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초대 (2)
크루바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 방금 나한테 뭐라고……?”
“정중하게 거부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말투가 조금 다르지 않았나?”
“그랬나요? 제가 아직 카를렘 말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아! 그런 거로군.”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유지한은 크루바의 의심을 가볍게 얼버무렸다.
그의 옆에서 수상하게 쳐다보는 기사단장 크루거의 시선은 무시했다.
“하지만 내 제안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거부하겠다니? 조건을 듣는다면 자네 생각도 달라질걸세.”
“레론에서도 귀족분들에게 비슷한 제안들을 많이 받았었고, 또 거절했습니다.”
“하! 레론의 떨거지 귀족들과 난 차원이 달라. 금괴와 보석들을 보관할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그중에는 왕가에 소속된 분들도 계셨습니다만.”
“……커흐흠! 그랬나?”
크루바는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설마 왕가의 사람이 돼지국밥 용병단에 접촉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마즈의 지배자라고 해도 비슷한 체급이라고 볼 수 있는 레론 왕가를 떨거지라고 욕보일 수는 없었다.
“방금 건 듣지 못한 걸로 해주게.”
“그렇게 하죠.”
조금 전의 대화가 외부로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레론 측에서 마즈에게 유감을 드러내는 서한을 보내올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유지한은 나름 약점 하나를 잡았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자네들이 원하는 게 뭔가? 내 가능한 모든 조건을 들어줄 용의가 있네.”
“왜 그렇게까지 저희를 원하시는 겁니까?”
“난 힘이 필요해.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굳이 저희가 아니어도 다른 용병이 있을 텐데요.”
“카븜의 왕이 인정할 정도의 용병들은 세상에 거의 없을 테지.”
카븜의 왕에게 인정받은 용병과 그가 소속된 용병단.
카븜에서 벌어졌던 일은 마즈에서까지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천만 코인, 아니면 2천, 3천만 코인! 계약금은 얼마든지 말만 하게.”
“돈은 지금 저희가 가진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현재 의뢰주가 요거 상단이라고 했나? 자네들이 원한다면 요거 상단을 조만간 마즈 최고의 상단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네!”
“딱히 끌리지는 않는군요.”
“그것도 아니면 마즈 최고의 미녀와 미남들을…….”
마즈의 지배자인 크루바는 연신 침을 튀기며 돼지국밥 용병단이 매력을 느낄만한 제안을 쏟아냈다.
주로 부와 명예와 관련되어, 평범한 용병이 듣는다면 한 번쯤 혹할만한 제안들.
이미 크루바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있던 강철 기사단의 단장 크루거의 생각에도 파격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유지한은 약 10개에 달하는 크루바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그러자 여유가 가득하던 크루바의 얼굴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접객실로 오기 전의 그의 생각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기에.
“자네들 정말로 너무하군.”
“저희는 마즈에 정착할 수 없습니다.”
“1년 만이라도 좋아! 딱 1년만 내 밑에서 일해주면 지금까지 말했던 모든 걸 들어주겠네.”
“호오, 파격적이군요.”
“그렇지?!”
1가지 제안이 아니라 10개에 달하는 모든 제안을 동시에 들어주겠다는 크루바.
“하지만 저희 입장은 변하지 않습니다.”
“……!”
그럼에도 유지한이 단호한 태도를 유지하자.
끝내 크루바의 옆에 있던 기사단장 크루거가 말했다.
“반항은 그쯤하고 지배자 님에게 머리를 조아려라.”
“싫다고 했을 텐데요.”
“……내가 너희의 무례를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오! 그건 나랑 똑같네요.”
“뭐?”
“내가 지금 당신들의 무례를 참아주고 있으니까.”
윤도하를 데리고 사라진 데서를 찾기도 바쁜 상황에.
별 영양가도 없는 영입 제안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다.
만약 인내심을 절대적인 수치로 따진다면 크루바의 것과 유지한의 것은 비교조차 불가능할 터.
“기어코 지배자님 앞에서도 건방을 떨다니……!”
유지한의 말을 조롱으로 알아들은 크루거는 표정을 굳혔다.
더는 그의 무례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작정이었다.
“자자, 다들 진정하게.”
지배자 크루바의 중재로 안정을 되찾았지만 이미 종결 난 것이나 다름없는 대화.
유지한은 크루바가 매력적인 제안을 던지거나 말거나, 그저 창문 밖을 힐끔거리기에 바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똑똑.
누군가 접객실의 문을 노크했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온 건 검은 정장을 입은 저택의 집사.
그는 크루바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중인데. 무슨 일인가?”
“그, 그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집사는 아직 열려있는 문틈을 힐끔거렸다.
쾅!
뒤이어 문짝이 안으로 활짝 젖혀지며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크루바는 경악했다.
“너, 너희가 어떻게 여길…….”
“친우여! 이런 곳에서 남몰래 대화를 나누면 쓰나?”
“큭큭!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 쪽지가 사실이었구나.”
때깔 좋은 얼굴의 중년의 남성과 여성들.
그들은 모두 크루바처럼 마즈와 마즈의 광산을 지배하는 지배자였다.
유지한은 그들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한이 형! 저 사람들은…….”
“우리가 부른 지배자들.”
정보 길드를 통해 고용한 심부름꾼으로 그들을 이 자리에 불러들인 건 유지한이었다.
마즈의 지배자들이 서로 간의 다툼을 위해 전력을 키우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 따라 크루바가 매우 높은 확률로 영입 제안을 할 거라고 예상했었기에.
그걸 이용하면 근접한 거리에 있는 지배자는 한데 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밤사이에 이동하느라 피곤해 죽겠군.”
“돼지국밥이라고 했나? 벌써 계약을 맺은 건 아니겠지?”
“계약 안 했습니다.”
“너희들 전원, 크루바 말고 나한테 와라. 어떤 조건이 됐든 그보다 훨씬 높게 쳐주마.”
“아니! 저런 변태 새끼 말고 내게 와. 돈은 무조건 2배로 줄게.”
“뭐라고? 변태 새끼?!”
눈을 치켜뜬 중년의 남성이 비슷한 나잇대의 여성을 노려봤다.
뒤이어 마즈의 지배자들은 서로를 불만스럽게 꼬나보며 옥신각신 다퉜다.
이 저택의 주인인 크루바 또한 그 행렬에 끼어드는 모양새였다.
그들이 함께 데려온 기사들 또한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측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태 새끼야. 한 번 뜰까?”
“기어코 싸워보자는 거냐?”
“조무래기들이 하나 같이 시끄럽긴…….”
“쟨 또 뭐래?”
저렴한 단어가 이리저리 오가는 말싸움.
대화의 수준과는 별개로 그들이 진심으로 맞붙는다면 분명 마즈에 많은 피가 흐를 터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이 되어버린 유지한 일행이었지만.
“다들, 집중.”
쿠웅—!!
무무의 마력을 이용하는 유지한이 한쪽 발을 가볍게 구른 것만으로.
저택 안에 있던 이들의 몸이 약 2~3cm 공중으로 떴다가 내려오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털썩!
한 지배자는 바닥에 넘어지며 중얼거렸다.
“바, 방금 건 대체…….”
“입 다물고 나한테 집중하세요.”
의미 없는 말싸움이나 구경하려고 당신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게 아니니까.
“감히 누구에게 명령질이냐!”
집중하라는 말에 반발하듯 한 거구의 기사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질세라 다른 기사들 또한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집중하라고 하지 않았나?”
츠팟!
닫혀있던 와타나베의 입이 열리기가 무섭게.
그의 일본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뽑혔다가,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헙!”
거구의 기사는 순간적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이 부러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검이 잘려나간 것이었다.
‘검으로 검을 베었어? 그것도 이 거리에서?’
한순간에 훌륭한 장검에서 쓰레기로 변해버린 검.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로 놀라운 솜씨였다.
‘격이 다르다!’
거구의 기사는 가늠조차 불가능한 상대의 능력에 전율하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느하하! 위험한 무기는 집어넣게.”
“…….”
“…….”
지금 웃는 얼굴로 말을 꺼낸 남자는 먼 거리에서 단단한 검을 베어낼 수 있는 상대.
그가 마음만 먹으면 검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자를 수도 있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들 뒤로 물러나라!”
“우리가 상대하겠다!”
“지배자 님들을 보호해라!”
끝까지 투지를 불태우는 건 각 기사단의 기사단장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강철 기사단장 크루거는 지배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유지한에게 검을 휘둘렀다.
캉!
하지만 크루거의 검은 유지한의 큐디를 뚫어내지 못했다.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사람이 마즈에서 손에 꼽는 명검을 휘두르고도.
정체가 불분명한 용병 따위에게 공격이 막혀버린 것이었다.
“찍찍! 끄떡없다!”
“생쥐 주제에……!”
“친칠라다! 멍청한 것! 찍!”
탱커로 나선 칠라조차 빠르게 돌파해내지 못하는 기사들.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배자들이 당장이라도 공격받을 수 있는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했다.
유지한은 반격을 준비하는 일행을 만류하며 말했다.
“이번 공격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만. 다음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크윽!”
크루거를 포함한 기사단장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이 쉽게 제압할 수는 없는 상대라는 판단에, 기사단장들은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거 안 집어넣을 겁니까?”
“……들고만 있겠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무기를 거두지 않는 기사들.
한 차례의 충돌을 통해 영웅들의 실력을 실감한 지배자들은 몸을 작게 떨었다.
떨리는 손으로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우, 우리 기사들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다니……. 자네들 정말로 강하군.”
“그 소문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나.”
“당장이라도 여길 나가고 싶구만…….”
“대체 목적이 뭔가?”
“설마, 우리를 죽이기 위해 다른 세력에서 고용한 암살자?!”
“하지만 그건…….”
상상에 나래에 빠진 마즈의 지배자들.
유지한은 그들끼리의 대화를 잠시 중단시켰다.
“다들 지금 마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당신들 사이의 권력 다툼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위기.”
“……?!”
유지한은 지배자들에게 데서와 관련된 이야기를 빠르게 풀어놓았다.
데서의 이름을 접한 누군가는 말했다.
“레론의 전 왕실마법사 말인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네.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레론의 한적한 지역으로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를 막지 못하면 조만간 마즈는 카를렘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 봤자 고작 마력으로 인형을 다루는 마법사가 아닌가?”
인형을 다루는 마법사 데서.
그를 주로 소문으로만 접했던 지배자들은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데서가 지금 인형으로 사용하는 건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허, 살아있는 인간을?”
“그리고 그 인형은, 아마도 저만큼이나 강합니다.”
“……그건 큰일이로군.”
한 지배자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마즈의 기사단장을 정면에서 막아설 정도의 힘을 가진 유지한이었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강력한 인형들이 마즈를 습격한다면 과연 당해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자네의 말을 어떻게 믿지?”
“믿지 못할 이유는요?”
“뭐라고?”
“만약 위기가 찾아온다면, 허둥대기만 하다가 마즈가 멸망하는 걸 바라보기만 할 셈입니까?”
“…….”
“나는 지금 당신들에게 기회를 내려주는 겁니다. 지금 당장 이곳에 오지 못한 지배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각 지역에 기사들을 파견할 준비를 하세요.”
“대체 어디로 보내란 말인가?”
유지한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크루바!”
“왜, 왜 그러지?”
“지도 들고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안내해주세요. 짐작되는 장소를 짚어드릴 테니까.”
윤도하의 머리카락을 쥔 유지한이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더 늘어나 버린 진실의 실이 마즈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저 수많은 실이 이어지는 곳에는 진짜 윤도하와 그를 복제한 인형이 섞여 있을 터.
‘그래 봤자 손바닥 안이지.’
지배자들의 협조를 얻어내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으니.
남은 건 놈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것뿐.
—우히, 우히히, 우히히히…….
“……실프. 왜 그렇게 소름 끼치게 웃어?”
—그 인형사, 가만두지 않을 거야……!
유지한과 무무가 계약을 맺는 빌미를 제공한 데서.
실프로서는 절대로 그놈을 용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