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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추방된 영웅이 너무 뛰어남-226화 (226/300)

226화. 카를렘

아기 유지한의 목에 있던 헥사그램 모양의 점.

실종된 아버지의 친구가 남긴 쪽지에 그와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다는 건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그 생김새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이 사람이 내 점을 몰랐을 리가 없어.’

평소 유지한의 부모님과 자주 왕래했다고 알려지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어린 유지한 또한 많이 만났을 테고 목의 점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터.

사진을 번갈아 보며 끙끙대던 유지한은 실프에게 말했다.

“넌 뭐 아는 거 없냐?”

—아는 게 있을 리가!

“그루디아에서 이런 거 본 적 없어?”

—없지롱.

“한번 잘 생각해봐.”

—우히히! 내게 기대할 걸 기대하시라!

수많은 세월을 살아왔던 정령의 지식을 빌리고자 했지만.

실프 또한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출력해둘까.’

휴대폰은 카를렘에서 동작하지 않기에 한국에 두고 갈 예정이었다.

따라서 유지한은 사진을 프린터로 출력했다.

언제든지 들고 다니며 볼 수 있도록.

*****

카를렘으로 출발하는 날은 유지한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찾아왔다.

남은 기간 바쁘게 지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었지만.

유지한은 어느새 한국을 떠나기 위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남은 건 거기서 자급자족하면 돼.”

겨우 작은 가방 하나에 불과한 짐.

가볍게 먹을 수 있는 3일 치 식량 정도만이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몽땅의 인수 절차는 다 끝났고……. 사람도 고용해뒀으니 남은 일은 자동으로 진행되겠지.’

한국에서 자리를 비울 준비는 모두 끝낸 상황.

다시 한번 점검을 마친 그는 이내 짐을 챙겨서 정해진 장소로 이동했다.

카를렘으로 향하는 영웅들과 그들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한 기자들이 벌써부터 몰려있었다.

“유지한 씨! 출발 전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기자들이 들이대는 마이크에 무심하면서도 간단하게 답해주는 유지한.

카메라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비슷한 상황에 많이 처하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진 것이었다.

“왔어?”

“……?”

등에 아주 커다란 가방을 멘 이미아는 유지한을 반겼다.

유지한은 그녀를 보며 과거 김현태 파티에서 자신이 메던 가방을 떠올렸다.

그 정도로 물건이 가득 담긴 빵빵한 가방이었다.

“그 가방에 든 건?”

“먹을 거.”

“음식을 대체 얼마나 가져온 거야…….”

“5일 치.”

“그걸 5일 안에 다 먹을 수가 있어?”

“당연하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하는 이미아.

유지한에게는 한 달을 버티고도 남을 만한 양이었지만.

그녀의 먹성이 워낙 좋은 편이다 보니 고작 5일 치에 불과했다.

“찍찍! 나도 조금만 나눠줘라!”

“안 돼. 다 내꺼야.”

“욕심 많은 인간이로고! 찍!”

칠라는 이미아의 가방과 비슷한 크기의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음식을 나눠달라는 뻔뻔함까지 보유하다니.

참으로 뻔뻔한 녀석이었다.

—우히히! 여기 돼지가 두 마리나 있네!

“찍찍! 건방진 정령 같으니!”

“정령이라도 한 대 맞는 수가 있어.”

“대장! 실프 한 대만 쳐도 되나? 찍?”

—히익! 난폭한 동물들!

민유리와 칠라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실프는 기겁하며 유지한의 품으로 숨어버렸다.

“잘 부탁하마.”

“아, 예.”

옆으로 다가온 와타나베는 싱글벙글 웃으며 유지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를렘으로 향하는 50명 중에 차원의 경계로 다녀온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대는구나.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야.”

와타나베는 입가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오늘은 무료해진 그의 일상에 새로운 자극이 찾아오는 날.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는데 영웅의 등급은 하등 관련이 없었다.

“우린 반드시 길드장님을 찾아서 돌아온다.”

“네!”

“그때까지 절대로 다치지 말고…….”

주사위의 박재경은 주변 영웅들과 윤도하를 찾아내겠다는 다짐을 나누고 있었다.

유지한은 그런 그녀에게 짧게 고개만 숙여 보였다.

“지한 씨!”

“아, 지철 씨.”

“전화기 여기 있습니다.”

영웅부의 양지철은 가칭 차원 전화기를 유지한에게 맡겼다.

다른 세계에 가서도 지구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아티팩트였다.

“전화 기능이 완성되는 즉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망가뜨리면 안 돼요!”

유지한은 건네받은 차원 전화기를 품속에 넣었다.

카를렘 원정대에게 배급된 차원 전화기는 총 4대.

각각 와타나베와 유지한, 그리고 박재경과 미국의 한 영웅에게 주어졌다.

“출발하겠습니다!”

민유리와 김시후가 자리에 도착하고 기다리던 때.

정해진 시간이 되자 양지철의 신호로 자기들끼리 떠들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양지철은 이내 유지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부디 안전하게 다녀오십시오.”

우웅!

바닥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위로 치솟아 올랐다.

솟아오른 빛은 범위 내에 들어온 영웅 전원을 휘감았다.

바닥에 미리 준비해뒀던 마법진이 발동한 것이었다.

“우왁!”

“이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빛이 사라지고 등장한 것은 차원의 경계.

아제시아의 마법진을 응용하여 만들어낸 이동 마법이었다.

그 마법진을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시후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문제없이 성공했네?”

“에헴!”

“대단하네?”

“에헴!!”

유지한과 민유리의 앞에서 가슴을 활짝 펴 보이는 김시후.

아뎀의 조언을 받은 천재 마법사가 노력을 들인 결과물이 보여지는 순간이었다.

‘여긴 달라지는 게 없군.’

차원의 경계에 도착한 유지한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 어디에도 출입구가 존재하지 않는 단칸방은 여전히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50명에 달하는 인원이 들어와 있으니 공간이 전보다 좁아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한 얼굴로 벽을 쓰다듬던 와타나베가 말했다.

“흐음, 왜 이세계마다 50명을 배정했는지 이해가 되네.”

차원의 경계는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다.

아주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모자란 것이었다.

유지한은 와타나베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 시선 좀 모아주시죠. 대장님.”

카를렘 원정대에서 명목상 리더를 맡은 건 와타나베 요스케였다.

유지한은 그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은 정도.

하지만 와타나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귀찮아서 싫다!”

“…….”

“네가 해라. 영화에서는 잘만 하더만?”

지방 원정에서 원정대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유지한.

그 모습을 기억하는 와타나베는 씩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에 어쩔 수 없이 유지한은 직접 손을 흔들어 소란스러운 주변의 시선을 모았다.

“순서가 있으니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가장 먼저 차원의 경계로 진입한 건 카를렘 원정대.

1시간 뒤에는 다른 이세계로 가는 원정대가 진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공간은 모든 인간에게 공유되는 만큼 그 전에 자리를 비워줘야만 했다.

촤륵!

유지한은 품속에서 여러 장의 얇은 마법 스크롤을 꺼냈다.

사람들은 바닥에 스크롤을 펼쳐서 내려놓는 그를 보며 옆으로 물러났다.

유지한의 행동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와타나베가 말했다.

“그게 차원 이동 스크롤인가?”

“예.”

차원의 경계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차원 마법이 새겨진 마법 스크롤.

가볍게 손뼉을 치는 행위로 차원 마법을 선보였던 남자와는 비교되는 모습이었지만.

미리 복잡한 설계가 필요한 스크롤을 통해서라면 세밀한 마력 조정이 가능했다.

‘나도 그 덕분에 카를렘에 갈 수 있는 거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차원 마법이 먹혀들지 않았던 유지한이었다.

과거의 전투에서는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무척 방해가 되는 조건.

그럼에도 차원 마법이 가능하게 된 건 차원 마법이 새겨진 스크롤에 몇 가지 수정을 더한 덕분이었다.

‘저게 차원 이동 마법……!’

‘반드시 훔쳐가야 해.’

지이잉.

소수의 영웅들은 초소형 카메라로 스크롤의 마법진을 촬영했다.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보유한 차원 이동 방법을 몰래 훔쳐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김시후가 말했다.

“카메라로 찍으셔도 소용없을걸요.”

“찍찍! 멍청한 인간들!”

“……!”

“크흠, 흠!”

짧은 경고에 누군가는 흠칫 놀라거나 헛기침을 내뱉었다.

유지한 파티는 카를렘 원정대에 그들 같은 부류가 섞여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카메라에 그 무엇도 기록될 수 없었고.

설령 영상을 확보한다고 한들 소용없는 짓이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을 뿐이었다.

부웅!

유지한이 마력을 불어넣자 스크롤들은 딱딱한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뒤이어 스크롤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은 모두 바닥으로 옮겨졌다.

쿠구구구구구……!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차원의 경계.

잔뜩 긴장하는 영웅들의 시야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

세상에 검정 물감을 덧칠한 듯 시꺼멓게 변해버린 세상.

유지한은 그곳에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각을 맛보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중력이 사라진 공간에서 몸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감각.

비행기로 하늘을 날거나 마법으로 몸을 높이 띄우는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법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아직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서 차원 이동을 몇 번 간접적으로 체험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차원 마법에 실수가 있었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팔을 연신 허우적대도 바로 옆에 있던 김시후의 몸은 잡히지 않았고.

귓가에는 누군가의 작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고요한 정적이 맴돌 뿐이었다.

실프가 설명했던 정령과 계약자의 절대적인 계약 관계라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인지할 수 있을 테지만.

실프를 연달아 호출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그때 유지한의 귓가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사……. 사……. 사…….

남자가 아닌 여인의 목소리.

짧은 효과음을 반복 재생하듯이 들려오던 그 목소리는.

이내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음량이 커졌다.

——사랑.

——사랑스러운 우리…….

무척 따스하면서도 솜사탕처럼 포근한 목소리.

유지한은 기억에도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왜인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성의 품에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들.

하지만 마침내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그녀의 말에.

유지한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날 위해서 죽어줄 수 있겠니?

그 이상 그녀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

“헛.”

어둡기만 하던 시야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유지한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즉시 주변을 살폈다.

흙바닥에 쓰러져서 잠든 몇 명의 영웅들.

그리고 유지한처럼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가 카를렘인가!”

“도착했다!”

“자는 사람들 깨우죠.”

“야! 일어나!”

카를렘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을 깨웠다.

노련한 영웅들답게 서둘러 주변을 경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한이 형! 성공했어요!”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네?”

“어떤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아무것도요?”

차원 마법이 사용됨과 동시에 카를렘에 도착했다는 김시후.

민유리와 이미아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도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지진 이후에 곧바로 도착했어.”

“찍? 대장은 1초 동안 꿈을 꾼 건가?”

“…….”

누구도 듣지 못한 여인의 목소리.

유지한은 결코 환청이 아니었던 목소리를 기억하며 생각에 빠졌다.

—으음? 이거 거짓말이 아닌데…….

실프는 유일하게 계약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찜찜한 기분이 이어지던 그때 와타나베가 말했다.

“밤에 달이 3개나 뜬다더니, 여긴 태양도 특이하게 생겼군?”

“예? 태양이요?”

카를렘 출신인 프란에게도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데.

유지한은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태양을 슬쩍 바라보는데.

“……허.”

태양의 정중앙에는 검은 깨처럼 검은색 점이 박혀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카지미르가 경고했던 멸망의 징조.

눈을 번쩍하고 뜬 유지한은 카지미르가 했던 경고를 떠올렸다.

——기억해라. 유지한.

——만에 하나라도 카를렘에 멸망의 징조가 나타난다면 윤도하를 찾는 게 문제가 아니야.

——너희 전원의 목숨을 걱정해야 할 거다.

아무래도.

영 좋지 못한 시기에 이세계로 와버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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