사용 조건이 까다롭다.
소모되는 마력도 많으니 오래 유지할 수도 없을 터.
[투명화]
생각을 마친 유지한은 마법으로 몸을 숨긴 뒤.
둥글게 보호막이 전개된 데서의 주변을 돌면서 공세를 이어갔다.
캉! 캉! 캉! 카앙!!
매우 위협적인 검격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데서의 보호막을 두드렸다.
공격을 튕겨낼 때마다 불꽃이 튀기며 보호막 전체가 빠르게 진동했다.
데서는 그 공세 속에서 침착하게 윤도하를 조종하여 유지한과 맞섰다.
투명화를 사용했더라도 윤도하의 시야로는 얼마든지 그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런!”
하지만 데서는 유지한을 제압하거나,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윤도하가 손을 한 번만 앞으로 뻗으면 그가 잡힐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신들린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가 자꾸만 그 손아귀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보호막이 곧 깨진다!’
아티팩트의 방어 마법은 오랫동안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순간, 데서의 마음속으로 후회심이 밀려 들어왔다.
지배자들에게 접근을 시도한 시기가 너무 빨랐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나.’
사라지기 직전의 보호막을 보며 데서는 표정을 굳혔다.
큰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도박을 시도할 차례.
곧이어 그가 품에서 작은 붓을 꺼내들었다.
인형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전용 붓이었다.
촤락!
그는 로브 속에 감춰져 있던 왼팔을 드러냈다.
그 왼팔을 본 유지한은 잠깐이나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레론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데서의 왼팔 전체에 수도 없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슥슥.
미완성이었던 손목의 문양을 데서가 붓으로 덧그려 완성했다.
그러자 그를 감싸던 보호막이 사라지며 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지금!’
유지한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데서에게 달려들었다.
지나치게 거친 움직임 탓에 투명화가 풀려버렸지만 상관없었다.
이번 공격으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콱!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데서가 큐디의 날을 손으로 잡아냈다.
그 즉시 큐디를 회수하려던 유지한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검을 두고 눈을 크게 떴다.
땅에 아주 깊숙하게 박혀있는 돌을 당기는 느낌이었다.
“완성이다.”
그리고 데서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윤도하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이건 인형이잖아!’
유지한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형사 데서가 자기 자신을 인형으로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인형이 된 데서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가짜 윤도하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윤도하의 본체와 한없이 가까웠다.
“그래……! 이걸 원했어! 이 굉장한 마력을 보라고! 으하하하학!”
전신을 감싸는 마력에 흠뻑 취해버린 데서가 경쾌한 웃음을 흘렸다.
일반인이나 평범한 마법사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윤도하의 마력!
거기에는 빠져들 것만 같은 중독성이 있었다.
과거에 이런 힘을 갖고 있었다면, 그가 레론에서 쫓겨나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으리라.
퍼어억!
그때 바닥에 흙으로 만들어진 원기둥이 예고 없이 튀어나오더니.
살짝 굳어있던 유지한의 상반신을 세게 때렸다.
“이런……!”
—지한!
양팔로 원기둥을 막아낸 유지한의 몸은 기둥이 튀어나온 방향으로 짧게나마 하늘을 날았다.
실프의 도움을 받아 자세를 다잡은 그는 서둘러 데서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허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이라고 했던가?”
“……!”
콱!
데서가 등장한 곳은 유지한의 발밑이었다.
얼굴과 한쪽 팔만 땅 위로 드러낸 그는 유지한의 발목을 붙잡고 땅속으로 끌고 가려 했다.
“멈춰.”
쿠구구궁!
그러나 김시후에게 붙어있던 무무가 유지한으로부터 데서를 멀리 떨어뜨렸다.
윤도하의 얼굴로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띤 데서는 말했다.
“역시 땅의 정령이로군. 너까지 가질 수 있었다면 일이 훨씬 더 쉽게 풀렸을 텐데…….”
“음믐믐! 꺼져.”
“하지만 마즈를 무너뜨리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데서가 다시 땅속으로 몸을 감췄다.
유지한은 발끝에 신경을 집중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의 몸은 이곳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지배자들에게 가는 건가!’
데서가 윤도하의 본체까지 내팽개치고 이동하는 방향은 지배자들이 숨어있는 대피소였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카를렘을 지배하는 3대 세력의 멸망!
영웅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마즈를 먼저 무너뜨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부쩍 늘어난 마력 덕분에 숨어있는 지배자들을 수월하게 찾아낸 모양이었다.
‘당장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데서의 의도를 파악한 유지한이 김시후를 챙겨서 이동하려던 순간.
김시후가 먼저 그를 호출했다.
“형!”
“어?”
“여기, 도하 씨가…….”
김시후는 양손으로 윤도하의 몸을 부축했다.
“여어, 지한.”
“……!”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윤도하의 입에서.
메마른 땅처럼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