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길드
여수에서 유지한은 다른 이세계인의 기억에서 아제시아의 멸망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한 것.
멸망에 이르게 된 경위는 설명으로 전달받았지만.
그는 아제시아와 더불어 카지미르가 태어난 세계인 루드블의 멸망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난 문제 없다.”
기억을 제공하는 건 사생활 문제로 꺼려질 수 있는 일.
기분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었음에도 카지미르는 기꺼이 허락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문제없어.”
“난 거부!”
아뎀도 기억을 제공해주겠다고 나서는 가운데.
유일한 반대는 유지한에게 한 차례 기억을 강제로 읽혔었던 제리뿐.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배배 꼬며 말했다.
“내 기억은 부끄러워서 보여줄 수 없어! 특히 엊그제 밤 11시 방에서 혼자 있을 때의 기억은 절대로 안 돼.”
“……혼자서 뭘 했길래.”
“비밀이지롱!”
유지한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제리.
그에 유지한은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력 추출기 있지?”
“잠깐만 기다려라.”
연구를 위한 다양한 장비가 준비된 연구소.
잠깐 자리에서 사라졌던 카지미르는 유지한이 요청한 마력 추출기를 들고 왔다.
아뎀이 거기에 자신의 마력을 주입하자 아무런 마력이 없던 마석에 조금씩 그의 마력이 깃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아뎀과 카지미르의 마석으로 실프가 날아갔다.
—먹는다?
“꼭꼭 씹어먹어.”
—앙냠냠!
카지미르의 마석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실프.
유지한은 뒤이어 몰려올 기억들을 대비하여 의자에 앉았다.
‘이때를 기다렸다!’
제리는 그런 유지한을 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기억을 읽는 동안에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는 그였다.
그 말은 즉,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저항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유지한이 말했다.
“실프! 쟤가 나한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해.”
—오케!
“노우우우!”
제리의 구슬픈 절규와 함께 유지한의 의식이 멀어져갔다.
*****
1명의 인간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기억들은 방대하다.
눈에 보이는 다양한 풍경, 귀로 들어오는 소리, 코로 맡는 다양한 냄새 등.
시각, 미각, 촉각, 청각 등의 감각 따위로 구분되는 모든 정보는 하나도 빠짐없이 뇌에 차곡차곡 기록된다.
그중에 어떤 것은 금방 잊혀지지만, 어떤 것은 오랫동안 기억되기도 한다.
“이것들 모두가 카지미르의 기억인가?”
—맞아. 한번 보여주려고 모아봤어.
모든 자리가 비어있는 영화관.
감히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기형적인 크기의 영화관에서 명당자리에 앉은 유지한은 공중에 떠 있는 수많은 필름을 바라봤다.
영화관 내부에 빛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필름들.
거기에 새겨진 장면들은 모두 카지미르라는 인간의 기억이었다.
‘조금 전의 기억도 있군.’
유지한의 얼굴이 담긴 필름은 바로 직전까지 연구소에서 대화를 나누던 카지미르의 기억.
고개를 돌려보면 오늘 아침에 그가 먹은 식사나 어젯밤에 그가 본 영화 따위가 다른 필름에 새겨져 있었다.
필름과 필름 사이를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실프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원하는 기억만 걸러내면 돼!
“쉽지 않아 보이는데…….”
—아니야. 쉬워.
번쩍!
실프가 구체에서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어두운 영화관 전체가 은은한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후우우웅—!
실프가 만들어낸 회오리를 따라 필름들이 토네이도처럼 흔들리고.
유지한의 눈에 보이던 필름 중 대다수가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원하는 기억만을 걸러내는 과정이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
수천, 수만 개를 넘어가는 필름이 바람에 밀려나는 걸 보며 유지한은 혀를 내둘렀다.
정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찾았다!
무수한 필름들 사이에서 단 5개의 필름만이 유지한의 눈앞으로 날아왔다.
유지한이 그것을 손으로 만지자 영화관이 사라지며 주변 풍경이 급변했다.
‘실험실?’
현대의 건물 양식과는 조금 다르지만, 형형색색의 액체가 든 플라스크 따위가 가득하여 실험실처럼 보이는 공간.
카지미르는 같은 뱀파이어들과 함께 어떤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쨍그랑!
그때 커다란 흔들림과 함께 플라스크가 연달아 깨져나가는 것으로 혼란이 발생.
위기를 느낀 카지미르가 동료들과 함께 긴장하던 도중.
주변에서 다른 뱀파이어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캬아아악!
—끄아아아아!
하나둘씩 바닥으로 쓰러지는 뱀파이어들.
그 사이에서 카지미르는 탁자를 붙잡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던 그는 이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실험용 피를 갑자기 입으로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더 이상한 건 그 뒤에 카지미르가 멀쩡해졌다는 것.
‘이게 피의 저주로군.’
이것이 카지미르의 세계인 루드블이 멸망한 원인, 피의 저주였다.
몸 안에 존재하는 피가 이유 없이 사라져버리는 현상.
증발 따위가 아니라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것.
말로만 들었던 장면을 직접 본 유지한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살아있는 놈은 대답해!
모든 비명이 멎은 실험실에서 생존한 건 카지미르 하나뿐이었다.
피가 없어서 바짝 말라버린 뱀파이어의 시체로 가득해진 바닥.
혼란에 빠진 카지미르는 여분의 피를 챙겨서 어디론가 달려갔다.
이후의 기억은 그가 생존한 뱀파이어들과 합류하여 생존 캠프를 꾸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른 동물의 피를 흡수하여 자신의 피를 생산할 수 있는 뱀파이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을 포함하여 그런 능력이 없는 동물들은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했고, 뱀파이어들도 점차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먹잇감으로 삼을 개체가 줄어드는 것이었으니까.
멸망해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그럼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루드블에서 매우 수척해진 카지미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멸망의 징조.’
루드블에서 ‘태양’의 역할을 맡는 별의 정중앙.
그곳에는 검은 흑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피의 저주가 시작된 날부터 흑점이 관측되었기에.
카지미르는 그것을 멸망의 징조라고 불렀다.
*****
작은 꽃을 구매한 김시후는 어머니의 유골이 보관된 봉안당에 방문했다.
사진 속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겠지.’
변한 것 하나 없는 어머니와 비교해 정말 많은 변화를 겪은 김시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길드 계좌로 들어오는 돈의 자릿수가 달라지고, 유명세가 급격히 더해진 나날들.
봉안당에 입장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탁!
유리판에 구매한 꽃을 붙여둔 김시후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이세계로 가기 전 마지막인 봉안당 방문.
아버지 김건오는 함께 오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이해해주시리라 믿었다.
“살아계셨으면 기뻐하셨으려나.”
영웅으로서 여러 업적을 이뤄낸 것은 물론이고.
그는 자신의 몸에 숨겨져 있던 엘프의 마법에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 왕국의 혈족로부터 파생된 능력을 자식이 그대로 이어받은 것에 에르나 하스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김시후는 알 수 없었다.
“기뻐하셨겠지.”
“……마일리 누나?!”
그때 유골들이 진열된 진열대 옆에서 한 여성이 등장했다.
에르나 하스와 함께 그루디아에서 지구로 넘어온 엘프, 마일리였다.
“에르나 님은 분명 기뻐하셨을 거야.”
김시후의 옆으로 걸어온 마일리는 에르나 하스의 유골 앞에 새로운 꽃을 붙였다.
과거 왕국의 하녀였던 그녀가 오래도록 모셨던 주인.
그녀는 고작 하녀에 불과한 자신을 친구로 여겨줬던 에르나 하스를 깊게 추억했다.
“네가 봉안당에 갈 거라는 이야기 듣고 와봤는데, 진짜 있었구나.”
“굳이 따라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마침 다시 방문할 시기가 다가와서 온 거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에르나 하스의 사진을 바라봤다.
그러던 도중 마일리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아.”
“이건…….”
“플로른이야. 이런 형태의 플로른이 가장 구하기 힘든 건 알고 있지?”
“물론이죠. 이 지팡이도 똑같은 거니까.”
최상급 아티팩트 재료인 플로른 중에서도 질이 높은 물건.
마일리는 나뭇가지와도 비슷한 그것을 김시후에게 건넸다.
“선물이니까 받아.”
“구하기 힘든 거라 차마 거절은……. 못하겠고 최소한 돈이라도 낼게요.”
“됐어. 우리 사이에 돈거래는 무슨.”
마일리는 돈을 지불하겠다는 김시후에게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그 대신 김시후의 지팡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준 걸 거기에 겹쳐볼 수 있어?”
“……?”
“그냥 서로 닿게 하면 돼.”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시후는 자신의 나무 지팡이에 새로 받은 플로른을 겹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휘릭!
서로 맞닿은 2개의 플로른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2개의 플로른이 점차 1개로 합쳐지는 기묘한 광경.
예상치도 못한 현상에 김시후는 눈을 번쩍 뜨고 마일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이게 뭐죠?!”
“……강화.”
플로른의 강화.
플로른으로 제작한 장비를 더 강하게 만드는 시오론 왕국의 숨겨진 비법.
기존에 제작한 장비와 강화에 사용되는 마력의 파장이 90% 이상 일치해야 하기에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방법이었다.
나무가 작은 씨앗에 불과할 때부터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추기까지 기존의 재배법보다 훨씬 까다로운 과정을 감수해야만 하고.
만약 강화에 실패한다면 거기에 들인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다니…….”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말렴.”
김시후의 지팡이는 기존에 에르나 하스가 재배한 플로른으로 제작된 것.
그리고 그 지팡이는 마일리가 재배한 플로른을 받아들여 강화에 성공했다.
‘내가 인정받은 거야.’
조금 전에 가볍게 건네준 플로른은 사실 마일리가 1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한 결과물이었다.
그것으로 강화에 성공했다는 건 에르나 하스에게 인정받았다는 것과 다름 없는 일.
‘제가 해냈어요. 에르나 님.’
하나로 합쳐져 강화된 지팡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김시후.
마일리는 그 옆에서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게 기뻐했다.
*****
카를렘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던 때.
유지한과 김시후는 장사임의 전화를 받고 몬스터 처리 업체 몽땅의 창고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장사임은 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임 씨!”
“오늘은 어쩐 일이에요?”
창고 앞으로 걸어간 유지한이 장사임을 바라봤다.
그런데 왜인지 장사임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몬스터 사체를 정리하다가 좋은 물건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여러분.”
“예.”
“혹시 저희 회사를 인수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예?”
자신이 차린 회사를 인수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오는 장사임이었다.
그에 유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다른 곳에 기대지 않아도 될 만큼 최근 몽땅의 사업이 잘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업 잘 되시잖아요?”
“점점 다른 업체의 견제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꿀잼이라는 길드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외주를 전담함으로써 주목받았던 몽땅.
다른 몬스터 처리 업체들은 그런 몽땅을 지금 이상으로 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에야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지만, 핵심 고객인 유지한 파티가 카를렘으로 떠나고 나면 견제가 더 심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제가 과거에 몸을 담고 있던 업체에서는 저를 아예 업계에서 밀어내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저희 이름값에 힘입어 사업을 유지하시겠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저번에 길드로 데려가셨다던 대장장이분처럼요.”
자신의 의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장사임.
유지한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김시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쩔래?”
“그래요. 인수합시다.”
“우리 길드장이 인수하겠다네요.”
김시후가 뱉은 한 마디로 몽땅의 인수가 결정되었다.
“……진짜요?”
오늘의 만남을 위해서 약 2시간가량의 발표 자료를 몇 주에 걸쳐 정성스럽게 준비했거늘.
힘들게 만든 자료를 꺼내보지도 못한 장사임은 그만 벙찌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