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전면전
유지한은 설득 반, 협박 반의 어조로 지배자의 협조를 요구했다.
그 끝에 결국 지배자들은 데서의 공격에 대비하여 하나로 뭉치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네들을 믿어보도록 하지.”
“제발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끝까지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즈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두고 영웅들을 믿어보자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단순히 마즈를 망가뜨리려는 것과 영웅들의 의도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네.”
“좋습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어어?!”
쿠구구구구!
그렇지 않아도 높은 건물의 옥상이 무무의 힘으로 더 높게 변해갔다.
그에 따라 유지한과 함께 올라온 이들의 몸도 하늘 위로 치솟았다.
“너, 너무 높아! 사람 살려!”
“진정하시고. 지금부터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드리겠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유지한은 진실의 실이 이어지는 방향을 어림짐작하여 지도에 표시했다.
마즈의 지도 위에 늘어나는 동그란 표식들.
새로운 표식이 그려질 때마다 그 구역을 관리하는 지배자들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뭐라?! 이 광산에서부터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
“심지어 여긴 오팔 기사단이 상주하는 곳이야!”
“이거 우릴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아뇨. 놈들은 어디에든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데서가 공간 왜곡을 다룬다는 건 이미 확인되었다.
그의 인형은 사람이 많은 도시부터 사람이 아예 없는 외진 지역까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었다.
지도에 어느 정도 표시를 끝낸 유지한은 말했다.
“일단은 여기까지입니다. 주로 광산 쪽에 몰려있군요.”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로군.”
“그러니까 말이야.”
“……?”
지배자들은 윤도하의 인형이 주로 광산 근처에 분포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그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민유리는 의문을 드러냈다.
“저기, 그게 왜 다행인가요?”
“광산 쪽에 인간들이 거의 없지 않나?”
“드워프가 있잖아요. 그것도 꽤 많이요.”
“그래서 다행이란 거야.”
“네?”
“드워프들을 방패로 삼으면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을 테니까.”
“……!”
드워프를 이용하여 인간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겠다는 지배자들.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민유리의 표정은 절로 굳어졌다.
꽈악!
그 옆의 김시후는 지팡이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치관부터 글러 먹었네.’
지배자들은 마즈의 가장 윗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저런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다스리는 사람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 뻔했다.
김시후는 이내 손에 힘을 풀며 말했다.
“드워프는 마즈의 시민이 아니에요?”
“공식적으로 시민이 아니네. 그리고 드워프와 인간은 달라. 우리 인간은 그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지.”
“뭐가 우월하죠?”
“뭐가 우월하냐니? 자네는 꽤 당연한 걸 묻는군?”
“힘만 센 드워프들과 비교했을 때, 인간은 머리를 잘 굴릴 줄 알지.”
“그 멍청한 놈들은 우리가 써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드워프들을 낮잡아보는 지배자의 태도가 강하게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그들에게 발끈한 김시후는 앞으로 나서려고 했지만.
김시후의 감정 변화를 포착한 이미아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만둬. 방해되니까.”
“……네.”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김시후는 어떻게든 화를 억눌렀다.
그런데 그때 이 근방을 지배하는 지배자 크루바가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광산에서 근무할 광부들은 필요해. 드워프마저 마즈의 재산이라고.”
“크루바. 너 또 드워프를 걱정하는 거냐?”
“드워프가 아니라 마즈를 걱정하는 거다. 너희는 만약 지금 광산에서 광부로 근무하는 드워프가 전부 사라져버리면 어쩔 거지?”
현장 인력의 96%를 차지하는 드워프들.
광산에서 위험하고 험한 작업들은 대부분 그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드워프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일하고 있지만.
드워프만큼의 현장 경험과 지식은 갖고 있지 않았다.
“드워프가 사라졌을 때 마즈를 위해서 광부가 되어줄 인간들은 거의 없을 거다.”
“에이, 설마 전부 죽기라도 하겠어?”
“죽은 드워프는 다시 채워 넣으면 되잖아.”
크루바는 다른 지배자들처럼 드워프를 인간과 동격의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먹이사슬에서 인간이 가장 위에 있고, 드워프를 비롯한 이종족이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건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즈에 드워프가 필요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다.
‘저거 생각보다 쓸만한 놈일지도.’
마즈의 지배자 중에서 드워프를 그나마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인물.
물론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가 지배하는 광산에서도 드워프가 받는 취급은 그리 좋지는 못했으니까.
‘데서에게 가담한 드워프가 있다는 건 숨겨둬야겠군.’
드워프의 필요성에 대해 토로하는 크루바의 말을.
유지한은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
“이곳은 안전할 겁니다. 위치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고요.”
줄곧 땅속에 머무르고 있었던 2팀은 안전한 장소에 맡겨두기로 했다.
재난 사태 발생 시, 마즈의 지배자를 위해 준비된 대피소였다.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민유리는 기절한 박재경의 몸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눕혔다.
2팀의 모든 영웅을 침대에 눕힌 뒤, 유지한은 김시후를 바라봤다.
[시큐리티 시스템]
커다란 타원 모양의 마력이 영웅들의 몸을 감쌌다.
누군가가 허락 없이 접촉할 경우 마법을 사용한 시전자에게 신호를 보내오는 마법이었다.
“혹시라도 이분들이 잘못되거든, 마즈는 데서가 아니라 저희의 손에 멸망하게 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피소의 관리자를 압박해오는 유지한의 강렬한 시선.
관리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것이 그저 말뿐인 경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서쪽의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그래.”
툭!
와타나베는 유지한과 이별 인사의 의미로 서로의 주먹을 부딪쳤다.
마즈 전체를 커버하기 위해 방향을 나누어 따로 찢어지기로 약속한 두 파티였다.
부딪힌 주먹을 회수한 와타나베는 말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예?”
“카를렘의 전체적인 무력 수준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그나마 너희가 만났다던 카븜의 왕이 우리가 마주친 가장 강력한 상대겠지.”
와타나베는 카를렘의 수준이 지구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유지한 또한 1급 영웅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카븜의 왕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카를렘에서 압도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윤도하와 싸우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아무튼, 적당한 곳에 도착하면 연락하마.”
“……제가 마지막에 요청한 건 기억하시죠?”
“기억하다마다.”
유지한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와타나베.
“느하하하!”
그는 이내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자리에 남긴 채 파티원들과 함께 떠났다.
뒤이어 유지한 파티는 이 근처 지배자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준비되셨습니까?”
“정말로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하나?”
유지한은 이 근처의 지배자들을 한곳에 모아둘 작정이었다.
따로 흩어진 지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각 기사단의 인력이 낭비되는 것보다.
그들을 한데 모아서 보호하고 나머지 기사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고,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카븜의 왕에게서 인정을 받은 저희가 직접 지켜드리겠습니다.”
“드, 든든하긴 하군.”
마즈의 기사들은 지배자들의 명령으로 이미 각 지역에 파견을 가고 있었다.
그에 질세라 유지한 파티는 지배자들을 이끌고 또 다른 대피소로 향했다.
“걱정이야. 곧 있으면 또 달이 차오를 텐데.”
이동 중에 한 지배자는 카를렘의 달을 걱정했다.
원래대로라면 새로운 축제를 준비해야 할 시기에.
전쟁과 비슷한 싸움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축제가 벌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축제인지…….”
“바쁘긴 해도 선조 때부터 내려온 전통은 지켜야지.”
“최근 들어 달이 차오르는 주기가 너무 빨라지지 않았나?”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김시후 또한 달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
붉은 달에 이어 노란 달이 차오르는 시기에 맞춰 대기에 존재하는 마력이 더 짙어지고 있었으니까.
마법사로서는 마법 활용에 최고로 적합한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었다.
‘적에게도 그렇겠지.’
데서가 인형을 움직이는 동력원도 결국에는 마력이었다.
달이 차오른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도 매우 이롭게 작용할 터.
그런데 그때였다.
“……!”
유지한의 눈에 진실의 실이 늘어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문제는 그 실이 이어지는 곳이 아주 가깝다는 것이었다.
“잠깐 다녀올게요.”
“지한 씨?!”
후웅!
유지한은 파티원들을 내버려 두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우히히!
뛰어가는 게 아니라 날아가는 듯한 몸놀림.
빠르게 달려가는 유지한의 몸을 실프의 바람이 뒤에서 강하게 떠밀었다.
“음믐믐!”
울퉁불퉁한 땅바닥을 밟기 좋게 다져주는 무무의 지원까지 더해지자.
유지한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거기!”
한적한 길가에서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남성.
유지한은 윤도하의 인형으로 변해버린 그 남성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이 날 보고 있다.’
그와 동시에 유지한은 깨달았다.
어딘가에 있는 데서가 인형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끄……. 끄윽.”
인형이 된 남성은 아직 본인의 의식이 남아있는지 짧은 신음을 토했다.
[투명화]
스르륵—
유지한의 몸이 팔찌의 힘으로 공기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그 직후 인형으로 변한 남성의 목이 뒤로 꺾어졌다.
유지한이 주먹으로 턱을 쳐서 그를 기절시킨 것이었다.
‘어디냐!’
유지한은 가장 가까운 진실의 실을 쫓아서 달렸다.
데서가 직접 나섰던 거라면 그리 멀리 도망가진 못했으리라.
—저쪽!
—다음은 저쪽이야!
실프의 지시를 따라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길 수차례.
빛나는 실을 쫓던 유지한은 익숙한 차림새의 인간을 마주쳤다.
“네가 왜 여기에…….”
“크르르!”
그는 광산에서 유지한 파티를 안내했던 어린 드워프, 그룬 하이츠였다.
*****
인형화가 거의 완성되기 무렵이었던 인간이 유지한에게 쓰러지기가 무섭게.
줄곧 눈을 감고 있던 데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다른 인형의 시야에 유지한이 등장한 탓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결코 좁지 않은 지역 안에서 새로운 인형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는 유지한.
심지어 방금 쓰러진 남성은 감시용으로 생성했던 인형이었다.
광산에 숨겨둔 공간 왜곡이 발견됐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던 차에.
인형의 시야에 자꾸 그가 잡히는 걸 우연이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그게 대체 뭐지?’
상대에게는 인형을 쫓을 수 있는 수단 또는 방법이 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데서는 유지한이 자신에게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느꼈다.
공들여 준비했던 계획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데 말이다.
“한 가지는 확실해.”
데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눈빛만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와타나베와는 다른 종류의 위기감.
과거 방랑마법사부터 레론의 왕실마법사가 되기까지.
밑바닥에서부터 꼭대기로 올라갔었던 이의 직감이 경고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