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카븜 (3)
여관으로 들어온 이들은 하나같이 부릅뜬 눈으로 유지한 파티를 노려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들.
마치 전쟁터에서 적을 마주한 듯한 분위기였다.
“당신은 물러나.”
“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이미아는 소식을 전해준 여성을 옆으로 물러나게끔 했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주먹을 꽉 쥐는 그녀의 태도는 전투태세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조금이라도 일행에게 피해를 준다면 반격을 가할 셈이었다.
“기다려.”
유지한은 팔을 뻗어 그런 이미아를 만류했다.
외부인인 그들이 카븜 안에서 난동을 부린다면 요거 상단의 계획은 모두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상황을 안정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대화가 우선이었다.
“당신들 뭐야?”
“잡아라!”
“……!”
그러나 상대측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여관으로 들이닥친 카븜의 전사들은 유지한 파티를 향해 달려들었다.
“찍찍! 조심해라!”
퍽!
이미아는 칠라의 경고를 흘려들으며 가장 앞에서 다가오는 남자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정통으로 얻어맞은 어퍼컷으로 얼굴이 뒤로 확 꺾이면서 정신을 잃어버리는 남자.
뒤이어 2명의 전사들이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콱!
하지만 이미아는 오러를 두른 양손으로 2개의 검날을 동시에 낚아챘다.
그대로 손가락에 힘이 불어넣자 무척 단단해 보이는 검 2자루에 균열이 일어났다.
쩌적!
끝내 반으로 두동강 난 검의 파편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한순간에 무기를 잃어버린 이들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고.
이미아의 무시무시한 완력과 더불어 오러를 본 카븜의 전사들은 잔뜩 긴장하며 말했다.
“오러 사용자다!”
“상대를 무시하지 마! 전력을 다해!”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오러를 과시하듯 뿜어내는 전사들.
이미아는 손에 묻은 쇳가루를 털어내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서로를 노려보며 잠깐의 대치가 이뤄지던 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투타가 소리쳤다.
“이건……. 이건 뭔가 잘못됐다!”
“뭐라?”
“뭐가 잘못됐다는 말이냐?”
“나와 함께 밥을 먹었던 저들이 그렇게 나쁜 놈들일 리 없다!”
함께 식사를 했던 유지한 파티와 대립하는 것을 망설이는 그의 태도.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우리의 마법사가 준 물건이다. 눈에 흘려 넣으면 눈으로 사악한 것들을 구분할 수 있지.”
“마법사가…….”
“믿기 힘들다면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라.”
투타는 잠깐 망설이더니 안약을 양쪽 눈에 한 방울씩 투여했다.
그리고는 유지한 파티를 바라봤는데 그의 시야에서 오직 그들만이 붉게 강조되어 보였다.
카를렘의 존재가 아닌 것을 감지하는 안약의 효과가 발동한 것이었다.
“투타.”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너에게 매우 실망했다, 투타.”
“뭐라고?”
“우리는 너희의 요청으로 우리가 해치웠던 혼돈을 기꺼이 양보했다.”
“…….”
“우리는 어제 처음 만난 너희와 음식을 나눴고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 친절을 배신으로 보답하는구나!”
유지한의 외침에 투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그의 말대로 투타 일행은 그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었다.
한데 빚을 갚기는커녕 그들을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으니.
당황한 투타가 손을 빠르게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건 절대로 내 뜻이 아니다!”
“명예로운 카븜의 전사는 은혜에 보답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은혜를 저버리는 비열한 놈들이었던 모양이지?”
“그렇지 않다!”
“감히 카븜의 전사를 욕보이다니……!”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다른 전사들은 단지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에 화를 냈다.
그리고 긴장감이 이어지던 그때.
투타가 동료들과 유지한 파티의 사이로 걸어 나왔다.
“뭐 하는 짓이냐, 투타.”
“이게 나의 뜻이다.”
투타는 유지한 파티를 등진 채 양팔을 쫙 벌려 카븜의 전사들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카븜의 전사들은 그에게 말했다.
“네가 미친 건가?”
“제정신이 아니군.”
“내가! 내가 책임지겠다.”
“뭘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말이냐?”
“…….”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투타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 카븜의 전사 투타가 왕께 알현을 요청한다.”
*****
갑작스러운 투타의 행동으로 유지한 파티와 카븜의 전사들은 대치를 중단할 수 있었다.
카븜의 전사들이 먼저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투타. 너는 우리 중에서도 꽤 훌륭한 전사다.”
“나로서는 왜 네가 위험을 부담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부디 멍청한 짓이 아니기를 바라지.”
여관에서 물러나는 전사들은 입을 다문 투타에게 한 마디씩 던지고 사라졌다.
마지막에 여관에 남은 건 유지한 파티와 카븜의 전사 투타뿐이었다.
“찍찍…….”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깨달은 칠라는 방패를 내려놓았다.
뒤이어 유지한이 투타에게 다가갔다.
“투타.”
“실망스러운 꼴을 보여서 미안하다.”
몸을 뒤로 돌린 투타가 유지한에게 허리를 숙였다.
유지한은 그의 허리가 펴지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최근 카븜의 전사들은 카븜의 마법사가 만든 안약을 지급받고 있다. 듣기로는 이 안약으로 사악한 것들을 구분할 수 있다더군.”
“거기에 우리가 걸린 건가.”
“지금 내 눈에는 너희의 모습이 붉게 보인다.”
“오직 우리만?”
“그래. 너희만.”
안약을 투여한 투타의 시야에 너무나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유지한 파티.
유지한은 투타의 손에 들린 빈 안약 용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세계인을 감지하는 안약인가.’
확신에 가까운 가정이었다.
형형색색의 머리칼과 다양한 생김새가 존재하는 세계인만큼.
착용한 장비 따위를 제외하면 카를렘의 인간과 지구의 인간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희가 사악한 놈들이라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믿어줘서 고맙네.”
“그런데 왕을 알현한다는 말은 뭐예요?”
“그건…….”
민유리의 질문에 투타는 말끝을 흘렸다.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것이었다.
“카븜에서 인정받는 전사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특권?”
“전사 다수와 전사 개인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왕을 알현하여 문제의 판단을 맡길 수 있다.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으음…….”
정말로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만 주장할 수 있는 전사의 권리.
투타는 유지한 파티를 위해 그 권리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내 목숨이 결정된다.”
“뭐라고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목숨이라는 단어에 민유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투타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의를 제기한 개인의 의견에 왕이 반대할 경우 그 특권을 사용한 자는 처형된다.”
“죽어? 진짜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상에야 왕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지.”
“그런 무식한……!”
“그것이 카븜의 규칙이다. ”
왕 개인의 의견에 따라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위기.
투타는 그런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
“만약 내가 틀렸다면, 처형되기 전에 반드시 너희를 죽이고 가겠다.”
투타가 흉흉한 눈빛으로 유지한 파티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죽게 된다면 이들 모두를 무덤까지 끌고 갈 생각이었다.
“왕에게 네 모든 걸 맡기겠다는 건가?”
“우리의 왕은 현명하고 강인하다. 그가 너희와 대화를 나눠보면 너희들이 어떤 인간인지도 알 수 있겠지.”
“왕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요?”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자신이 모시는 왕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카븜의 전사는 그런 이들이 모여있는 집단이었다.
*****
유지한 파티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기로 했다.
왕은 개인의 일정이 있기에 곧바로 만날 수가 없다는 모양이었다.
“제사 준비가 한창이네요.”
김시후는 밤중에도 여관 앞을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마차에 실린 짐이나 등에 짊어진 것들은 전부 붉은 달이 차오르는 날 제사를 치르기 필요한 도구들이었다.
여관 바로 앞쪽에도 다량의 양초더미가 놓여있었다.
“사악한 놈들이 섞여서 제사에 부정이 타겠군.”
“그거 우리보고 하는 말이야?”
“…….”
유지한 파티를 감시하는 전사는 이미아의 말에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에잇!
그때 실프가 유지한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날아오르는 구체를 보고 놀란 전사를 향해 실프가 소리쳤다.
—야! 멍청아! 네가 뭔데 우리한테 까불어?
“멍청이? 나한테 하는 말인가?”
—그래, 이 멍청아! 얼른 네가 존경하는 왕한테 가서 똥꼬나 빨아라!
“또, 똥꼬를 빨라니?! 이런 천박한 덩어리가!”
—멍청이! 멍청이!
실프가 말을 뱉을 때마다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전사의 얼굴.
유지한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실프를 낚아채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화를 내던 카븜의 전사에게 말했다.
“내일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를 건들지 마라.”
“하! 왕은 분명히 너희를 처단할 거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경고다.”
유지한은 오른발로 땅을 내려찍었다.
슈우우우—!
발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싸늘하고 스산한 바람.
그 바람은 유지한을 비아냥대던 전사의 전신마저 훑었다.
“……헛!”
카븜의 전사는 자신의 피부를 스치는 바람에게서 살기를 느꼈다.
땀을 식혀주기보다는 되레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바람이었다.
그는 굳이 유지한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제든지 너를 죽여버릴 수 있다.]
바람에 실려 있는 짧고도 강렬한 메시지를.
“허어업!”
한순간 숨이 막혔던 전사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그렇지 않고서는 목이 잘려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왜 그러고 있냐?”
“……!”
그를 향해 편하게 말을 거는 유지한.
자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벼, 별일 아니다!”
“그래.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크윽.”
바람이 멎은 뒤에도 거칠게 호흡을 하던 전사는 어딘가 답답했는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미아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성격이 많이 독해졌네.”
“그런 세상이잖냐.”
유지한은 쓰게 웃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만 살아서는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세상.
지구든 카를렘이든 조금씩 차이만 있을 뿐.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별반 다르지 않은 세상이었다.
*****
다음날.
유지한 파티는 전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카븜의 구역을 가로질렀다.
본래 외부인에게 출입이 허락된 구역은 11, 12, 13구역뿐이지만.
그들은 10구역을 가로질러 9구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왕이 거주하는 구역은 어디지?”
“7구역이다.”
“1구역이 아니라?”
“선대 왕은 1구역에 있었지만, 현 왕이 7구역으로 옮겼다.”
단지 7이라는 숫자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거처를 옮겼다는 카븜의 왕.
지구에서 숫자 7이 행운을 가져다주는 수로 여겨지는 걸 생각하면 재밌는 일이었다.
‘우연인가?’
카를렘에서는 7이라는 숫자에 별다른 의미가 없거늘.
굳이 7을 원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자들인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이동한 끝에 도달한 곳은 7구역에 위치한 왕의 궁전.
고깔모자를 착용한 마법사가 유지한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유지한은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우리보다 먼저 잡혀 온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
“……있긴 했지.”
“지금은 어딨지?”
“네놈이 알 필요 없다.”
“아니. 난 알아야겠다.”
카븜에 방문했던 3팀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마법사.
자리에 멈춰선 유지한은 대답을 거부하는 그와 눈싸움을 벌였다.
옆에서 전사들이 유지한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애를 썼지만 땅에서 발바닥조차 떨어뜨리지 못했다.
‘이 녀석…….’
마법사는 온몸이 붉게 보이는 유지한에게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대개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되는 식물이나 동물에게서 받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보석으로 치장된 문 안쪽에서 낮고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여보내라.”
“……!”
카븜의 가장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남자.
카븜을 지배하는 왕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