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초대
“시후야. 여러 정령과 계약하는 건 문제가 없나?”
“글쎄요. 임자 있는 계약자에게 다른 정령이 접촉한다는 건 못 들어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을 시도하려는 상황.
유지한은 무무의 요청에 따라 땅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가만있어.”
무릎 위로 올라간 무무는 이내 유지한의 이마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정령 계약의 의식으로서 인간의 장기 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뇌와 가장 가까운 부위에 몸을 접촉하는 것이었다.
—우우……!
허공에 떠오른 실프는 매우 불안한 몸짓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퉁!
머리와 머리를 가볍게 맞대고 눈을 감는 무무.
곧이어 무무의 몸에서 황색의 빛이 번쩍였다.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끝난 건가?”
“계약 과정은 생각보다 싱겁군.”
—끝났지? 빨리 떨어져!
계약이 끝났음을 알아본 실프는 유지한과 무무 사이에 끼어들며 둘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았다.
그때 유지한은 말없이 신기한 감각을 경험하고 있었다.
‘편하다.’
의자가 아닌 맨바닥에 앉아있는데도 푹신한 쿠션 위에 있는듯한 감각.
손바닥에 닿는 흙과 모래가 마치 이불처럼 느껴지고, 딱딱한 돌멩이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대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에게 이상하리만치 친숙해진 것이었다.
‘드넓은 대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이야.’
쿠구구구!
바닥에서 솟아오른 흙이 1초 만에 장미꽃 모양을 이뤘다.
손을 이용하지 않고도, 단지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땅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이런 능력이 있으니 지진을 일으키는 것쯤은 아주 간단한 일이이라.
그에 유지한은 마른 침을 삼켰다.
윤도하가 만약 과거에 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서울에 존재하는 건물들은 이미 모두 무너졌을 것만 같았기에.
“음믐믐?!”
무무는 바랐던 대로 윤도하의 머리칼로부터 뻗어져 나가는 진실의 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다름 아닌 유지한의 고유 스킬로부터 제공되었다는 것 또한.
“이건…….”
“쉿.”
유지한은 입술 위로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주변에는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눈치 챙겨.
실프까지 은근한 압박을 가해오자 무무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지한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가만히 계세요.”
“찍찍?!”
쿠구구궁!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밟고 있던 바닥이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조금 당황하는 동료들을 두고 유지한은 팔을 쭉 뻗었다.
쿠구구구궁!!
발바닥을 딛고 서 있는 상태 그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옮겨지는 모두의 몸.
누워있는 2팀과 마력 변색 증후군 환자들까지 포함해 커다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것처럼 공간 왜곡의 출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마력을 자유롭게 다루는 그를 보며 무무는 조금 신기한 듯 말했다.
“생각보다. 잘 해.”
“짬이 있으니까.”
세상에 알려진 그 어떤 정령사보다 빠른 속도로 실프와 친숙해진 유지한이었다.
새롭게 계약한 고위급 정령 무무는 이미 그에게 마음을 열어준 상황.
곁에서 자주 지켜본 윤도하를 따라 하는 일 정도는 간단했다.
*****
공간 왜곡을 탈출한 유지한 일행은 감시 인력의 눈을 피해 광산을 벗어났다.
2팀을 제외한 마력 변색 증후군 환자들을 전부 경비대 앞에 내려놓고 집결지였던 요거 상단의 지부로 이동했다.
“이분들을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마력 변색 증후군으로 눈을 뜨지 못하는 2팀의 영웅들.
데서를 쫓는 것도 좋지만, 무력화된 2팀을 두고 섣부르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유지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2팀을 레론에 맡긴 뒤 데서를 쫓겠습니다.”
“알았다.”
데서의 행선지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여러 가닥으로 나뉜 진실의 실 중에는 분명 인형들의 본체인 윤도하와 이어지는 것이 존재할 터.
유지한은 우선 2팀의 안전을 확보하고 윤도하를 되찾고자 했다.
와타나베는 아직 어두운 바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침에 이동할 건가?”
“지금 바로 가죠.”
그런데 그때였다.
분명 굳게 닫아두었던 요거 상단 지부의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근처에 있던 김시후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세요?”
오밤중에 문을 열고 들이닥친 낯선 사람들.
단단한 갑옷과 무기 따위로 완전 무장을 한 그들 중.
회색 중갑옷을 착용한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실례하겠다. 그대들이 돼지국밥인가?”
“돼지국밥? 맞긴 맞는데…….”
“나는 강철 기사단의 단장, 크루거다.”
“……?”
유지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철 기사단이라면 마즈의 지배자들이 거느리는 엘리트 기사 집단.
마즈를 수호한다는 사명으로 지배자들의 후한 대접을 받는 존재들이었다.
레론과 카븜으로 따지면 왕실기사단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자신들을 찾는단 말인가.
“그대들이 낮에 전혀 보이지 않아서 이 시간에 찾아오게 됐다.”
“무슨 일이죠?”
“……낮에 너희가 지배자 님의 호출을 무시했다고 들었다.”
크루거는 자리의 영웅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들이 그의 직속 상관이라고 볼 수 있는 지배자의 만남 요청을 거부한 일에 관해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때 와타나베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곳을 감시하고 있던 모양이로군?”
상단 지부로 돌아오자마자 기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친 걸 보면.
강철 기사단이 근처에서 요거 상단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에 크루거는 순순히 인정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가 먼저 지배자 님을 무시하지 않았나?”
“우린 너처럼 마즈 소속이 아니야. 지배자라는 인간의 요청에 일일이 따라줄 필요는 없지.”
“마즈로 들어온 주제에 상당히 무례한 발언을 하는군.”
“네 말투와 행동이 더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와타나베는 짐짓 여유가 느껴지는 얼굴로 크루거와 신경전을 벌였다.
‘이놈들……!’
마즈에서 단연코 엘리트라고 볼 수 있는 강철 기사단을 대면하고도 긴장한 기색 따위는 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영웅들.
속으로 분노를 삼키던 크루거는 이 대화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유지한은 그런 크루거를 향해 말했다.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만나겠다고 전해주세요.”
“허락할 수 없다! 감히 위대하신 지배자 님의 요청을 2번씩이나 무시할 셈이냐?!”
파아앗!
크루거는 언성을 높이며 몸에서 마력을 끓어 올렸다.
살짝 격해진 그의 감정을 따라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마력 또한 크게 요동쳤다.
크루거의 뒤에 서 있던 부하 기사들도 그를 따라 표정을 굳혔다.
“찍찍! 가까이 오지 마라!”
위협을 감지한 칠라는 크루거가 서 있는 방향으로 방패를 내밀었다.
유지한은 그런 칠라의 뒤에서 크루거를 주시했다.
‘카를렘의 강자로군.’
부드럽기보다는 단단함이 느껴지는 강철같은 마력.
상대의 수준을 가늠해보던 유지한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크루거가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지위를 허투루 단 것은 아닌 듯.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카를렘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도 제법 상당한 수준이었다.
‘마즈에 저런 이들이 꽤 많은 건가?’
마즈에 존재하는 엘리트 기사단의 숫자는 최소 15개.
그것들 전부가 강철 기사단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마즈라는 세력이 보유한 전력은 썩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 경고다. 우릴 따라와라.”
“그러죠.”
“……뭐?”
“……?”
아주 진지한 얼굴로 경고 섞인 말을 건넨 크루거.
그러나 유지한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김시후와 다른 사람들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5분만 주세요. 출발할 준비 좀 할 테니까.”
“어? 어어…….”
“지배자 님 기다리시니까 빨리 갑시다.”
순순히 동의하다 못해 갈 길을 재촉하는 유지한이었다.
출발 준비를 위해 크루거와 강철 기사단은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이미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야?”
“지배자들을 한번 만나봐야겠어.”
요거 상단의 일을 고려하면 지배자와 척을 지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즈를 지배하는 이들이 보유한 힘은.
이번 일을 해결하는데 좋은 수단이 되어줄 수도 있었다.
“이미아.”
“왜?”
“마즈에도 정보 길드가 있지?”
“있지. 오는 길에 봤어.”
“정보 길드는 돈만 주면 대부분의 의뢰를 다 받잖아.”
“그렇지.”
“그쪽에 심부름 하나 맡겨야겠다.”
유지한은 직접 펜을 잡고 카를렘의 언어로 쪽지를 적어나갔다.
*****
“아침이 되기까지 기다려라.”
지배자의 저택에 도착한 유지한 일행은 날이 밝을 때까지 접객실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강철 기사단을 거느리는 지배자가 그새 잠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지?”
“그림이 막 움직이네요.”
“신기하다.”
지배자의 저택 안에는 여러 구경거리가 존재했다.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그림이나 눈을 깜박이는 조각상처럼 특이한 전시품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비싸 보이는 술이로군.”
“……설마 건드리시는 건 아니겠죠?”
“나를 뭐로 보고!”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유리판에 진열된 위스키를 구경 중인 와타나베.
그의 파티원들은 혹시라도 와타나베가 술을 건드릴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제어하는 건 조금 힘드네.”
한편, 유지한은 소파에 앉아 무무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
박재경과 2팀의 몸은 무무의 힘을 이용하여 땅속에 보관 중인 상황.
눈으로는 그들을 전혀 보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이 땅속에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는 건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음믐믐! 이 정도면. 훌륭해.”
무무는 그런 유지한을 진심으로 칭찬했다.
정령과의 계약 첫날에 보여주는 능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솜씨였기 때문이었다.
실프를 다루던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으리라.
—흥! 나도 그런 것 정도는…….
실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지만.
무무의 마력을 다루는 것에 별다른 방해를 하지는 않았다.
“여기 물건은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것뿐이네요.”
“그러게.”
“윗사람들 취향은 다 비슷한가…….”
발로 밟을 때마다 괜스레 미안해질 정도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가진 카페트와 소파.
어느 조각상의 눈에 박혀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보석들.
심지어 조각상에는 얼굴의 주근깨마저 작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니.
접객실의 크기의 화려함은 카븜의 왕이 머무는 곳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게 다 드워프를 착취해서 벌어들인 거란 말이지.’
밥 한 끼조차 넉넉하게 먹지 못한다는 드워프와 비교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며 몇 시간이 흘렀을 때.
쿵!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접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들이 돼지국밥이로군?”
“예. 맞습니다.”
“나는 크루바네.”
몸 전체에 통통하게 살집이 오른 인물.
마즈의 지배자 중 1명인 크루바였다.
‘기사들 이름을 자기 이름이랑 비슷하게 바꿔버렸댔지.’
원래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갖고 있던 강철 기사단의 기사들.
그들은 기사단에 들어온 뒤 크루바의 명령으로 개명을 해야만 했다고 알려진다.
단장인 크루거에게 물어본 바로는 크루코코, 크루투아즈, 크루포시…….
하나같이 ‘크루’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으로 말이다.
“으음.”
크루바와의 대화를 위해 앞으로 나선 건 유지한이었다.
하지만 크루바는 바로 앞에 있는 유지한이 아니라.
상대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인 민유리와 이미아를 대놓고 눈으로 훑었다.
“호오……!”
상당히 만족한 듯한 감탄사에 이어 눈웃음까지 짓는 크루바의 모습에.
유지한은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거 미친놈이네.’
상대의 기분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는 행동들.
기사들의 이름을 죄다 바꿔버린 일도 그렇고.
하여간 정상인처럼 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네가 그 유지한이라는 사람인가?”
“예. 지배자님께서 저희를 많이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불렀을 때 말이야, 재깍재깍 찾아왔어야지.”
크루바는 눈알을 굴리며 유지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아래로 조사했다.
그가 소문처럼 능력 있는 용병인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추켜 올리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네들 모두 내 사람이 되어주게!”
“싫은데.”
“……응?”
“아.”
이런.
머릿속 생각이 여과 없이 튀어 나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