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혼돈
“밖에 마법사 있나?”
“날 불렀나?”
왕의 부름에 문 앞에서 대기하던 마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야기는 다 듣고 있었겠지?”
“어느 정도는.”
“이들을 제사에 참여시킬 준비를 해라.”
“알겠다.”
마법사는 묘한 눈길로 유지한 파티를 바라보다가 다시 문을 나섰다.
면전에서 그들에게 불만을 드러내던 마법사조차도 그들이 제사에 참여한다는 소식에는 딱히 반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 김시후가 말했다.
“제사라는 게 뭐죠?”
“곧 알게 될 거다.”
카븜의 왕은 유지한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저들이 아무리 그를 분노케 한 이들과 같은 세계에서 왔다고 한들.
카븜의 방식에 따라 증명만 해준다면 믿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투타.”
“……?”
“이들의 안내는 네가 맡아라. 너는 이들과 생사를 함께한다.”
“그 말은…….”
“제사에서 이놈들이 죽는다면 너 또한 죽을 각오를 해라.”
“알겠다.”
군말 없이 왕의 뜻을 따르겠다는 투타.
유지한은 자신들의 죽음을 논하는 대화에서 제사라는 것이 그리 순탄치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할 말이 끝났으면 나가보도록.”
“잠깐.”
유지한은 퇴장을 요구하는 왕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혹시 윤도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윤도하? 그게 누구지?”
“우리와 같은 세계에서 넘어온 인간입니다.”
“들어본 적 없다.”
고개를 내젓는 카븜의 왕을 보며 유지한은 혀를 찼다.
역시나 쉽게는 찾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당신이 카븜 안에서 그를 찾아봐 줄 수 있겠습니까?”
“그 윤도하라는 인간을?”
“우린 그를 찾기 위해 카를렘에 왔습니다.”
“낭만적이군.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 이 먼 곳을 찾아왔다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흠.”
고작 사람 1명을 찾고자 위험을 감수하고 낯선 세계로 넘어왔다는 인간들.
그들의 목적을 전해 들은 카븜의 왕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카븜 안에서 그를 찾는 걸 도와주십시오.”
“내가 왜 너희를 도와야 하지?”
“우리가 그 제사라는 일에 얌전히 참여하는 조건입니다.”
“이건 너희가 그 쓰레기들과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냉정하게 말해서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들이고, 외부인인 그들의 말을 너무 믿었던 그쪽 잘못도 있습니다.”
“…….”
“당신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했으니 우리도 받아가는 게 있어야죠.”
카븜의 왕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왕의 면전에서 대놓고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니.
카븜의 인간이었다면 절대로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 좋다!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약속한 겁니다.”
“왕은 2번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번 뱉은 말은 철저하게 지킨다는 카븜의 왕.
협조를 약속받은 유지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군.’
잘하면 이 잘못된 만남을 기회로 바꿀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
3개의 달이 하나씩 차오를 때마다 진행되는 카를렘의 제사.
그중에서도 붉은 달이 차오르는 시기에 카븜은 제사 준비로 매우 혼잡해진다.
오직 카븜에서만 치러지는 특별한 행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장식이 부족하다!”
“왜 그릇이 비어있는 건가! 제사에 올릴 음식은 어디 있지?!”
“저놈이 몰래 먹었습니다!”
“네 이놈!!”
근래 심하게 다퉜던 사람들과도 서로 화해를 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시기.
카븜의 시민들은 하나 되어 제사 준비를 거들었다.
“오늘의 제사에는 왕이 직접 참석하신다!”
“정말입니까?”
“그래! 철저하게 준비하여 우리의 왕을 만족시키자!”
“우오오오!”
1년 전의 사건 이후 공식 자리에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카븜의 왕.
당장 몇 달 전에 치렀던 제사에도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제사에 참석하겠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전보다 더 힘을 내는 분위기였다.
“이쪽이다.”
카븜 내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는 가운데.
유지한 파티는 생사를 함께하게 된 투타를 뒤따라 이동했다.
그들이 이내 도착한 곳은 천장이 뻥 뚫려있는 크고 넓은 원형의 경기장.
민유리는 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가요?”
“그래.”
붉은 달이 떠오르는 시기에 카븜에서 진행되는 제사.
그 제사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이곳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준비하고 있어라.”
대기실처럼 보이는 곳에서 1시간가량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느덧 경기장의 투박한 좌석에 사람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날이 조금 어두워질 즈음에는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경기장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왕이다!”
“오오, 왕이시여!”
유독 화려하게 치장된 경기장의 상석.
그곳에 카븜의 왕이 등장하자 사람들의 환호했다.
그에 카븜의 왕은 주위를 향해 힘차게 소리쳤다.
“제사를 시작해라!”
“우와아아아아!!”
뿌우우우—!
각종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경기장에 마련된 수많은 양초에 불이 붙었다.
“왕이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는 카븜의 용맹한 전사들!”
“카븜에 한 점 부끄럽지 않도록 하자!”
경기장 안쪽에서 대기하던 카븜의 전사들이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하나같이 중무장을 갖춘 그들의 얼굴에서는 비장함이 엿보였다.
뒤이어 그들의 반대편에서는 누군가가 아래에 바퀴 달린 쇠창살을 밀며 다가왔다.
“키이아아악!”
“캬아아악!”
쇠창살에 갇혀있는 괴생명체가 소리 질렀다.
놈들은 모두 카븜의 밖에서 생포해온 혼돈이었다.
이미 온몸에 붉은 피가 잔뜩 묻어있는 혼돈들.
하지만 그 피는 놈들의 것이 아니라 놈들이 사냥한 인간의 것이었다.
“…….”
“…….”
카븜의 전사들은 굳은 얼굴로 혼돈을 주시했다.
곧 커다란 북소리가 들리고 혼돈을 가로막던 단단한 쇠창살의 문이 열렸다.
“죽여라!”
“우와아아아악!”
기세 좋게 달려드는 전사들과 괴성을 내뱉는 혼돈들이 충돌했다.
서걱! 서걱!
퍽! 퍽! 퍽!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피와 살점들.
제사를 위해 깨끗하게 정리된 경기장은 점점 더러워져 갔다.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 공격해!”
“알고 있다!”
전투의 시작은 카븜의 전사들이 우위를 점하는 모양새였다.
괜히 제사에 참여하는 건 아니라는 듯 풀려나온 혼돈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캬아아악!”
하지만 분노한 혼돈들의 반격으로 인해 분위기는 점점 변해갔다.
카븜의 전사들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끄아아악!”
끝내 혼돈에게 팔을 붙잡힌 전사는 고통에 힘겨워 비명을 질렀다.
살아있는 인간의 손이 괴물에게 조금씩 뜯어먹히는 끔찍한 장면.
하지만 구경꾼으로 참석한 사람들은 환호했다.
“붙잡혔다!”
“뭐해! 빨리 밟아버리라고!”
“카븜의 전사가 그것밖에 안 되냐!”
“우! 우! 우!”
살아있는 혼돈 무리와의 난투 끝에 목숨을 잃어가는 전사들.
하지만 시민들은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되레 환호성으로 전사들을 몰아붙이며 분위기는 과열되기만 했다.
—이딴 게 제사라니?! 기분 나빠!
“찍찍! 동감이다! 다들 맛이 간 게 분명하다!”
—과일이랑 전 올려놓고 절이나 하라고!
유지한은 투덜대는 실프와 칠라를 보며 쓰게 웃었다.
카븜에서 피의 제사라고도 불리는 붉은 달의 제사.
경기장에서 화끈한 전투를 벌인 후 패배한 측은 제단에 제물로 바쳐지는 방식이었다.
“제단에 제물을 바쳐라!”
“카븜의 수호신이 우리를 지켜주신다!”
결국 혼돈에게 패배하여 죽은 전사의 시체들은 하얀 마스크를 쓴 이들에게 수거되었다.
그들은 넓적하고 커다란 제단 위에 시체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유지한의 곁에 있던 투타는 말했다.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선왕이 살아있던 때의 제사에서는 전사들끼리만 난투를 벌였어.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매우 양호한 셈이지.”
“양호하다고?”
유지한은 대기실에서 함께 제사를 지켜보는 이들을 바라봤다.
그중에는 지금 제사에 뛰어든 전사들의 가족들도 섞여 있었다.
“루이함! 네가 마침내 카븜의 거름이 되는구나!”
“딸아! 난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아들과 딸들이 눈앞에서 죽었음에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가족들.
슬퍼하기는커녕 죽은 이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장면은.
유지한 일행에게는 살짝 소름이 돋는 광경이었다.
“여긴 확실히 이세계구나.”
이미아는 주변의 태도를 보며 이곳을 이세계라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우연히 언어 문제가 사라져서 자유롭게 대화가 가능할 뿐이지.
카를렘의 가치관은 지구의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벌써 7명이나 죽었어요.”
“계속 보고만 있어야 해요?”
전투가 끝난 후 죽은 전사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혼돈들.
민유리와 김시후는 기분 나쁜 얼굴로 그것들을 주시했다.
뒤에 이어지는 제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사들은 죽거나 심하게 다치고, 혼돈들은 신나게 날뛰었다.
“찍찍! 대장!”
“어.”
“무척 화가 난다! 찍!”
꽈아악!
방패의 손잡이를 으스러질 듯 쥐어 보이는 칠라.
철저하게 누군가를 보호하는 탱커로서 훈련받은 녀석은.
경기장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다음은 너희다.”
혼돈과 함께 열댓 명의 전사가 쓰러진 뒤.
어느덧 유지한 파티의 순서가 되었다.
유지한은 담담한 얼굴의 투타를 흘겨보며 물었다.
“우리가 지면 너도 죽게 될 텐데. 불안하지는 않아?”
“그다지. 너희 실력을 알고 있으니까.”
“…….”
유지한은 별다른 대답 없이 대기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기장에 낯선 외부인이 들어서자 구경꾼들은 수군거렸다.
“뭐야? 어디서 온 놈들이지?”
“못 보던 얼굴이네. 복장도 특이하고.”
“외부인이 제사에 참여하는 거야? 말도 안 돼.”
“우리의 왕이 직접 허락했다고 해.”
“왕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
외부인이 피의 제사에 참여하는 이례적인 사건.
카븜의 시민으로서는 카븜과 관련도 없는 것들이 신성한 제사에 참여하는 걸 불만스럽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왕의 허락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소란은 점차 줄어들었다.
지배자인 그의 뜻이 곧 카븜의 뜻이었기에.
팟!
상석에 앉아있는 카븜의 왕은 한쪽 팔을 길게 뻗으며 제사의 시작을 알렸다.
드르르륵—!
유지한 파티의 맞은편에서 새로운 쇠창살이 등장했다.
직전과 마찬가지로 혼돈을 가둬둔 간이 감옥이었다.
고작 한 개체밖에 존재하지 않는 감옥.
그러나 거기에 갇혀있는 혼돈은 앞서 등장했던 놈들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키기기기…….”
어지간한 인간보다 큰 사마귀의 몸과 날개, 독수리의 것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발톱.
심해에서 등장하는 물고기처럼 흉측한 이빨이 두드러지는 얼굴.
쇠창살 안에서 난동을 부리던 놈들과는 다르게 녀석의 행동은 유독 얌전했다.
“히익!”
“쉿! 소리 내지 마!”
바퀴 달린 쇠창살을 앞으로 밀며 다가오는 이들은 숨을 죽였다.
지금 갇혀있는 녀석을 생포하기 위해 15명 이상의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녀석이 유지한 파티의 앞에 도달했을 때.
“시작해라.”
두둥!
커다란 북이 두들겨짐과 동시에 쇠창살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자유의 몸으로 풀려난 혼돈은 그 즉시 날개를 펼치며 앞으로 날아들었다.
“찍찍! 어림없다!”
쾅!
발톱을 앞세운 돌진은 칠라의 방패에 가로막혔다.
무려 10명이 넘는 인간들을 가뿐하게 죽여버린 발톱이거늘!
방패에 고작 작은 흠집밖에 만들어내지 못한 혼돈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키기기긱!”
당황한 녀석을 향해 쏟아져 내라는 마력 화살과 마법들.
날개를 퍼득거리며 공격을 피하던 혼돈은 잔뜩 짜증을 부렸다.
파앙!
땅을 박차고 달려간 이미아는 녀석에게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주먹 하나하나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감지한 혼돈이 필사적으로 공격을 회피하던 그때.
“키기긱?!”
혼돈의 시야에서 유지한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쳐버린 녀석이 당황하는 찰나.
“여기다.”
혼돈의 등 뒤에서 등장한 유지한이 녀석의 목에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큐디에 의해 부드러운 푸딩처럼 푹 패여버리는 혼돈의 몸.
유지한은 실프의 마력을 그대로 큐디에 불어넣었다.
타다다닥!
드리미움으로 이뤄진 검면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간 마력은.
바람의 갈고리로 변하여 혼돈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몸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오오…….”
“외부인들도 꽤 하는데?”
강력한 혼돈을 찍어누르는 그들의 능력에 구경꾼들이 감탄하던 때.
유지한은 샘플링을 사용했다.
<—저놈의 머리를 카븜의 왕에게 날려버리는 방법>
그가 원하는 결과는 곧 눈앞의 흐릿한 잔상으로 펼쳐졌다.
몸을 아주 격하게 회전시키며 발등으로 정확히 혼돈의 머리를 차버리는 잔상.
휘리리릭!
유지한은 정확히 그 잔상과 똑같이 몸을 회전시켰다.
몸을 보조하는 와이어를 주렁주렁 달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움직임.
세찬 팽이처럼 돌아가는 그의 몸에서 뻗어진 오른발이 혼돈의 머리를 강타했다.
퍼어어어엉!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혼돈의 몸에서 분리된 머리가 하늘로 높게 치솟았다.
머리통이 날아가는 방향은 정확히 카븜의 왕이 앉아있는 자리였다.
탁!
카븜의 왕은 자신에게 날아온 머리통을 손으로 낚아챘다.
거기서 튀어나온 핏방울이 그의 팔과 값비싼 옷을 더럽혔다.
“아, 아니 이런…….”
“저놈들이 감히!”
왕의 몸이 저급한 존재의 피로 더럽혀지자 부하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조용해지다 못해 싸늘해지는 분위기.
“크하하, 크하하하—!!”
하지만 카븜의 왕은 되레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너희는 확실히 그 쓰레기들과는 다르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
불편한 자리에 자신들을 초대한 것에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는 행동이었음에도.
카븜의 왕은 그들을 기분 좋게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