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감히
“그게 사실이에요?”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해서 잠깐 대화를 나눠봤거든요.”
건강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버린 알로.
과거에 동생이 쓰러졌던 경험이 있는 민유리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짧게 나누던 중.
알로의 아버지가 동생과 소름 돋을 정도로 비슷한 증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외상은 없고 숨도 멀쩡하게 쉬고 있되 긴 시간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마법사를 모셔와서 치료를 시도했을 때는 피부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마법사의 수가 적은 편인 카를렘에서 어렵게 모셔온 치료 마법사조차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병.
한국에서 마력 변색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김시후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세계에서도 참 골칫덩이인 병이네요.”
“이번에 카븜에서 들여오는 약초 중에는 아버지의 치료에 사용할 악초가 있대.”
“정말요?”
“응! 그래서 만약 효과가 있으면 나도…….”
카븜 현지인과의 인연으로 운 좋게 카븜에만 존재하는 희귀 약초를 단독으로 유통할 수 있게 된 요거 상단.
알로가 아버지에게 그 약초로 치료제를 만들 거라는 소식에 민유리는 눈을 빛냈다.
조금이라도 효과가 보인다면 지구로 챙겨가려는 것이었다.
‘이러면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
그녀를 처음 영입할 때부터 민소연의 치료를 돕기로 한 이상.
유지한은 최대한 그녀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
알로는 거울을 보며 옷을 확인했다.
유명한 장인이 금벌레가 뱉은 실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만든 화려한 복장.
오랜만에 상단주라는 자리에 어울릴 만큼 비싼 옷을 착용한 그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 네.”
라쿠아이드에서도 음식의 가격대가 유독 비싼 레스토랑.
알로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그 레스토랑의 복도를 걸었다.
유지한은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가고 있었다.
‘상단주의 모임인가.’
레론에서 활동하는 상단주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자리.
유지한은 알로의 경호원 역할로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레드 카펫이 깔린 복도를 쭉 걸어가자 마침내 예약된 장소에 도착했다.
레스토랑 직원은 친절하게도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마자 유지한의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원형의 테이블이었다.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른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들.
‘굉장한 사치네.’
상단주들은 하나같이 사치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알로가 착용한 건 그들에 비교하면 약과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옷 위에 얇고 길게 박혀있는 붉은 보석은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
예쁘기보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상단주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서로의 재력을 과시하는 게 자존심 싸움인 모양이었다.
“요거도 왔군.”
“음? 뒤에 있는 건 누구지?”
“못 보던 인물인데.”
알로는 상단주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모인 상단주 중에서는 그가 가장 어린 나잇대였다.
“알로. 함께 들어온 사람은 누군가?”
“이번에 새롭게 고용한 용병입니다.”
“용병이라.”
“그런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
“사람을 잘못 구한 것 같군.”
카를렘에서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용병의 이미지와 비교해 다소 차분한 인상을 보유한 유지한.
그는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며 다른 상단주의 고용인들처럼 벽 쪽으로 이동했다.
“간단하게 식사부터 하지.”
모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레스토랑의 직원들은 재빠르게 음식이 담긴 그릇을 가져왔다.
하나같이 지구에서는 구경해보지 못한 신기한 음식들.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하나씩 소개하는 직원의 말에 유지한이 귀를 기울이던 그때였다.
“어이.”
“……?”
옆쪽에 서 있던 남자가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다른 상단주가 고용한 용병이었다.
“이 근처에서는 못 본 얼굴인데. 너 뭐 하는 새끼야?”
“그러는 너는 뭐 하는 새끼냐?”
똑같이 되돌아온 질문에 남자 용병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경험 없는 초짜처럼 보이는 유지한의 태도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이 새끼가 건방지게…….”
“너 때문에 음식 설명이 안 들리잖아.”
“뭐라고?”
“조용히 좀 해 봐.”
“너……!”
용병은 뭐라 말하려다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키면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은 그였다.
그리고 상단주들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디저트와 음료가 나옴과 동시에 레스토랑의 모든 직원들이 자리를 떠났다.
‘이제 시작이군.’
모임의 진짜 대화는 자리에 관계자들만이 남은 지금부터였다.
“이봐, 퀘이스! 자네 상단에서 며칠 전 설탕을 거의 원가에 가깝게 판매했던데.”
“날씨가 너무 더워지기 전에 재고를 처리했을 뿐이야. 지금은 그 전의 가격으로 돌아갔다고.”
“아무리 그래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 우리에게 귀띔이라도 해줬어야지.”
“어허! 고작 하루 동안의 일이었어.”
상단에서 유통하는 물건과 관련된 이야기들.
서로 다른 상단에서 판매하는 같은 물건의 가격을 똑같이 정하거나 유통량을 일부러 적게 조절하자는 등.
상단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담합을 논의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보였다.
“…….”
주로 큰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들의 대화에서 알로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살짝 과열되었던 대화가 조금씩 식어갈 무렵.
알로가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요거 상단은 레론에 이어 마즈와 카븜까지 사업을 확장할 계획입니다.
“……진심인가?”
“네.”
“…….”
“…….”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상단주들.
알로가 꺼내서는 안 될 말을 꺼낸 듯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확 차가워졌다.
그때 10개의 손가락에 10개의 보석 반지를 착용한 남자가 말했다.
“알로. 지금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거냐?”
“도전장이라뇨? 단지 상단을 지금보다 크게 키우겠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특정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대륙 전체를 오가는 상단을 만들겠다는 것.
그것은 기존의 큰 규모의 상단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기간 레론을 위주로 활동하던 상단의 욕심치고는 너무 컸다.
“운 좋게 상단주가 된 주제에,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원…….”
“미안하지만 자네의 재미없는 농담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큰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들은 알로에게 짧게나마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
분수에 맞지 않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게도 다른 지역의 물건을 가져오고 싶다면 조금은 나눠주지. 대신 일정한 수수료는 받을 거야.”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저희가 직접 가져오면 되니까요.”
“자네 정말 이럴 건가?”
“건방진 놈. 쓰러진 네 아비가 그렇게 가르치든?”
“네? 아니, 갑자기 왜 제 아버지를 욕하시는 겁니까?!”
뜬금없이 아버지를 모욕당한 알로는 덜컥 화를 냈다.
얼굴에 붉은 기가 올라오는 그를 보며 다른 이들이 피식 웃는 가운데.
“웃기네.”
유지한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본 어떤 상단주가 말했다.
“자네는 알로가 데려온 용병이었지. 한데 뭐가 그리도 웃긴가?”
“덩치만 큰 겁쟁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어.”
“……뭐라고?”
덩치만 큰 겁쟁이들.
그게 알로를 공격하던 상단주들을 뜻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정말 자신 있는 상단이라면 경쟁자가 늘어나건 말건 흔들리지 않고 대처할 수 있을 테지. 그런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그게 아닌 것 같아.”
“겨우 용병 주제에 뭘 안다고…….”
“그러게. 그깟 용병보다 모자란 분들이 상단주라는 자리에 있으면 안 될 텐데.”
“저놈이 감히!”
높아지는 언성과 함께 불쾌함을 드러내는 상단주들.
그에 따라 용병이나 상단에 소속된 병사들은 유지한을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봤다.
대놓고 들고 온 무기로 손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유지한은 그런 이들에게 경고했다.
“어디 한번 꺼내 봐.”
휘유우우—!
유지한의 발밑에서 작은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당장은 잔잔한 바람에 불과하지만 언제든지 거친 돌풍으로 뒤바뀔 수 있는 바람.
살갗을 스치는 바람으로부터 무언가를 깨달은 용병들은 인상을 썼다.
“마력이다.”
“마력이라고?”
“하지만 검사가 어떻게 저런 힘을…….”
검을 쓰는 검사가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실프의 마력.
그를 경계하던 용병들은 하나같이 침을 꿀꺽 삼켰다.
턱!
테이블로 걸어간 유지한은 알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알로에게 불만이 있는 놈은 내게 덤벼도 좋아. 만약 내가 지면 우리 ‘돼지국밥’ 용병단은 요거 상단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뗀다고 약속하지.”
“돼지국밥?”
“손을 뗀다는 건…….”
“요거 상단의 확장은 사실상 아예 없던 일이 될지도?”
“……!”
그의 아주 파격적인 선언에 상단주들은 웅성거렸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어차피 용병이라는 놈들은 원래 더 큰 힘에 순응하는 놈들이었으니까.
상단주들은 이내 자기들이 데려온 용병들을 힐끔거렸지만.
“…….”
“…….”
대부분은 말없이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누구도 먼저 앞으로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저자를 때려눕히는 자에게 10만 코인을 주겠네!”
“아니, 15만을 주지!”
“내가 20만도 줄 수 있어!”
유지한을 이기는 자에게는 돈을 지급하겠다고 목청을 높이는 상단주들.
어찌나 요거 상단을 방해하고 싶은 것인지 그 값은 유지한이 잡아 온 산적의 현상금보다도 더 높아져 버렸다.
이윽고 가격이 용병으로서의 몇 달 치 계약금보다 더 높아지자.
용병들은 조금씩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기어코 먼저 앞으로 달려드는 용감한 용병이 등장하고.
퍼어어엉!
적의를 드러낸 즉시 그의 몸이 레스토랑의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바람으로 떠밀리는 것에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한 그였다.
유지한이 손도 까딱하지 않고 벌인 광경에 용병들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거, 뽑을 거냐?”
“큭!”
유지한에게 처음 시비를 걸었던 용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끝내 검을 뽑지는 못했다.
*****
“불만은 없는 거로 알지.”
부쩍 높아진 보상금에도 불구하고 유지한에게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유지한은 곧 식사를 마친 알로를 데리고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자리에 남은 상단주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작은 상단의 상단주들은 큰 상단을 이끄는 자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겨우 요거 따위가 우리에게…….”
“대체 저런 인물을 어디서 데려온 거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요거 상단 따위가 쓸만한 용병을 데리고 너무 기어오른다.
그것이 상단주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요거 상단의 현금보유량이 생각보다 더 많다고 하더니만!”
“이번 일에 완전히 사활을 거는 모양이군.”
“녀석의 아버지 때는 이렇게 과감하지 않았는데…….”
요거 상단의 본 주인이 쓰러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알로는 아버지보다 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행동할 줄은 몰랐다.
‘겁도 없이 위로 기어오르려는 벌레는…….’
‘더 올라가기 전에 자근자근 밟아버려야지.’
용병들을 모두 내보낸 레스토랑의 작은 연회장에서.
상단주들은 조용히 대화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