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카븜 (4)
“왕! 네가 굳이 이들을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
“내가 만든 전사의 규칙을 어기라는 것인가?”
“어차피 지금까지 사용하는 이가 단 1명조차 없었던 규칙이다! 이놈들 정도는 나 혼자서도…….”
“그만!”
문 너머에 있는 왕이 명령하자 마법사가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그에게 반대하는 건 그리 좋은 처사가 아니었기에.
분한 표정의 마법사가 유지한을 바라보며 으르렁댔다.
“허튼수작을 부렸다가는 죽는다.”
“어서 문이나 열어주시지.”
끼이익—
쓸데없이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천장이 매우 높고 큼지막한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왕의 거처.
재질을 알 수 없는 조명의 빛이 갖가지 보석에 반사되어 유지한 일행의 눈을 괴롭혔다.
‘저 사람인가.’
카븜의 왕은 입구 맞은편에 설치된 황금 왕좌에 걸터앉아 있었다.
카븜에서 본 전사들보다 키가 크고 우람한 근육들.
1급 영웅을 마주할 때나 느꼈던 강자의 기세가 그에게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괜히 왕이 아니군.’
카를렘에서 마주친 카를렘의 현지인 중 가장 독보적인 기운이었다.
왕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전사라고 여겨진다는 카븜.
그 이야기가 아무래도 헛소문은 아닌 듯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마법사와 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전사 투타를 제외한 나머지는 나가 있어라.”
“하지만!”
“나가.”
“……!”
왕이 짧게 내뱉은 말이 듣는이들에게 묵직하게 내려꽂혔다.
마법사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명령에 따라 문밖으로 나섰다.
거처에 남은 건 유지한 파티와 긴장한 투타, 그리고 카븜의 왕뿐.
“으음?”
“찌, 찍?”
손으로 턱을 괸 왕의 시선이 칠라의 전신을 훑었다.
신기한 걸 발견한 듯한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동물이군.”
“찍찍! 난 인간이다!”
“사람 말도 할 줄 아는 건가? 매우 똑똑하구나. 그렇지만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하지는 마라.”
“찍…….”
“네가 내뱉는 호흡과 신체 구조는 절대로 인간의 것이 아니다.”
칠라의 동그란 귀가 아래로 살짝 쳐졌다.
말로 쉽게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 안에서도 어떤 기운이 느껴지는데.”
카븜의 왕은 유지한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반쯤은 감춰진 정령의 마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에 응답하듯 유지한은 실프를 밖으로 꺼내 보였다.
—안녕!
“허! 넌 설마 정령인가?”
—응? 정령을 본 적이 있어?
“카를렘에도 극소수나마 정령과 계약한 이들이 존재하지.”
카를렘에 정령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카븜의 왕은 정령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정령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수가 적으니까.”
곧이어 왕의 눈이 투타에게 닿았다.
그 시선을 받은 투타는 차렷 자세를 한 채로 완전히 굳어버렸다.
“넌 분명 5달 전 정예병에 올랐던 전사 투타가 맞겠지.”
“그, 그렇다.”
“왜 네가 이들을 감싸준 거지?”
“이들이 사악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이들은 내게 혼돈을 양보하고, 밥을 나눠줬다.”
“호오, 일리가 있군.”
“그것도 꽤 맛있는 밥이었다!”
외부에 나가 있는 게 아니라면 반드시 하루 4끼에서 5끼를 챙겨 먹는 게 정상으로 여겨지는 카븜.
그만큼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니만큼 밥을 나눠줬다는 대목에서 카븜의 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지한은 부닥친 문제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품었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왕이라는 자리는 장식이 아닌 듯, 그는 추가적인 근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투타가 왕에게 내밀만한 근거는 딱히 없었다.
“저기…….”
김시후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말했다.
“반대로 우리가 사악한 존재라는 증거는 뭔데요?”
“이 특수한 안약에 반응했으니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있고요?”
“적어도 카를렘이 아니라는 건 안다.”
유지한 파티가 카를렘이 아닌 외부에서 찾아온 존재임을 알고 있는 왕.
그런 그에게 김시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전부 사악한 존재라는 건가요?”
“그렇다.”
“왜요?”
“……너희 같은 인간들이 우릴 속였으니까!”
콰앙!!
카븜의 왕이 주먹으로 왕좌를 내려쳤다.
그 여파로 왕좌의 한쪽 팔걸이가 부서져 버렸다.
“그때 내가 너희를 믿지 말았어야 했어.”
“자꾸 ‘너희’라고 부르시는데……. 당신이 지금 떠올리는 사람들이랑 저희 돼지국밥 용병단을 하나로 엮지 말아 주세요.”
“돼지국밥?”
“흠흠! 여기서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김시후는 카븜의 왕을 분노하게끔 만든 이들과 카를렘 원정대를 구분해달라고 요청했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왕이 말했다.
“돼지국밥. 너희는 러시아에서 온 인간들이 아닌가?”
“뭐요?”
“……러시아?”
“러시아?”
“러시아요?”
아니, 이런 자리에서 갑자기 러시아가 언급되다니.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유지한 일행은 모두가 벙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유지한은 설마 하며 물었다.
“당신을 분노케 한 사람들이 러시아 출신입니까?”
“그래! 알고 있는 모양이로군.”
“알고 있긴 합니다만.”
“역시 한패가 맞았나!”
“아닌데요.”
“그 빌어먹을 놈들만 아니었어도 전쟁은 없었을 텐데……!”
1년 전.
카븜에는 자신들이 다른 차원에서 찾아왔다고 주장한 이세계인들이 등장했다.
낯선 복장이지만 그들의 말투는 카를렘의 현지인과 비교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기에.
왕은 처음에 그들을 매우 의심했다고 한다.
“카븜의 시민 중 자유롭게 읽고 쓰기가 가능한 건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카를렘 밖에서 찾아왔다는 주제에 그들보다 말을 잘하더군.”
“차원을 뛰어넘으면 해당 차원의 언어 능력이 주어지는 모양입니다.”
“그 쓰레기들은 내게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다.”
카븜의 왕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세계.
반신반의하던 그는 현대 지구에만 존재하는 지식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들에게 점차 호감을 느꼈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아, 저 알아요.”
이미아는 카븜의 왕이 들려준 이름을 알아들었다.
책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대문호라고 했었나. 그의 이야기가 재밌긴 했어.”
카를렘과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는 러시아의 문화.
그는 특히 러시아에서 많은 이들이 하루 3끼를 꼬박 챙겨 먹는다는 걸 좋아했다.
카븜을 제외한 다른 세력들은 하루에 먹는 식사가 딱 2번 정도로 적은 편인데.
식사 횟수가 꽤 많은 것이 카븜과의 공통분모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후한 대접을 베풀었다. 매일같이 맛있는 밥을 먹였고, 편한 잠자리를 제공했지.”
러시아로 돌아갈 길이 없는 이들에게 친구라며 부르며 손을 내밀었던 카븜의 왕.
그런데 그들이 어느 날 다른 지역이 궁금하다며 카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직후.
모든 일이 틀어져 버렸다.
“그놈들은 커다란 상처를 입고서 돌아왔다.”
——레, 레론과 마즈의 지배자들이 우리를 강제로 납치하려고 했습니다……!
레론과 마즈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쳐왔다는 러시아인들.
——감히 내 친우들을 건드리다니!!
그들을 아주 가까운 친구로 여겼던 카븜의 왕으로서는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릴 함부로 건드렸다는 이유로 다른 세력에게 보복했지.”
“혹시 1년 전에 벌어졌다는 다툼이라는 게…….”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인들의 사건은 작은 불씨에 불과했지만.
그 불씨는 점차 커다란 불길이 되어 세력 간의 다툼으로 이어졌다.
다른 세력들이 서로 손을 잡고 공격했다고 여긴 카븜은 전쟁을 준비했고.
그에 따라 레론과 마즈 또한 병력을 끌어모으며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들이 한 말이 전부 거짓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버렸다.”
“그놈들은 어떻게 됐죠?”
“내가 직접 처단했다.”
카븜의 왕은 한때 친구로 여겼던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
이후 세력 간의 다툼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빠르게 중단되고야 말았다.
애초에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싸움이었으니까.
짧은 이야기를 마친 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러시아라는 세상은 실존하는가?”
“그곳은 하나의 국가에 불과합니다. 이곳의 세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죠.”
“우리는 러시아와 다른 국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설령 같은 국가에서 찾아온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과는 전혀 사상이 다를 겁니다.”
“…….”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침묵하는 카븜의 왕.
그때 번뜩 3팀을 떠올린 유지한이 말했다.
“먼저 잡혀 왔다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있다.”
“설마…….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죠?”
“그쪽은 너희와 다르게 얌전히 투항했다더군. 내가 직접 만나보진 못했다. 만나면 죽여버릴 것 같았으니까.”
까드드드득—!
부서진 왕좌를 짓누르는 그의 손바닥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다.
유지한은 그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혹여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줬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요구하거나, 보복하겠습니다.”
“허! 내 앞에서 보복을 논해? 참 대단한 자신감이군.”
찌리릿!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카븜의 왕을 주시하는 유지한.
시선이 교차하며 스파크가 튀기는 상황에 이르자 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자신의 힘을 몰라본 것이 아닐 텐데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왕의 면전에서 저딴 말을……!’
투타는 왕과 신경전을 치르는 유지한에게 경이로움을 느꼈다.
몸이 떨려오는 그로서는 당장이라도 뒤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말이다.
한동안 말이 없던 카븜의 왕은 콧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돼지국밥. 너희는 그 쓰레기들과 다르다, 이건가?”
“그런 셈이죠.”
“내 앞에서 증명할 수 있나?”
카를렘에 혼란을 가져왔던 이들과 돼지국밥 용병대가 다르다는 걸 증명해달라는 카븜의 왕.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유지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희가 그걸 증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카븜에는 있다.”
“그게 뭡니까?”
“너희의 힘을 증명해라.”
“힘?”
“입으로만 나불나불 떠들었던 그놈들과 너희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내게 보여.”
개인의 무력 또는 힘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카븜의 기조.
그러한 기조에 따라 카븜의 왕은 유지한 파티의 힘을 확인하고자 했다.
1년 전 찾아왔던 지구인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쓰레기들은 약했다. 그래서 내게 매달렸지.”
“…….”
“진심을 보여준다면 너희를 믿어보겠다.”
정말이지 무식한 방법이라는 것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유지한은 비로소 이들이 바바리안임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생활 습관이나 태도 따위가 그가 기억하는 바바리안들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당신이랑 싸우면 되나?”
“겁도 없군. 기세는 좋지만 까불지는 마라. 죽는다.”
“내가? 아니면 당신이?”
무표정으로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펴 보이는 이미아.
왕이 허락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주먹을 뻗을 셈이었다.
민유리는 정말로 싸움이 일어날까 봐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미아라면 이곳에서도 충분히 판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투타가 말했다.
“왕이여. 혹시 이들을 제사에 참여시킬 건가?”
“그래.”
“하지만 카븜의 역사상 외부인에게는 한 번도 허락된 적이 없는…….”
“내가 허락하겠다.”
카븜의 왕은 눈을 번뜩였다.
카븜이라는 세력의 지배자이자 진리, 카븜 그 자체.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카븜의 소유인 이상.
그 누구도 그의 뜻에 거스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