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희소식
통! 통! 통!
칠라는 산처럼 솟아오른 배를 손으로 두드렸다.
한번 두드릴 때마다 털로 덮인 배가 위아래로 파도치듯 출렁거렸다.
그것은 화려하게 차려진 카븜의 만찬들을 보이는 족족 흡입하여 완성된 결과물.
“꺼어억!”
“더러워.”
“찍? 식사 후에 나오는 트림은 당연한 것이다!”
“예의가 부족한 친칠라구나.”
대놓고 트림을 하는 칠라에게 핀잔을 주는 이미아.
그녀는 손수건으로 입술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래도 꽤 먹을 만한 식사였어.”
“찍찍! 동감이다.”
만찬을 준비했던 왕실 요리사는 칠라와 이미아를 보며 활짝 웃었다.
“음식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놈들이군! 카븜의 인간과 견주더라도 결코 밀리지 않을 거다.”
“뼈 달린 고기가 가장 맛있더라.”
“내일도 여기서 밥 먹으면 안 되나? 찍?”
“나야 왕께서만 허락하신다면 언제든지 환영하지.”
“찍찍! 대장! 카븜에 하루만 더 머무는 건 어떤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유지한을 바라보는 칠라.
몸에 식욕의 화신이 빙의한 것처럼 간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기각.”
“찍, 찍찍…….”
그러나 단호한 거부가 떨어지자 칠라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한편 민유리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궁전의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그 약초들이군요.”
“맞습니다.”
기다란 탁자에 일렬로 가지런히 나열된 형형색색의 약초들.
카븜에서 자라나는 약초를 전부 가져왔다고 해도 무방한 약초 컬렉션이었다.
민유리는 그중에서도 아주 진한 분홍색 잎이 달린 약초에 코를 가져갔다.
“몸이 건강해질 것 같은 향기네요.”
“실제로 체력 회복에 탁월한 약초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께서 직접 지시한 사항이니만큼 특등품으로만 골라왔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유리 님께서 고향으로 챙겨가실 물건은 장기 보관이 가능하고 충격에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단단하게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요거 상단이 챙겨갈 물건 외에 민유리를 위한 약초를 따로 준비해주겠다는 배려까지.
카븜의 왕은 유지한 파티와 맺은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다.
유지한은 함께 식사를 한 3팀을 돌아보며 말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주 멀쩡합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감옥에 갇혀있었던 3팀.
유지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그들은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궁전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 있던 때를 제외하면 최고급 호텔에 머무는 느낌이었어요.”
“3팀에서 최대한 조용히 계셨기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앞서 카븜에 도착했던 3팀이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려는 카븜에 맞서 싸우거나 대적했더라면.
상황은 지금보다 나쁘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저희도 처음에는 카븜의 왕을 만나고자 했습니다만…….”
“전사들이 요청을 계속 거부하더군요.”
“여러분이 카븜에 오지 않고 하루만 더 갇혀있었더라면 난동을 부려서라도 감옥을 탈출했을 겁니다.”
“제가 타이밍이 좋았군요.”
유지한은 알로의 부탁으로 카븜에 방문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잠깐의 오해가 있었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에.
‘요거 상단과 협조하길 잘 했군.’
현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카를렘 원정대의 힘만으로 윤도하 수색을 시도했었다면 훨씬 복잡한 결정이 필요했겠지.
그런 면에서 알로와 만나게 된 건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왕의 궁전을 빠져나온 유지한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준비된 마차에 짐을 실었다.
“지한 씨. 마차에 물건은 다 실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저쪽에 계신 분들이 제발 자기들 물건도 가져가달라고 하는데…….”
요거 상단이 처음 구매하기로 한 품목에 더해 그 외의 물건들도 매우 저렴하게 받아온 상황.
왕의 허가가 떨어져서인지 너도나도 상단에 자기가 만든 상품 따위를 팔겠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에 3팀의 리더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유지한이 말했다.
“적당한 마차를 1대 구매해서 챙겨가죠.”
“알겠습니다.”
3팀의 리더는 마차를 구매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투타?”
“역시 여기 있었군.”
카븜의 전사인 투타였다.
“무슨 일이야?”
“나도 오늘 너희와 함께 레론으로 간다.”
“네가? 왜?”
“너희와의 인연 덕분에 내가 요거 상단의 담당자가 되었다.”
“그렇구만.”
“왕이 내게 직접 내린 명령이니만큼 따라야겠지!”
평범한 카븜의 정예병에서 요거 상단의 담당자로 승진하게 된 투타였다.
그가 차려입은 복장 또한 카븜보다는 레론의 것을 닮아있었다.
“혹시 우리의 왕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앞으로 날 통해서 말해도 좋다.”
“알겠어.”
“아! 참고로 왕은 너와 한번 싸워보고 싶어 했다.”
“……갑자기?”
“제사에서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더군.”
유지한과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는 카븜의 왕.
하지만 유지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강자와의 대련에 흥미가 이는 건 사실이지만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었기에.
“카를렘을 떠나기 전이라면 가능할지도.”
“그렇게 전해두지.”
*****
유지한 파티가 카븜에서의 일을 마치고 레론으로 돌아왔을 때.
귀족들이 주최하는 연회에서 빠져나온 알로가 그들을 반겼다.
“유지한 씨!”
“오우……. 오늘은 옷이 되게 화려하네요.”
“크흠. 어제 선물 받은 옷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귀족에게 선물 받은 양복을 차려입은 알로.
그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카븜에서의 일은 일부 전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소문이 빠르군요.”
“그런 정보만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왕을 직접 알현하셨다는 건…….”
“다 각설하고 가져온 물건부터 보시죠.”
유지한은 알로에게 마차에 싣고 온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이것들은 대체?”
기존에 거래가 약속되어 있던 약초 따위의 상품들과 그 옆에 쌓여있는 낯선 물건들.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차의 짐을 훑어보던 알로는 입을 떡하고 벌렸다.
하나같이 때깔이 좋아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카븜에서 외부로 반출하는 게 허가되지 않은 품목도 섞여 있는 걸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전부 허락 맡고 가져온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 설마 카븜의 왕이 직접 허락한 겁니까?! 옆에 있는 이 마차는 또 뭐죠?”
“가져가라는 게 너무 많아서 1대 구매했습니다.”
“허억!”
알로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카븜 방문으로 너무 큰 이득을 봤기 때문이었다.
“물건값은 처음에 지급하기로 한 금액에서 70% 수준으로 합의했습니다. 앞으로도 그 가격에 거래하시면 될 거예요.”
“허어억!”
심지어 이것이 지속 가능한 거래로 이어진다면.
요거 상단의 미래는 활짝 피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쪽이 카븜에서 온 요거 상단의 담당자입니다.”
“투타라고 한다. 반갑다!”
“아, 넷!”
“네가 그 운 좋은 상단의 주인이로군?”
“제, 제가 운이 좋긴 좋았네요.”
알로는 눈앞에 찾아온 행운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카븜의 왕에게서 그걸 이끌어낸 사람이 누구인지도.
“오, 왔구나?”
“와타나베님. 여기 선물입니다.”
“그게 뭐지?”
“카븜에서 내려오는 전통 술입니다.”
“느하, 느하하하! 역시 너는 거인이다! 널 보내는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와타나베는 웃는 얼굴로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술병을 잽싸게 챙겼다.
유지한을 향해 엄지를 추켜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엄청난 일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지…….”
강한 용병을 대신하여 고용한 이들이었는데.
알로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큰 은혜를 입어버렸다.
그 혼자서는 전부 다 갚지 못할 정도였다.
“저희가 카를렘에 머물 때 적당한 대우만 부탁드립니다.”
“그야 물론이죠!”
“혹시 마즈로 향했던 2팀은 소식이 없어요?”
“그쪽은 아직입니다. 저희 직원들이 바쁘게 처리할 일도 있으니 시간이 걸릴 거예요.”
마즈에서의 일 처리가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될 예정이었다.
어차피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 날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남아 있으니.
유지한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마즈도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말이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 여러분은 모르시는구나.”
“……?”
“그쪽에 광산이 많은 건 알고 계시죠?”
“예.”
카를렘에서 가장 큰 광산을 보유하고 있어 수많은 광물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세력.
보석을 세공하는 기술은 사람이 많은 레론에서 크게 발달했지만.
사실상 카를렘 전체에서 유통되는 보석의 절반 이상은 원산지가 마즈라고 봐도 좋았다.
‘프란의 아버지가 계신 곳.’
광부로 근무했다던 프란 페이저의 아버지는 마즈에서 살아가던 드워프.
그렇기에 유지한은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마즈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3대 세력 중에서도 종족 차별이 가장 심하다고 알려진 세력이었지.’
그 성격 좋아 보이는 프란이 카를렘에 진절머리를 치는 이유는 바로 마즈 때문이었다.
프란의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프란 자신마저도 노예처럼 취급받았던 기억을 유지한은 고스란히 전해 들었다.
그 때문에 카를렘에 들어오기 전부터 좋지 못한 인상을 받은 세력이기도 했다.
“조만간 광산 때문에 마즈에서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왜요?”
“광산의 소유권을 놓고 지배자들이 다툼을 벌이고 있어서요.”
본래 마즈의 광산들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공동의 소유로 두고 모든 이익을 나눠 먹던 마즈의 지배자들.
하지만 각각의 광산에 잠들어있는 자원은 절대 무한하지 않았다.
자신이 도맡아 관리하던 광산의 자원이 말라감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지배자들 사이에서는 균열이 일어났고.
그들 사이의 신경전은 마즈 전체에 조금씩 위기감을 가져오고 있었다.
“내란이 터지거든 요거 상단은 당분간 마즈에서 발을 뺄 생각입니다.”
“전쟁은 곧 상단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저희 아버지의 원칙이에요. 뭐, 카븜에서 약초를 구할 수 있게 됐으니 의약품은 유통해봐도 좋겠지만…….”
사람 목숨만큼이나 귀한 것은 없다.
아버지의 원칙에 따라 알로는 상단의 직원들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용병과 함께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만은 예외였다.
‘내란이 터지면 우리도 곤란하겠네.’
레론에서 윤도하를 찾아내지 못하면 다음은 마즈를 탐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내란이 터진다면 탐색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터.
지직! 지지직……!
그렇게 유지한이 생각이 빠져있던 때였다.
그의 품속에서 잔뜩 노이즈가 낀 소리가 들려왔다.
“실프? 왜 그래?”
—나 아닌데!
“……?!”
품속에 있는 실프가 아니라면 품에서 소리가 발생할 이유는 딱 하나뿐.
퍼뜩 놀란 그가 이제껏 가지고만 다녔던 차원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노이즈는 차원 전화기의 스피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어? 제 것도요!”
3팀의 리더가 보유한 차원 전화기도 유지한의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