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정비
한국에 IUPC와 이세계인이 일으킨 테러가 마무리된 이후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적당히 선선하여 활동하기 좋던 날씨는 어느덧 쌀쌀하게 변해버린 겨울.
사람들이 입는 옷이 두꺼운 외투로 변하는 동안 유지한 파티는 외부 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내실을 다지는 데 시간을 쏟았다.
끊임없는 훈련과 실전의 반복이었다.
“됐다.”
—마침내!
꽈아악!
유지한은 5개의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단단한 망치, 혹은 둔기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주먹이었다.
상당한 힘이 느껴지는 그의 몸 전체에는 은은한 마력이 맴돌고 있었다.
그의 주력 버프 마법인 [세계수의 축복]이었다.
‘이제 상시 유지가 가능해졌구나.’
김시후가 우연히 사용하고 개발한 뒤 개량을 거듭한 버프 마법.
유지한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그 버프를 사용했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세계수의 축복]은 상시 유지할 수 있는 마법으로 진화했다.
전투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심지어 자는 순간까지도 말이다.
—나한테 고마워하라구!
“그래, 그래.”
주사위 길드에서 원정의 보답으로 제공한 마결정들.
그리고 꿈의 금속 드리미움에 깃든 신비로운 마력.
그것들을 실프가 꾸준하게 섭취하며 실프에게 점진적으로 변화가 진행되었다.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이라면 마력 회복 속도를 꼽을 수 있었는데.
마력 회복량이 버프로 인한 마력 소모량보다 더 늘어나자 지금 같은 일이 가능해졌다.
“너도 수고 많았어.”
“다 형이 노력하신 덕분이죠.”
유지한의 요청에 따라 마법을 조금씩 개량했던 김시후는 씩 웃었다.
현시점에서 [세계수의 축복]은 바바리안을 해치웠을 때와 같은 폭발력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현존하는 그 어떤 버프보다 유지한에게 어울리는 버프로 진화했다.
유지한의 신체 구조에 맞도록 디테일한 마력 패턴을 제작한 탓에 이 세상에서 단 1명만을 위한 고유 마법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이미아!”
“응.”
“한 판 붙자.”
“덤벼.”
까닥까닥.
무표정인 이미아는 손바닥을 가볍게 꺾으며 유지한을 향해 먼저 들어오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1인 길드이자 파티로서 등급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는 그녀는.
꿀잼과 동맹으로서도 자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쾅!
유지한이 주먹을 일자로 뻗자 이미아가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장비의 도움 없이 두 인간의 신체가 부딪혀 발생한 순수한 충돌음은.
일반인이 듣는다면 화약이 터진다고 착각할 만큼 소리가 커다랬다.
쉭! 쉭! 쉭!
이미아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유지한의 머리를 노렸다.
주먹과 함께 밀려오는 바람마저 날이 선 칼날처럼 살벌했다.
아주 잠깐의 연습이라도 실전처럼 봐주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유지한은 고개를 이리저리 꺾어가며 주먹을 피했다.
‘오른쪽. 다음은 왼쪽. 그다음은…….’
몸에 버프를 둘렀다고 해도 이미아의 주먹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지만.
그 공격의 궤도를 미리 읽어낸다면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수준 높은 영웅이 상대라면 예측이 어려운 공격이 올 때도 있는 법.
그때는 다른 방식의 대처가 필요했다.
‘턱을 노리는 건가?’
지이잉!
유지한의 눈앞으로 떠오르는 흐릿한 잔상들.
그것은 그가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2개의 선택지였다.
뭘 선택하더라도 ‘원하는 결과’에 99% 근접한 선택지이기도 했다.
——설령 자기 자신을 의심하더라도 고유 스킬은 의심하지 마.
——세상의 모든 진실에 의거하여 계산된 결과니까.
이전에 샘플링을 자주 사용하던 방식을 몇 달간 니로치와 교류하며 발전시킨 결과물.
잔상을 1개까지 줄여보는 것이 목표였지만 아쉽게도 무리였다.
파앗!
유지한은 자신의 잔상을 따라 몸을 미끄러뜨리듯이 움직였다.
눈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몸으로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발전된 그의 몸놀림은 그가 무리 없이 잔상을 따라잡게끔 했다.
파바바바박!
손과 발이 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격투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
그러던 중 벽시계를 쳐다본 유지한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케이! 여기까지.”
“……나 한 번도 못 때렸어.”
계속 방어에 집중했을 뿐 제대로 된 공격을 시도하지 못한 이미아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난 것처럼 팔을 붕붕 휘두르는 그녀를 보며 유지한은 조금 식겁했다.
“가벼운 대련이었다니까.”
“치사해.”
불평을 내뱉던 이미아는 결국 유지한과 함께 개인 훈련실에서 빠져나왔다.
오전 11시의 청영사 훈련소.
바깥은 겨울임에도 내부 온도가 최적화된 덕분에 반팔을 입고 있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유리 씨 데리러 가죠.”
유지한은 어느덧 익숙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사격장으로 이동했다.
민유리가 그곳에서 단독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팡! 팡! 팡! 팡! 팡!
마력 사격장의 구석에 박혀서 끊임없이 화살을 쏴대는 1명의 영웅.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목표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빠직!
사격장에서 제공하는 연습용 활은 끝내 민유리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 버렸다.
아티팩트도 그녀의 마력을 견디지 못할 정도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민유리는 주변의 수군거림에 전혀 /아랑곳없이/ 옆에 대기시켜둔 새로운 연습용 활을 꺼냈다.
주변에는 이미 부서진 활의 파편으로 가득했다.
“유리 씨!”
“네!”
그때 민유리기 유지한의 부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시후는 부러진 활을 정리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누나! 오늘은 활 몇 개 부셨어요?”
“8개 정도?”
“저번보다는 적네요.”
“사격장 관리자님이 한소리 하셔서 조절하고 있어.”
훈련 도중에 하도 많은 활을 망가뜨려서 사격장을 관리하는 직원은 민유리에게 약간의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에 따라 최대한 마력을 조절하는 민유리였다.
“미아 씨! 어제 드린 케이크는 어때요?”
“맛있었어요. 부모님도 좋아하셨어요.”
“다행이다.”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민유리와 이미아.
두 사람은 얼굴을 자주 접하면서 서로 친분을 쌓아왔다.
성격도 잘 맞는 덕분에 최근에는 가벼운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호열 씨는 준비 끝냈다고 해요.”
“출발합시다.”
한데 모인 일행은 훈련소를 빠져나와 꿀잼의 공방으로 향했다.
슬리퍼 차림의 남호열은 공방 앞에서 그들의 방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시죠!”
남호열을 따라 입장한 공방에서 유지한은 코를 킁킁댔다.
아주 상큼한 과일의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오렌지 향이네요.”
“크레이지 오렌지의 향이 너무 강하더라고요.”
“분명 정화 효과도 있었죠?”
“네! 장비에서 냄새가 날 일도 없을 겁니다.”
몬스터로 변한 오렌지의 껍질.
녀석은 사망 후 1년이 넘은 뒤에도 과육이 아닌 껍질에 수분과 진한 향기를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생존력이 강한 몬스터였다.
독이나 오염을 정화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녀석을 장비의 소재로 사용했으니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
“저건가요?”
“네.”
붉은 천으로 덮어둔 완성된 장비들.
유지한 일행이 기다리는 가운데, 남호열은 천을 천천히 걷어냈다.
“우와!”
“오오……!”
이윽고 장비의 외형이 드러나자 모두가 입을 작게 벌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미려한 디자인이 엿보이는 갑옷들.
보기에만 예쁘고 멋진 게 아니라 예술성과 실용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맞춤 장비였다.
“처음에 보여주신 설계도랑 똑같네요.”
“노력했습니다.”
남호열이 제작한 장비는 그가 처음 설계도를 그렸을 때와 똑같은 형태로 완성되었다.
초기 장비 설계도에 결함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엄청나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는 유지한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남호열은 조금 부끄러운 듯 손가락으로 코를 쓱 훑었다.
“찍찍! 이게 내 방패인가?”
칠라는 자기 덩치에 맞게 커다란 크기로 제작된 방패를 손으로 잡았다.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이었다.
“호열 씨, 이건…….”
김시후는 자신의 새로운 로브와 함께 놓여있는 비니 모자를 발견했다.
자주 착용하는 모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였다.
“시후 씨 생각해서 겸사겸사 만들어놓은 건데……. 내구성 외에 특별한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니까 넘어가셔도 됩니다.”
“아뇨. 그냥 쓸게요. 모자를 쓰는 게 더 편하더라고요.”
한동안 모자를 벗는 연습을 했었지만.
이제는 쓰고 있는 게 더 편해져 버린 김시후였다.
“이것들 전부 다 아티팩트가 확실하군요.”
“재료를 낭비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장비는 하나도 빠짐없이 아티팩트임이 확인되었다.
이 자리에 무엇 하나 평범한 장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새 아티팩트 제작에서 장인의 경지에 올라선 남호열 덕분이었다.
“초기 설계대로 방어구는 최대한 기본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훌륭하네요.”
“드리미움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하나의 덩어리에서 조금씩 가루를 긁어냈던 드리미움.
모두의 장비 곳곳에는 드리미움이 3% 미만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특수 스킬이 부여된 장신구는 이쪽에 모아뒀습니다.”
팔찌와 장갑 따위의 아티팩트들.
유지한 거기서 [투명화] 스킬이 부여된 팔찌를 이미아에게 건넸다.
동맹을 기념해서 주는 선물이었다.
“마음에 들어.”
곧바로 팔찌를 착용한 이미아는 [투명화]로 몸을 숨겼다.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은신이었다.
본인도 아티팩트의 효과에 퍽 만족한 것 같았다.
“스킬이 부여된 장비는 연속 사용 시 망가질 수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주의하겠습니다.”
“두 분의 무기는 여기 있습니다.”
천이 아니라 별도의 보관함에 넣어둔 무기들.
남호열은 활을 먼저 꺼내어 민유리에게 주었다.
활의 주재료로 사용된 건 여수에서 마주쳤던 돌연변이들.
“유리 씨를 위해 마력을 잘 받아넘기는 소재만 사용했습니다.”
“우와.”
활이 완성되기 전까지 한 번도 확인하지 못했던 민유리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이건 제 역작으로 남을 겁니다.”
맞춤 제작된 검집에 꽂혀 있는 유지한의 검.
스릉!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검이 숨겨뒀던 모습을 드러냈다.
유지한은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검을 보며 말문을 잃었다.
‘이게 내 검이라고?’
작은 흐트러짐조차 없이 일자로 올곧게 뻗어있는 양날검.
얇게 가공된 새까만 금속 위에 별처럼 박혀있는 하얀색 점들은 유지한에게 어두운 시골의 밤하늘을 떠올리게끔 했다.
값비싼 아티팩트에 흔히 달린 화려한 장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얇게 가공된 드리미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명품 그 자체.
명품에 스티커를 붙이는 건 멍청한 짓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아름답다.’
단지 무기에 불과한 물건을 보고서.
아름답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건 처음이었다.
“이름은 큐디(QD).”
“큐디?”
“고요한 꿈(Quiet Dream)의 약자입니다.”
한땀 한땀 깎아낸 드리미움을 어렵사리 녹이고 합쳐 검의 형상을 이루어낸 물건.
그에 어울리게 심상치 않은 예기와 분위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평소 그러지 않는 사람이 아티팩트에 직접 이름을 지은 걸 보면.
그만큼 품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엄청 가볍네.’
유지한은 깃털처럼 가벼운 큐디를 들고서 놀라워했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무게감이 살짝 아쉬운데.’
유지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큐디의 무게는 그가 원하는 정도로 늘어났다.
“이건……!”
“큐디는 무게를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크기나 외형적인 변화 없이 오로지 무게만 변화하는 능력.
지금까지 측정된 최대 무게는 400kg.
남호열은 조금 겁이 난 나머지 그 이상의 무게는 측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게를 평소 사용하던 검보다 살짝 무겁게 설정해둔 유지한은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내구도와 절삭력은 현존하는 그 어떤 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겁니다.”
“그야말로 걸작이군요.”
남호열은 턱수염을 긁적이며 말했다.
“워낙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금속이니만큼……. 다른 정보는 지한 씨가 사용하면서 알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맡겨두세요.”
갖고 싶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웃어 보이는 유지한이었다.
뒤이어 새로운 장비로 갈아입은 유지한 파티는 남호열의 앞에 섰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멋지네요!”
“다 호열 씨 덕분입니다.”
“……크흑!”
유지한 파티의 장비를 성공적으로 제작하는 데 성공한 남호열은 감동에 겨워 울먹였다.
—울보다, 울보!
“남자는 평생 울지 말랬다! 찍!”
다른 이들이 남호열을 다독이는 동안.
유지한은 큐디의 매끄러운 검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생각했다.
‘다시 봐도 훌륭하다.’
무언가를 벤다는 본연의 역할에 아주 충실해 보이는 무기.
기대를 뛰어넘는 품질의 물건이었다.
그는 오늘, 평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
“오! 드디어 도착인가!”
인천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창문에 바짝 달라붙은 남자는 창문 너머로 비치는 한국의 건물들을 바라봤다.
“저게 그 유지한의 나라라는 말이지?”
현재까지 이세계로 진출하기 위한 유일한 관문.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하게 된 남자는 몹시 즐거워했다.
그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여성은 말했다.
“1년 전에는 김현태라는 영웅에게 관심이 있지 않았었나?”
“그놈이 공개한 영화는 너무 맛이 없었어. 돈만 날렸다니까.”
“너보다 못하는 놈들을 왜 그리 신경 쓰는 거야.”
1급 영웅인 주제에 평소 영웅 영화를 좋아하는 남자를 보며.
여성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세계에도 강한 놈들이 많겠지?”
“나야 모르지.”
“반드시 그래야 할 거야. 만약 전부 약하기라도 하면…….”
남자는 입가에 유쾌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너무 실망해서 내가 다 죽여버릴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