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카를렘 (2)
자동차 운전석에 앉는 사람에게 안전 운전을 하라고 말하는 건 가볍게 건넬 수 있는 조언이다.
큰 문제 없이 잘 다녀오라는 뜻의 인사 같은 말.
카지미르가 했던 말도 그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조언 또는 경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 되어버릴 줄이야.’
유지한의 카지미르와 아뎀의 기억 속에서 목격했던 멸망의 징조.
카를렘의 태양은 그것과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뭔가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제시아에 멸망의 징조가 처음 나타났던 때는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져 내라는 등 커다란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금 유지한의 주변에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고요했다.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할 것 같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한 씨. 저건…….”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가늘게 뜬 눈으로 태양을 올려다보던 민유리가 표정을 굳혔다.
그녀 또한 카지미르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형! 저게 멸망의 징…….”
텁!
유지한은 황급히 김시후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를 보며 유지한이 입술 위에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조용히 해.’
카를렘 원정대에서 저 태양 위의 검은 점이 멸망의 징조라는 걸 아는 인원은 거의 없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지구로 넘어온 이종족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굳이 언급해봤자 좋을 게 없는 정보.
유지한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행동을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는 와타나베가 보였다.
가까이 접근한 와타나베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가 있나 보군?”
“태양 위의 검은 점은 썩 좋지 못한 징조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생각인가?”
“카를렘에 도착하자마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은 피하는 게 좋겠죠.”
“으음. 어떤 생각인지는 알겠네.”
와타나베는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한국에 와서 막걸리를 진탕 마셨지만,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는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고 말했지.”
“……결혼을 하셨었군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몸인데 걱정만 많은 사람이야.”
나름의 방식으로 공감을 해주는 와타나베였다.
뒤이어 그가 자리에서 대기 중인 영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움직일 생각이지?”
“사람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유지한은 품에서 초소형 스피커를 꺼내들었다.
내부에 마석이 존재하여 전기 대신 마력으로 동작하는 스피커였다.
‘이거면 되겠지.’
이세계로 이동하는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로 꼽힌 건 언어 문제였다.
카를렘에서 지구로 건너온 사람들은 어째서인지 도착한 국가의 언어 능력을 습득하게 되었지만, 반대의 경우가 해당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말하는 것 외에 카를렘의 공용어로 읽고 쓰기가 불가능한 이들이 대다수였기에.
유지한은 카를렘으로 출발하기 전에 도움이 될만한 음성들을 프란의 목소리로 미리 녹음해왔다.
—우리는 아주 먼 지역에서 찾아온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윤도하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
…….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서 사용될 만한 문장들.
유지한은 스피커에서 소리가 잘 들리는지 테스트하면서 생각했다.
‘발음이 너무 어려워.’
발음이라도 쉬웠다면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배워볼 수 있었을 텐데.
유지한은 도저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프란의 발음을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잘 들어보면 지구의 인간과는 구강구조가 많이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재경 씨. 윤도하 씨의 사진은 갖고 계시죠?”
“여기 있어요.”
박재경은 다각도에서 촬영된 윤도하의 사진을 갖고 있었다.
이세계에 도착한 뒤에도 사진에는 다행히 이상이 없었다.
“3분 뒤에 이동하겠습니다.”
이동 준비를 하던 유지한은 다시금 멸망의 징조를 올려다봤다.
맨눈으로 해를 바라봐도 지구보다는 눈부심이 덜한 느낌이었다.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자꾸만 떠오르는 카지미르의 경고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
카를렘에서 해의 움직임은 지구와 같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녀석의 궤도를 따라 유지한은 그림자의 방향으로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 내 위치가 어딘지만 알면 되는데…….’
2시간째 길을 걷고 있지만 보이는 건 황무지뿐.
카를렘 원정대를 반겨주는 건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 따위의 풀뿐이었다.
지겨움을 느낀 누군가가 손을 들며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걸어가는 거예요?”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까지는 계속 움직이겠습니다.”
유지한은 날이 밝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이동하며 사람을 찾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데려온 인원은 대부분 수준 높은 영웅들이기에 체력이 금방 떨어질 염려도 적었다.
다만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얼굴을 확 찌푸린 여성은 와타나베를 바라봤다.
“저기……. 와타나베 님!”
“무슨 일이지?”
“와타나베 님도 같은 의견이신가요?”
“물론이지. 뭐라도 찾아야 할 거 아닌가?”
“…….”
“그리고 앞으로의 행동 방향은 여기 유지한이 내리는 거로 할 테니까 그리 알도록. 나한테까지 2번 물어볼 필요는 없어.”
결정권을 유지한에게 넘겨버리는 와타나베.
그 뒤로는 누구도 유지한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밤이 되는군.’
하지만 몇 시간 동안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우와…….”
“진짜 달이 3개나 떠 있네.”
“멋지다.”
밤이 되어 하늘에 떠오른 3개의 달.
그것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는 사람들.
형형색색의 달들은 그들로 하여금 정말로 지구를 떠났음을 실감하게 했다.
“여기서 하룻밤만 쉬고 움직이겠습니다.”
사람들은 미리 챙겨온 텐트 따위를 맨땅에 설치했다.
유지한 파티 또한 이미아와 함께 사용할 텐트를 세웠다.
두꺼운 침낭까지 바닥에 내려놓으니 썩 그럴듯한 휴식 공간이 마련되었다.
“아무것도 안 가져오셨다고요?”
“네. 그냥 밖에서 자겠습니다.”
일행 중에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야영 물품은 필수로 챙겨오라고 사전에 전달했고, 가져오지 못했다면 영웅부에서 준비해놓은 것도 있었을 텐데.
털썩!
머리칼을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인 남성은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며 말했다.
“저희는 자연을 사랑하거든요! 밖에서 자는 건 익숙합니다.”
“불침번 역할도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끝내 밖에서 자겠다는 14명의 사람들.
웃으면서 여유까지 보여주는 그들을 남겨 두고 남은 인원은 각자 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늦은 새벽이 되었을 때.
“……?”
김시후의 근처에서 침낭을 깔고 누워있던 유지한은 슬며시 눈을 떴다.
바깥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큐디를 챙겨서 텐트 밖으로 나왔다.
‘뭐야.’
그런데 자기들은 자연을 사랑한다며 바깥에서 쉬겠다던 영웅들이.
전부 다 텐트로부터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속도로 보아하니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중인듯했다.
“하아암…….”
“와타나베 님.”
유지한처럼 텐트 밖으로 나온 와타나베는 길게 하품을 했다.
뒤이어 박재경을 포함한 일부 영웅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두고 모두가 수군거리는 가운데 와타나베가 말했다.
“도망치는 것 같구나.”
“무엇으로부터요?”
“주변에는 우리밖에 없으니, 우리로부터겠지.”
카를렘 원정에 참여한 영웅이 같은 카를렘 원정대로부터 도망쳤다는 뜻.
찝찝함을 느낀 유지한은 텐트에서 원정대원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가져왔다.
‘……전부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한 영웅이다.’
지금 자리에서 달아난 해외의 영웅들은 전부 이름이 생소한 축에 속했다.
선발 과정에서의 면접도 음성이나 화상 통화 등 원격 면접으로 진행된 부류였다.
그런데 왜 그들이 도망치듯이 달려가는 것인가.
——얼굴이 낯선 영웅들은 경계하는 게 좋을 거다.
유지한은 해외에 생각보다 미친놈들이 많다던 이동호의 경고를 떠올렸다.
이동호는 그중에 유지한을 노리는 영웅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내가 목적이 아니었군.’
그들의 목적은 유지한이 아니라 이세계로 가는 것 그 자체였던 모양이었다.
이미 카를렘에 도착한 순간 그들은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더는 원정대에 원하는 것이 없으니 떠나는 것일 터.
어느새 장비를 갖춰 입고 나온 이미아는 말했다.
“쫓아갈까?”
“아니야. 내버려 둬.”
유지한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윤도하를 찾아내어 지구로 돌아가는 것.
부가적인 일에 시간을 투자할 여유는 없었다.
*****
날이 밝자 텐트를 걷어낸 유지한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긴 행군으로 이어지는 것도 고려해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약 1시간쯤 걸었을까.
“저거 뭐야?”
“사람?”
“사람인가?”
멀리서 마침내 카를렘의 현지인으로 보이는 이들을 발견했다.
유지한은 눈을 빛내며 그들을 노려봤다.
어떻게든 그들을 붙잡고서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마차가 있어!”
“오오!”
차량을 대신하여 주요 이동수단으로 사용되는 마차.
줄로 묶인 말 2마리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마차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과정에서.
유지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안 돼, 이것만은 제발……!”
“이거 놓지 못해?!”
난데없이 한국어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기울여봐도.
그건 분명 유지한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였다.
“……왜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이세계어도 번역이 가능했나?”
“그럴 리가.”
번역기를 착용한 영웅들까지 의문을 느끼는 가운데.
마차 근처에 있던 20명 남짓의 사람들은 그들을 발견하고 크게 동요했다.
“흐음.”
마차와 가까워진 유지한은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카를렘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사람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누군가는 얇은 속옷만 입은 상태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들은 검 따위의 무기를 들고서 영웅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산적 같은 느낌이네.’
마치 산적 떼가 마차를 습격한 듯한 장면이었다.
“아아, 아아.”
“……?”
“내 목소리 들리나?”
“들린다.”
“어떤 뜻인지 이해한다는 거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를…….”
“좋았어.”
산적들과 말이 통한다는 걸 확인한 유지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언어 문제는 사라진 모양이었다.
기껏 준비한 프란의 목소리가 소용없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너희는 누구냐!”
“여긴 우리 메스퍼의 지역일 텐데……!”
“그 이상한 옷은 다 뭐야?”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자신들을 메스퍼라고 소개한 산적들은 매서운 표정으로 무기를 겨눴다.
그에 와타나베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그 말, 나한테 한 건가?”
“그래!”
“느하하하하!”
오랜만에 들어보는 당돌한 도발에 와타나베는 기분 좋게 웃어 재꼈다.
“웃어?”
그리고 자신이 놀림 받았다고 생각한 상대가 화난 얼굴로 달려드는 순간.
유지한은 샘플링을 사용했다.
‘저기군.’
흐릿하게 보이는 그의 잔상은 상대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다.
퍽!
“끅!”
잔상을 따라 움직인 유지한에게 몸을 떠밀려 뒤로 나뒹구는 남자.
유지한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방금 당신 살려준 거야.”
“……?!”
배를 붙잡은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유지한은 그를 무시하며 와타나베쪽으로 몸을 돌렸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맞아! 죽이면 안 돼. 이 멍청아!
“실프, 넌 입 좀 다물고.”
—으갹!
상체를 살짝 숙인 채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얹어둔 와타나베.
그는 당장이라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을 것만 같았다.
“아아, 그런 ‘규칙’이었지?”
카를렘으로 이동한 뒤의 규칙을 떠올린 와타나베는 천천히 자세를 풀었다.
이내 그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도 알아봤구나.”
“워낙 살기가 날카로우신지라.”
샘플링이 유지한에게 보여준 건.
덤벼오는 상대가 와타나베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배를 강하게 차버린 것이 되레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었다.
“밀어내는 게 아니었다면 최소한 팔 하나는 날아갔을 텐데. 감이 좋군.”
“이곳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규칙대로 행동하겠습니다. 조금만 참아주시죠.”
말투는 정중하되 명확하게 선을 긋는 유지한.
그의 태도에 와타나베는 아주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