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감히 (2)
유지한과 알로가 레스토랑을 빠져나오는 길.
알로의 곁에서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던 유지한은 말했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충분합니다.”
알로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레스토랑에서 유지한이 벌인 상황에 꽤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스토랑에서 깽판을 부린 건 모두 알로의 요청이었기 때문이었다.
‘긴장했군.’
태연해 보이는 태도와 달리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은 알로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아마도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한 탓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벌인 건 이유가 있었다.
“이제 공개적으로 상단의 계획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요거 상단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다른 상단주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것과 더불어.
상단이 주변의 견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알로.
농담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자 일부러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다.
다른 상단은 요거 상단을 방해하려거든 서로 완전히 척을 져야 하기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상단주들이 여러분의 이름을 들었으니 조만간 소문이 퍼지겠죠.”
상단들은 다른 업종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세간의 소식에 민감하다.
그런데 갑자기 뛰어난 용병들이 등장하여 어지간히 신경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돼지국밥이라는 용병단에 대해 수소문할 것이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돼지국밥의 이름은 여기저기로 빠르게 퍼져나갈 테고.
운이 좋으면 윤도하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긴 한데…….’
카를렘 원정대의 힘을 이용하여 상단을 키우려는 알로.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을 믿고 내린 과감한 결정이었다.
“저희가 갑자기 떠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확실히……. 이건 돼지국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죠.”
“그러니까요.”
“흐흐, 여러분이 떠나시면 계획은 다 엎어버리고 레론에서 쭈그리며 살아야죠.”
알로는 실실 웃으며 미리 생각해둔 바를 말했다.
계획이 실패하거든 다른 상단에게 넙죽 엎드린 뒤 찌꺼기라도 받아먹으며 살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떠날 생각은 없지만.’
윤도하에 더해 민유리의 동생 일까지 얽혀버린 이상.
유지한은 이번 일을 중간에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든 알로는 마력 변색 증후군과 관련된 치료제를 만들어줘야만 했다.
“저쪽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 그건 그렇겠죠.”
알로의 표정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주 패기롭게 나섰으나 다른 상단주들이 요거 상단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방해를 하려들 확률이 높을 터.
그에 알로는 유지한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도와주다마다.
한번 도와주기로 결정한 이상.
방해하는 놈들이 있다면 철저하게 밟아버려야지.
*****
그날 밤.
알로는 어두워진 방에서 홀로 잠을 청했다.
한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의 집치고는 아담한 크기의 집.
아버지가 쓰러진 뒤 관리의 용이성을 위해 이사해온 곳이었다.
“……후우우.”
온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아도 알로에게는 졸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잠에서 깬 것마냥 쌩쌩했다.
자꾸만 아까 전의 일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내가 일평생 벌인 행동 중에서도 가장 모험적이었다.’
알로는 요거 상단의 상단주로서 사업과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일이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오늘처럼 모험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외부에 과감하게 드러낸 적은 드물었다.
상단에 속한 직원들도 10명 중 8명은 이번 일에 반대하거나 크게 걱정할 정도였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기겁하시겠군.’
쓰러진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드러낼 것인가.
아버지라면 너무 섣부르고 무모했다고 말할 것만 같았다.
알로는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상단의 확장을 공표했다.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게 아니야.’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들을 운송하다가 산적 따위를 만나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들의 경우에는 특정 상단을 따라다니면서 며칠에 걸쳐 추적을 해오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미개척 대륙에서 넘어온 돼지국밥 용병단이 보여줬던 무력.
그 힘을 이용한다면 요거 상단이 안전하게 대륙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동료애가 돈독한 사람들 같으니, 우리 상단을 쉽게 버리지는 않겠지.”
카를렘에서 오로지 사람 1명을 찾기 위해 요거 상단과 협력하는 그들이었다.
상단은 정보와 돈을 제공하고, 그들은 일정 기간 상단을 보호해준다.
서로가 원하는 걸 제공하기로 약속한 만큼 짧게나마 이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길 바랐다.
‘딱 1번만 성공하면 돼.’
3대 세력과의 교역을 1번이라도 성공시킨 이후에는 모든 일이 훨씬 편해진다.
시장에서 요거 상단의 입지가 훨씬 단단해지기 때문이었다.
실력 있고 노련한 용병들도 그러한 경험이 있는 상단과 함께 일하는 걸 추구하는 편이고.
귀족이 아니고서야 개인적으로 무력 집단을 소유할 수 없는 법을 벗어나 더 활발한 교역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상단 휘하의 전용 호위대를 꾸릴 수도 있었다.
설령 돼지국밥 용병단이 사라지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빈틈을 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뒤에는 아버지만 깨어나시면 완벽할 텐데…….’
생각에 빠져있던 알로의 눈이 조금씩 감겨왔다.
이윽고 그의 방에서는 잠에 빠진 그가 고르게 숨 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약 2시간쯤 흘렀을까.
레론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잠에 빠져있을 무렵.
알로의 방문 앞으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평범한 저택의 사용인처럼 차려입은 남자였다.
끼이익.
잠겨있지 않은 방문을 가볍게 열어 재낀 그가 문 안으로 입장했다.
발끝에 모든 체중을 싣고 앞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는 그의 발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침대에 다다른 그는 이불을 덮고 머리카락만 밖으로 내놓은 알로를 내려다봤다.
“잘도 자는군.”
그는 상단주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상단에서 고용한 용병이었다.
차캉!
품속에 들어간 남자의 손아귀에서 길이가 짧은 단검 하나가 잡혀 나왔다.
부드러운 인간의 살 따위는 얼마든지 찌르고 벨 수 있는 물건이었다.
‘불쌍한 놈.’
용병은 알로를 조금이나마 불쌍하게 여겼다.
왜 하필 성격 나쁜 자신의 고용주에게 거슬리는 존재로 낙인이 찍혀서는!
고용주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를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두둑한 의뢰금을 약속받은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푹! 푹! 푹!
용병은 이불 채로 알로의 입을 막은 채 그의 몸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버둥거리는 움직임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그의 전신을 칼로 난도질했다.
이불 안에서 빠져나온 피가 이불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알로의 움직임이 모두 멎은 뒤에야 그는 힘주어 누르고 있던 입을 놓았다.
‘다음 생에는 얌전하게 살아라.’
칼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낸 용병은 피 묻은 이불을 잡았다.
뒤이어 시체를 확인하고자 이불을 위로 들어냈는데.
“……허어억!”
이불 안에는 알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죽어 있었다.
문제는 그 얼굴이 용병이 아주 잘 아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
“어, 어머니!!”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대체 왜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어머니가 이런 곳에 계신단 말인가?
“허어억!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눈 밑에 존재하는 흉터와 주름까지 틀림없는 어머니의 얼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던 용병은 죽은 어머니를 마주하고 닭똥과도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보잘것없는 재주로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용병이 되었던 그로서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끄아아악!!”
설마 오늘 내가 밤중에 찾아올 걸 알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일까.
그는 터무니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같은 시각.
유지한 파티는 그 용병이 구슬피 우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있었다.
—우히히! 얘 운다, 울어!
“찍찍! 겁쟁이 같으니라고!”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쏟는 용병을 조롱하는 실프와 칠라.
용병의 얼굴 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던 김시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마법이 아주 잘 먹혔군요.”
용병이 보고 있는 장면은 모두 김시후가 펼쳐낸 환각 마법에서 비롯된 것.
실제로는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는 만들어진 환각을 보고 울고 있는 것이었다.
“전보다 성장했구나.”
“에이, 별거 아니에요.”
민유리의 칭찬에 김시후는 조금 우쭐거렸다.
아제시아의 마법을 제 것으로 흡수한 그는 이제 실전에서도 활용하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현지인이었던 아뎀의 실력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꺼림칙해.”
“조금 그렇긴 하죠.”
몇 차례 환각에 당한 기억이 있던 이미아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린 적의 얼굴에서 마법이 아주 효과적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군한테 사용하면 안 돼.”
“그럴 일은 없어요. 다들 대비를 해두기도 했고요.”
“이 부적 말이야?”
“네.”
환각 마법에 취약했던 때를 기억하는 영웅들은.
아뎀과 제리의 협조 아래 환각 마법에 저항하는 부적 아티팩트를 제작하여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금 마법에 휘말리더라도 이전처럼 공황에 빠질 일은 드물었다.
“당하기만 했던 걸 역으로 이용하니까 고소하네요.”
“아제시아 측에서 괜히 자신감이 넘치던 게 아니었다니까.”
사람 몇 명의 감각 따위는 순식간에 속일 수 있는 마법.
꾸며진 환각 속에서 얼마만큼의 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 있는지는 유지한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아제시아의 마법사들이 유독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정말 신기한 마법이로고.”
“저희 마법사가 좀 뛰어난 편입니다.”
“에헴!”
와타나베마저 자신을 인정하자 괜히 뿌듯함을 느끼는 김시후였다.
곧이어 와타나베 파티가 알로의 저택 주변에 다른 습격자들이 없는지 확인하러 간 사이.
유지한 파티는 잔뜩 긴장한 알로와 함께 동공에 초점이 사라진 용병을 주시했다.
“정말로 문제없는 거죠?”
“걱정 마세요.”
“형! 마석 여기 있어요.”
“땡큐.”
김시후는 용병에게서 강제로 마력을 추출하여 유지한에게 마석을 건넸다.
그리고 샘플링을 통해 용병의 기억을 들여다본 유지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놈이었군.”
*****
라쿠아이드에 존재하는 프아 상단의 건물.
콰앙!
그곳의 문이 누군가에 의해 거칠게 열어 젖혀졌다.
내부에 있던 상단의 직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구를 바라봤다.
“어? 어?”
“경비병이 왜…….”
갑옷을 착용한 한 무리의 경비대가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알로와 유지한 파티가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야?”
“이게 지금 무슨 일입니까?”
프아 상단에 머물던 용병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잔뜩 굳은 표정의 경비병들이 말했다.
“상단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에…….”
누군가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프아 상단의 상단주가 있었다.
업무를 보던 도중 황급하게 달려온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게 무슨 일이시죠?”
“프아 상단의 상단주인가?”
“그렇습니다만…….”
“당신을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하겠다.”
“아, 아니 그게 무슨!”
경비병들은 상단주의 팔을 구속했다.
당황하여 발버둥 치는 그를 보호하고자 용병들이 나섰으나.
“받아라.”
“그건……!”
유지한이 건네주는 동료의 단검을 보고서는 행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용병대의 동료가 살인을 시도한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니 그들 또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유지한은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도 이번 일을 알고 있었나?”
“아니야. 전혀 몰랐다.”
“용병대 전체가 망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협조를 부탁하지.”
한때 귀족 간의 암살 시도가 잦았던 레론은 살인 및 살인 교사 행위에 강력한 처벌을 내리는 곳.
이번 일이 1명의 용병에게만 들어갔던 개인 의뢰였음을 알고 있는 유지한은 다른 이들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프아 상단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 상단은 어떻게 되는 거죠?”
“증거가 너무나도 명백한 관계로……. 법에 따라 최소 2주일간은 영업 정지다.”
“허억!”
“조사 결과에 따라 3달까지 연장될 수 있다.”
“안 돼애애!!”
커다란 상단에서 이뤄지는 모든 거래가 1달씩이나 멈춘다는 건 사실상 파멸이나 다름없는 일.
심지어 범죄가 사실로 드러난다면 20년 이상을 감옥에서 썩어야 하리라.
“너 이 자식!”
“어허.”
분노에 찬 프아 상단주는 알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으나.
입을 다문 알로를 대신하여 유지한이 앞으로 치고 나왔다.
“한낱 용병 따위가 감히!”
“너야말로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뭐라?!”
“한낱 범죄자 따위가 감히 누굴 쳐다봐.”
“……!”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받은 프아 상단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