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전면전 (4)
극도의 집중 상태를 유지하던 김시후가 지팡이를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누군가에게 신으로 오해받은 거인의 손가락은 지팡이의 궤적을 따라 땅에 그대로 내려꽂혔다.
콰앙!!
손가락의 굴곡처럼 둥글게 파여버리는 땅바닥.
그 충격이 주변에 끼치는 영향은 유지한의 생각보다는 작았다.
그때 거인의 손가락에서 굵은 나무줄기들이 꿈틀거리더니 손가락을 빠져나와 땅에 내려앉았다.
휘리릭!
날쌘 동물처럼 땅을 기어가는 나무줄기는 가짜 윤도하들의 몸을 옭아맸다.
자신의 팔다리와 목을 조여오는 나무를 두고 몸부림치는 그들.
하지만 연필 굵기의 가느다란 나무줄기는 무슨 힘이 그리도 강한지, 절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효과 죽이네!”
유지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주변을 쏘다니며 움직임이 봉쇄된 가짜 윤도하들을 제압했다.
큐디의 약점 분석 능력으로 문양이 그려진 위치를 찾아낸 뒤 그 문양을 피부 채로 아주 얇게 도려내는 것이었다.
찌지직!
엉덩이, 발목, 사타구니 등 온갖 부위에 그려진 문양을 강제로 떼어내길 수차례.
물리적으로 제거된 문양 덕분에 데서의 인형이 되었던 이들은 1명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이놈이 마지막이군.”
인형화가 풀려 마력 변색 증후군으로 쓰러진 인간이 총 12명.
유지한은 마지막으로 남은 가짜 윤도하의 손바닥에 그려진 문양을 찢었다.
그로써 모든 인형들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스르륵.
할 일을 마친 나무줄기가 인간들의 몸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
그것들은 아직 김시후를 떠나지 않은 거인의 손가락으로 회수되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이후 거인의 손가락은 천천히 땅에서 떨어지더니, 공중에 떠 있는 타원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지한은 그 아래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
—히익! 쟤 뭐야?!
커다란 타원이 거인의 손가락을 모두 집어삼켰을 때.
유지한과 실프는 사라지기 직전의 타원 속에서 거대한 존재와 눈을 마주쳤다.
와타나베가 뛰어난 영웅을 두고 거인이라 비유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거인의 등장이었다.
‘저게 본체인가!’
발끝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온몸에 존재하는 털이란 털이 몽땅 쭈뼛 곤두서는 기분!
콱!
유지한은 큐디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지만.
그를 바라보는 거인의 눈빛에 적의 따위는 없었다.
뒤이어 나무줄기로 이뤄진 타원의 테두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지는 순간.
유지한을 바라보던 거인의 눈동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에 집중하는 김시후를 향했다.
[나는 기다린다.]
기괴한 목소리를 남긴 거인이 허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철근처럼 무거웠던 공기가 마침내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에 유지한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 진 빠지네…….”
성공적으로 마법을 끝낸 김시후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유지한은 곧장 그에게 달려갔으나, 그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몸 상태는?”
“현기증만 조금 있어요.”
“다른 건?”
“당연히 멀쩡하죠.”
이전처럼 기절하거나 코피를 쏟지도 않는 김시후.
단지 약간의 현기증 증세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보다 방금 거로 마력 엄청 빨렸어요!”
“예상했던 거잖아.”
“예상치를 훌쩍 넘어갔단 말이에요.”
김시후는 마력을 생각보다 더 많이 사용했다며 투덜거렸다.
자기가 만들어낸 결과에 생각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으악!”
“잔말 말고 가자.”
유지한은 김시후의 이마에 딱밤을 후려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살짝 울상이 된 김시후는 그 뒤를 따랐다.
*****
“……괴물은 따로 있었군.”
한 번에 10구가 넘는 인형들을 잃어버린 데서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들린 움직임을 보여주는 유지한을 괴물처럼 여겼었는데.
인간이 아닌 진짜 괴물은 공중에서 툭 튀어나왔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장시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은 아니라는 것.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인형과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인형의 힘과 인형을 조종하는 데서의 연결 또한 강해진다.
어느 집단이든 윗사람을 잃으면 그 아랫사람들은 모두 혼란에 빠질 것이기에.
지배자들을 가장 먼저 처리하고자 최대한 그들의 흔적을 쫓아서 근처에 자리 잡았던 데서였다.
하지만 그들 옆에는 마즈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영웅들 또한 존재했다.
지배자를 죽이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동시에 데서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이기도 한 것이었다.
‘흥분하지 마라, 데서! 계획은 아직까지 순조롭다.’
눈을 감고 인형들과 시야를 공유하는 데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즈 전체에서 이뤄지고 있는 인형들의 공격.
전황을 넓게 바라봤을 때 각 지역에 위치한 기사들은 데서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했다.
민간인의 피해도 제법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한과 김시후만큼 반격이 거센 곳은 와타나베가 직접 지휘하는 지역밖에 없었다.
‘드워프가 꽤 도움이 됐지.’
—사람 살려!
—끄아아아……!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인형의 눈을 통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인간들에게 실망하여 이 계획에 가담한 드워프들이 조력을 더해준 광산 인근은 다른 곳보다 피해가 훨씬 컸다.
광산의 드워프들 사이에서 바람을 잡아주는 것으로 인형이 도시로 침투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었다.
“그 하등한 것들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단 말이야.”
다만, 안타깝게도 데서는 드워프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
이종족을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바라보는 건 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역사 속 노예처럼 다뤄지는 드워프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겠다는 건 허울뿐인 약속이었다.
‘기사들만 없었어도 지금쯤 3개 이상의 지역을 함락했을 텐데!’
인형이 등장할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적절한 위치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기사들.
그들만 없었더라면 데서는 지금쯤 자신이 활짝 웃고 있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기랄, 역시 저놈이 문제야……!”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 드는 지배자들의 습성은 데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찮은 마즈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지금의 공격들을 대비했겠는가?
이 자리에서 방해꾼으로 활약하는 유지한.
인형들을 정확히 찾아내는 그자 때문이라는 걸 데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는군.”
데서와 유지한 사이의 거리는 좁혀져만 갔다.
같은 높이를 가진 땅 위에 서 있다면 눈으로도 어렵지 않게 식별이 가능한 거리.
보이지 않는 땅속에 몸을 숨긴 데서는 여러 인형들의 시야를 오가며 그의 이동을 주시할 뿐이었다.
‘어디지?’
그리고 인형으로부터 떨어진 유지한과 김시후의 움직임을 잠깐 놓쳤을 때.
쿠구구구……!
데서가 숨어있던 땅굴이 세차게 뒤흔들렸다.
*****
파바바바박!
일부러 명령하지 않아도 혼자서 열심히 땅을 파고드는 무무.
유지한과 정령들에게만 보이는 진실의 실은 그 밑으로 쭉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밑이에요?”
“그래.”
“으랏차차!”
파바바박!
김시후는 지팡이를 삽처럼 휘두르며 무무의 땅파기를 거들었다.
순식간에 고층 건물만큼이나 깊어지는 깊이.
그런 가운데 유지한은 쫓고 있던 한 가닥의 실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저쪽으로!”
“음므믐! 음믐믐!”
실의 작은 떨림으로 유지한은 그들이 도망가려는 방향을 짚어냈다.
윤도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무무는 더 정신없이, 더 거칠게 움직이며 땅을 파냈다.
“음?”
그들은 잠시 후 흙이 없는 커다란 공동에 도착했다.
유지한은 울퉁불퉁한 굴곡이 가득한 공동의 벽을 손으로 짚었다.
벽을 통해 잔잔한 떨림이 그에게 전해졌다.
‘넓어지고 있다.’
데서는 이 자리에서 달아나려는 것인지.
인위적으로 생성된 이 공동은 실시간으로 넓어지고 있었다.
“무무. 이 공간 전체를 굳힐 수 있겠어?”
“음믐믐!”
파아아앗!
무무의 몸으로부터 밝은 황색빛 마력이 터져 나오며.
그 마력이 주변 전체로 스며들었다.
깡! 깡!
손으로 두드리면 쇳소리가 들릴 정도로 단단해진 바닥과 벽.
공동의 진동은 계속됐지만 그 세기는 매우 약해졌다.
땅을 파내는 데 차질을 겪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지한과 김시후가 앞으로 달려간 끝에.
“네놈들이 기어코 여기까지……!”
그들은 인형사 데서와 처음으로 마주칠 수 있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인형의 기억으로부터 그를 봤던 유지한은 어째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차원 전화기를 꺼내든 유지한은 전화기에 입을 대고 말했다.
“와타나베 님. 그놈 찾았습니다.”
—승산은?
“어림잡아 98% 정도로 하죠.”
—느하하하하!! 그럼 맡겨두마!
말을 딱 2번 주고받는 것으로 간략하게 마무리된 통화.
그들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걸 인지한 데서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감히 위대한 마법사를 앞에 두고 그딴 말을 해?”
“위대한 마법사? ……아, 이 친구를 말하는 건가?”
“엥?”
유지한은 손으로 김시후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데서는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만한 놈이었군.”
“이건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
가만히 눈을 응시하며 대치하는 세 사람.
폭탄의 도화선이 소리 없이 타들어 가는 때.
그 사이로 실프가 끼어들었다.
—야! 네가 데서냐?
“……?”
—넌 뒈졌어.
쏴아아아아!
데서를 만나자마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실프가 강한 돌풍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머리칼을 세차게 휘날리던 돌풍은 이내 한곳에서 모여 둥글게 회전했다.
[더티 토네이도]
흙, 모래 따위의 이물질이 잔뜩 섞인 작은 회오리가 된 바람이 데서를 덮쳤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크기는 작아도 한 인간의 몸 정도는 찢어발길 위력이 있는 마법이었다.
쿠궁!
하지만 바닥에서 위로 솟아오른 커다란 흙기둥이 회오리를 무력화시켰다.
그 직후 데서의 뒤에서 윤도하가 걸어 나왔다.
“……!”
“어?”
“음믐믐?!”
유지한은 순간 몸을 움찔했다.
진실의 실이 정수리로 이어지는 윤도하의 인형.
하지만 그건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윤도하의 본체였다.
상대의 반응을 본 데서는 우쭐거렸다.
“왜 그러지? 내가 두려운가?”
“어떻게 본체를 조종하는 거냐?”
“큭! 설마 이 정도 준비도 없이 직접 나섰을 거라고 생각하나?”
만들어낸 인형과는 격이 다른 마력을 지닌 윤도하의 본체.
함정에 빠진 건 데서인가, 아니면 나인가.
유지한은 제법 긴장한 얼굴로 윤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도하를 제압하는 방법>
윤도하가 적이 되었다면 제압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을 터.
끝내 샘플링을 사용한 유지한의 눈앞에 흐릿한 잔상이 펼쳐졌다.
‘……벽?’
데서와 윤도하에게 직접 달려드는 잔상이 하나.
그리고 난데없이 손으로 벽을 가리키는 잔상이 하나.
유지한의 눈은 잔상이 가리키는 벽으로 향했다.
안쪽으로 유독 볼록하게 솟아오른 벽이었다.
‘수상하다.’
조잡하게 제작된 공동 속에서 유독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위.
그가 무무에게 슬쩍 눈짓하자 그 뜻을 이해한 무무가 땅속으로 쏙 들어갔다.
퍼버벅!
벽을 파헤친 무무가 안쪽에 발견한 건 나이가 어린 드워프였다.
“트레인!”
무무는 그 드워프를 보자마자 이름을 외쳤다.
카를렘에 처음 도착했던 윤도하를 도와준 그 드워프였기 때문이었다.
“……!”
설마 드워프를 먼저 건드릴 줄은 몰랐는지, 데서가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윤도하를 조종하여 숨겨둔 드워프를 자기 쪽으로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너무. 느려!”
그러나 한발 앞서 행동한 무무가 그보다 더 빨랐다.
무무가 낚아채온 어린 드워프의 몸은 김시후의 품에 안겼다.
“칫!”
1급 영웅의 본체를 인형으로 삼았으면서도 선수를 빼앗긴 데서.
그의 얼굴에 묻어나던 여유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때 유지한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이로군.”
“닥쳐!!”
발끈한 데서의 외침이 공동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