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카븜
“프아 상단이 문을 닫는다고?”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에구머니나! 상단주가 살인을 시도했다고 해요!”
“쯧쯧……. 그 물건값 비싸고 욕심 많은 곳에서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지.”
현장에서 체포당한 프아 상단주가 감옥에 투옥된 뒤.
내부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프아 상단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프아 상단에 물건을 공급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들과의 거래를 중단했고.
상단에 속해있던 직원들은 이대로는 가망이 없다는 걸 인지하고 하나둘씩 상단을 빠져나왔다.
“경력직 모집합니다!”
어제의 적은 내일은 동료라고 했던가.
알로는 한순간에 실업자가 된 프아 상단의 인력들을 대상으로 공개 채용을 실시했다.
그 덕분에 장거리 운송이나 유통 따위에 경험이 있는 직원들을 여럿 데려올 수 있었다.
현금 보유량이 많은 상단답게 거침없는 행보였다.
“프아 상단의 유통망이 찢어지는 중이군.”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규모 있는 상단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다른 상단들은 그에 따라 반사 이익을 얻었다.
동시에 이번 일이 요거 상단에 의해 밝혀진 게 알려지자 그들은 요거와 적대하려던 행동들을 중단했다.
척을 져서 이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귀족들이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알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론의 지배 계층에서도 라쿠아이드라는 도시를 관리하는 여러 명의 귀족들.
본래 상단에 소속된 사람들 외에는 이번 일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도시를 관리하는 귀족들은 요거 상단에 관심을 드러내며 알로에게 연회의 참석을 요청했다.
“참석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음……. 혹시 레론의 연회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잘 모릅니다.”
“레론에서 도시를 관리하는 귀족들이 주최하는 연회는 기간이 꽤 깁니다.”
1개의 도시에서 반년에 1번 정도로 개최되는 귀족들의 연회.
그 연회는 한 번 시작되면 최소 일주일 이상 쉬지 않고 진행된다.
그리고 연회의 참석자들은 그 기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해야 한다.
강제성을 띠는 건 아니었지만, 일종의 관습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귀족 가문에서는 도시를 순회하며 연회에 참석하는 일을 전담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정도죠.”
“찍찍! 매일 같이 맛있는 걸 먹어서 좋겠군!”
“꼭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심지어 라쿠아이드는 연회가 유독 긴 것으로 유명해요.”
아무리 성대하고 잘 꾸며진 연회라도 쉬지 않고 반복해서 참여하다 보면 지겨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귀족들과 함께하는 불편한 자리인 만큼 연회에 직접 참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알로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꼈다.
“얼마나 걸리죠?”
“이번 연회는 최소 10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제사와 겹쳐서요.”
1개의 달이 완전히 차오를 때마다 카를렘에서 진행한다는 제사.
며칠 뒤 붉은 달이 차오름에 따라 귀족들의 연회와 제사의 일정이 겹치다 보니.
평소보다 연회 기간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저번 일로 요거 상단은 이 근처 귀족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단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저는 이 초청을 거부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지역에 다녀오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요?”
“카븜입니다.”
카를렘의 3대 세력 중에서도 카븜.
모든 세력 중에서도 가장 축복받았다고 알려진 땅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카븜에서 자라는 과일과 채소들은 하나 같이 달고 맛있다고 알려지며.
카븜에서만 채취가 가능한 약초들은 영험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가장 폐쇄적인 지역이랬지.’
카를렘을 나누는 3개의 세력 중에서도 가장 접근하기가 어려운 세력.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외부인은 해당 지역에 입장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요거 상단은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한 끝에 그 자격을 따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미 3팀이 카븜으로 갔을 텐데요.”
“지한 씨 일행은 그 대열에 합류해서 같이 돌아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알로는 내가 맡고 있으마.”
턱!
와타나베는 알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연회에 아주 맛있는 술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겠다?”
“네, 네! 라쿠아이드는 레론에서도 유독 다양한 술을 맛볼 수 있는 장소죠. 연회가 긴 만큼 술의 종류도 날마다 아주 다양하게 제공될 겁니다.”
“느하하하!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쉽게 맛보기 힘든 이세계의 술을 한 자리에서 접해볼 수 있는 기회.
장기간 치러지는 연회인 만큼 고가의 술도 아낌없이 풀릴 예정이었다.
애주가인 와타나베로서는 돈을 내고서라도 참여하고 싶은 자리인 것이었다.
*****
카븜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유지한 파티는 각자 짐을 챙겼다.
이동에 필요한 물품은 모두 요거 상단에서 마련해주었기에 크게 준비할 건 없었다.
“찍찍. 이게 내 마차인가?”
“저 안에 올라타시면 됩니다.”
“조금 좁군! 찍!”
“네 몸이 큰 거야.”
“찍! 방패로 맞고 싶나?”
요거 상단의 상징이 그려진 마차 위에 칠라와 김시후가 올라탔다.
칠라와 방패의 부피가 있어서인지 김시후가 낑겨 타는 모양새였다.
마부석에 앉은 유지한과 민유리는 와타나베를 내려다봤다.
“술은 적당히 드시고요.”
“느하하! 거인은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다녀와라.”
“이랴!”
우람한 크기의 말 2마리가 민유리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옆자리의 유지한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 끄는 방법은 언제 배우셨어요?”
“근처 마부한테 돈 좀 쥐여주고 배웠어요.”
“역시 운전 잘하는 사람은 뭔가 다른가…….”
한국에서 운전을 잘 하는 사람답게 민유리는 마차를 끄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상당히 좋은 마차를 꺼내준 것인지 흔들림도 덜 했다.
마차에 있던 김시후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라쿠아이드의 시민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여긴 이종족이 없나 봐요.”
라쿠아이드는 이종족이 단 한 명조차 보이지 않는 도시였다.
드워프인 프란이 카를렘에서 넘어왔던 걸 고려한다면 꽤 예상외의 장면이었다.
“종족별로 따로 나뉘어 산다고 하더라.”
“흐음…….”
이종족들과 어울려 살고자 하는 지구와는 다르게.
카를렘은 아예 종족마다 거주지가 나뉘어 있는 세계였다.
어지간해서는 인간들의 도시에서 이종족을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차별이 꽤 심한 것 같던데.’
드워프로서 카를렘에 다시는 발조차 들여놓고 싶지 않다고 했던 프란이었다.
성격이 우직하고 착한 그가 그렇게나 강경한 태도를 보일 정도라면.
한국에서 이뤄지는 것보다도 종족 차별이 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주변에 사람 없겠죠?”
라쿠아이드를 조금 벗어나자 개발되지 않은 황무지가 나왔다.
카를렘에서 도착해서 한참 헤매고 다닐 때 걷던 곳이었다.
그때 유지한이 품속의 실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작하자.”
—드디어!
존재를 감추고 있던 실프가 그의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왔다.
실프가 기지개를 켜듯이 밝은 초록빛을 뿜어내자 주변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지한! 나 많이 답답해! 자주 꺼내줘!
“생각해보고.”
—우씨!
“찍찍! 얌전히 대장의 주머니에 들어가라!”
—너, 때린다?
칠라와 으르렁거리던 실프가 곧 마차의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후우웅!
지붕에서 뻗어져 나오는 실프의 마력이 이내 마차 전체를 휘감았다.
김시후는 은은한 초록빛으로 뒤덮인 마차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랴!”
“이히히힝!”
민유리는 2마리의 말을 최고 속도로 달리게끔 유도했다.
그에 따라 마차의 속도는 조금씩 높아져만 갔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이히힝?!”
“이히히힝!!”
마차의 속도에 놀라는 건 사람이 아닌 말이었다.
본인들이 실프의 도움을 받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버프로 인해 체력조차 강화되었으니 의문이 계속될 따름이었다.
“바퀴 멀쩡하지?”
“실드 사용하고 있어요!”
김시후는 마차에 달린 바퀴의 이음새를 마법으로 감쌌다.
바퀴의 빠른 회전으로 인한 마찰로부터 마차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평범한 마차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
유지한 파티는 밤이 되어 달이 뜨기까지 마차를 타고 질주했다.
지도로 보아 딱 예상한 만큼의 거리를 이동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라쿠아이드의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되돌아갈 수도 있으리라.
“누나! 텐트 다 폈어요!”
“수고했어. 미아 씨도 이리 오세요!”
“저 지구에서 홍차 티백 가져온 거 있는데.”
“오! 뜨거운 물 준비할까요?”
그리고 그들이 야영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주인! 뭔가 다가온다! 찍!”
“……!”
방패를 든 칠라가 민유리의 앞으로 나옴과 동시에.
민유리는 주변에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활을 집었다.
[이글 아이]
어둠을 무시하는 민유리의 눈이 다가오는 상대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팡!
그녀의 활에서 힘차게 발사된 마력 화살이 수풀로 쏘아졌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꺾어진 화살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가며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피해냈다.
이윽고 화려한 서커스를 벌이던 화살이 목표에 도달하기 직전.
‘지금이다!’
민유리는 활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읽었다.
아티팩트로 완성된 그녀의 활은 날아간 화살과 연결되어 눈으로 보지 않고도 목표물과의 거리를 알 수 있었다.
[형태 변화 - 성게]
이윽고 1발의 화살은 30개가 넘는 뾰족한 가시를 가진 성게의 모양으로 변하여 적의 몸을 꿰뚫었다.
“꽥!”
단단한 가시 모양의 마력은 이름 모를 동물의 몸에 수많은 구멍을 만들어냈다.
온몸의 상처에서 피를 쏟아내며 즉사하는 녀석.
하지만 주변에서 다가오는 건 쓰러진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라이트하우스]
파아아앗!
어두운 밤하늘에 위로 높게 떠 오르는 빛의 구체들.
김시후의 마법이 텐트를 중심으로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밤중에 해가 떠오른 듯 맨눈으로도 모든 것을 식별할 수 있었다.
“저게 다 뭐야?!”
김시후는 모습을 드러낸 동물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얼굴의 생김새는 지구의 하마와도 비슷하게 생겼지만.
몸에는 2개의 날개와 갈색 털로 뒤덮인 두꺼운 다리가 달려있었다.
여러 동물을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였다.
서걱!
그리고 그 괴생명체는 유지한에 의해 몸통 전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의 검인 큐디는 검날에 묻은 녀석의 붉은 피를 빨아들였다.
마치 뱀파이어처럼.
‘보인다.’
잠시 후 유지한의 시야에는 괴생명체의 왼쪽 눈이 붉게 강조되어 보였다.
드리미움으로 제작된 큐디의 능력 중 하나.
피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적의 약점을 파악하는 힘이었다.
“왼쪽 눈을 노려.”
“알았어.”
퍽! 퍽! 퍽!
앞으로 뛰쳐나간 이미아가 주먹과 발을 휘두를 때마다 괴생명체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공격 하나하나가 마치 코앞에서 작은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위력.
그러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그녀의 존재는 적들에게 다가오는 죽음과도 같았다.
‘움직임이 뻔한 놈들이군.’
푹! 푹!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었는지 최대한 눈을 보호하는 괴생명체였지만.
유지한이 보유한 큐디의 날카로움은 녀석들의 질긴 가죽과 함께 약점까지 찢어발겼다.
눈을 다친 녀석들은 하나같이 바닥에서 경련하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네요.”
“이놈들은 대체…….”
“잠깐만. 뭐가 더 있어.”
유지한은 처음 만난 생명체를 조사하려던 김시후를 멈춰 세우고.
뒤에서 다가오는 놈들에게 큐디를 겨눴다.
“그만!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다.”
“……?”
상대는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간들이었다.
얇은 바지를 입고 상체는 전부 드러낸 근육질의 남자들.
유지한은 그들을 경계하며 말했다.
“너희는 누구지?”
“나는 카븜의 명예로운 전사, 투타!”
“카븜?”
“그렇다!”
쿵! 쿵!
문신이 그려진 가슴을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
유지한은 책으로 읽고 알로가 들려줬던 카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기 자신을 카븜의 전사라고 부르는 존재라면…….’
카븜이라는 세력이 이끄는 직속 병사들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놈들을 쫓고 있었다!”
“그래서?”
“너희가 쓰러뜨린 놈들을 가져가고 싶다!”
투타라는 남자는 괴생명체를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유지한은 큐디를 땅으로 내리며 말했다.
“이놈들을 넘겨주면 넌 우리에게 뭘 줄 수 있는데?”
“돈은 없다!”
“그럼 공짜로 넘겨 달라고? 그건 염치가 없는 거 아니야?”
“그건…….”
“실망이군. 카븜의 전사는 다들 그렇게 염치가 없는 건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자 서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카븜의 전사들.
그에 유지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빚으로 달아둬도 좋아.”
“빚?”
“우리의 목적지도 카븜이라서. 대가는 카븜에 가서 줘도 돼.”
“엇, 그게 정말인가?”
“물론이지.”
카븜에서 챙겨갈 게 꽤 많을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