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모임
유지한 파티의 조기졸업 소식은 청영사 입교생들에게 빠르게 전해졌다.
“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줄 알았지.”
“당연한 결과네.”
그들 중 대다수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진석우가 청영사의 조기졸업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해준 이유도 그들 때문이었으니까.
청영사를 떠나도 입교생으로서 혜택은 마지막까지 누릴 수 있기에 장점도 많았다.
“벌써 졸업한다며?”
“그렇게 됐어요.”
민유리는 선배 궁수이자 자신의 교관이었던 이수지에게 조기 졸업 소식을 전했다.
원정 이전에 그녀에게 조언을 건넸던 이수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영화 잘 봤어. 마지막에는 정말 훌륭하게 쏘던데?”
“아…….”
민유리는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정영욱으로 인해 칠라가 검은 안개를 들이마시고 쓰러졌을 때.
인내심의 끈이 툭 끊어진 그녀는 이세계인들에게 매우 강력한 화살 한 발을 쏘아냈다.
멀쩡했던 활이 그녀의 넘쳐나는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릴 정도.
단순히 위력만으로 따지자면 교관 이수지의 최대 출력과 맞먹는 공격이었다.
“내가 더 가르칠 건 없겠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감사합니다.”
유지한 파티는 하루 동안 수업에 참여하여 도움을 주었던 교관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에 들어온 담당 교관 진석우는 말했다.
“졸업하시는 분들에게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조기 졸업으로 청영사를 마치는 유지한 파티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누군가는 부러움을, 누군가는 질투심을, 또 누군가는 순수한 감탄을.
어찌 보면 비슷하게 들리는 박수에는 각양각색의 감정들이 실려있었다.
그 박수를 받는 당사자 유지한은 같은 입교생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때와는 확실히 달라졌구나.’
유지한 파티가 청영사에 합격 후 호텔에서 진행된 입교식에 참여했던 날.
사회를 진행하던 백강천은 면접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던 파티를 깜짝 발표했었다.
——마지막으로 유지한 파티!
그때 유지한 파티가 순위권 안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레이디스의 고미나 파티를 제외하면 아무도 곁으로 다가오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입교식에 모였던 사람들과 지금의 인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이제 과거와 같은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유리 씨. 괜찮으시면 연락처를 좀…….”
“잠깐만요, 김시후 씨!”
“저 기억하시죠?”
되레 먼저 인사하고 다가오는 그들의 행동에서는 친절함이 묻어나왔다.
완전히 뒤바뀐 그들의 태도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유지한은 연락처 요청들을 거절하며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미나 언니.”
“언니. 가만히 계실 거예요?”
“…….”
고미나는 동생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침묵했다.
평소 유지한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녀였다.
하지만 유지한이 조기 졸업을 선택한 지금.
그녀는 그와의 접점이 크게 줄어들 위기에 처해 있었다.
“지금이라도 고백하는 게!”
“그건 안 돼.”
고미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유지한이 갑자기 던진 고백을 받아줄 쉬운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더 노력해야지.”
상대방의 존재감이 예상치를 뛰어넘을 정도로 훌쩍 커져 버렸기에.
그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항상 옆에 붙어 다니는 민유리의 존재가 걱정되긴 하지만.
‘기다려요.’
그녀는 미래를 위해 일보 후퇴를 선택하기로 했다.
*****
“몽땅에 대금 보냈어?”
“네!”
꿀잼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던 수익들이 거의 다 들어온 상황.
길드 계좌의 금액 중 일부는 몬스터 처리 업체 몽땅에 보내졌다.
몬스터의 사체와 관련된 물건에 한해서 감별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장사임에게 고품질의 소재를 구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듯 유지한은 자신과 파티원들의 장비를 갈아치우기 위해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재료를 사 모으고 있었다.
‘드리미움은 가능성이 보인다.’
드리미움으로부터 시간을 들여 긁어낸 작은 가루들은 안전한 장소에 보관 중이었다.
통째로 녹이는 건 불가능했지만, 작은 가루로 만든 뒤에 열을 가하면 그 형체가 조금씩 흐물거리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실프를 데리고 마력을 흡수하는 작업을 반복한 게 효과를 본 것이었다.
‘양이 아쉬울 뿐이지.’
남호열이 말하길.
보유한 양의 문제로 인해 드리미움을 주재료로 삼아 제작할 수 있는 건 유지한의 검 하나뿐.
남은 드리미움으로는 다른 장비에 코팅을 둘러줄 계획이었다.
민유리는 구매할 예정인 재료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가디언 샤크의 이빨, 크레이지 오렌지의 껍질……. 전부 하나같이 말만 들어본 소재들이네요.”
“청영사에서 선물로 준 것도 그렇죠.”
“쉐도우 릴리의 잎이요?”
“콜드 그라스의 이슬과 데몬 크로커다일의 가죽도 있고요.”
“찍찍! 내 덕분이로군!”
인당 1개씩 지급받은 선물부터 칠라가 자기 몫을 주장한 덕분에 얻어온 것까지.
유지한 파티가 청영사에게 요청한 선물은 모두 해외에서 발생하는 희귀 몬스터의 부산물이었다.
그것들을 남호열에게 넘기자 남호열은 하이톤의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기뻐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정에서 획득한 미확인 소재 중 쓸만해 보이는 것들은 팔지 않고 챙겨두었으니.
장비가 제작되는 건 이제부터 시간문제였다.
“아참! 오후에 모임 가신다면서요?”
“곧 출발해야 해.”
김시후의 말에 유지한은 품에서 명함 크기의 검은색 종이를 꺼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종이에 마력을 살짝 불어넣자 하얀색 글자가 떠올랐다.
거기에는 모이는 시기와 장소 따위가 적혀있었다.
—친구들 보러 가는 거야?
“그렇지.”
—우히히!
윤도하가 실종되기 전에 그가 선물했던 정령사 모임의 초대장.
그 모임의 날짜가 바로 오늘이었다.
‘혼자 가게 될 줄은 몰랐네.’
그 모임에 설마 윤도하 없이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꼭 후기 들려줘요!”
후기를 들려달라는 김시후의 외침을 끝으로.
유지한은 사무실을 벗어나 모임 장소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1시간 내로 도착 가능한 거리.
“요새 많이 바쁘시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택시 기사님과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유지한은 금세 모임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가.”
지하 1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카페.
계단을 내려가자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보였다.
—으음! 이 안에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져!
실프의 말에 유지한은 카페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아무런 반응이 없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문의 틈새로 마력이 새어 나왔다.
‘정령의 마력이군.’
틀림없이 인간의 것이 아닌 정령의 붉은 마력.
그 마력은 허공에서 하나의 문장을 이루었다.
[문틈으로 초대장을 넣어주세요.]
유지한은 안내에 따라 초대장을 문틈으로 꽂아 넣었다.
곧 확인 절차가 끝났는지 잠겨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유지한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왔군.”
“윤도하 님의 초대장이라…….”
“화제의 그 인물인가.”
각 지역에서 모여든 한국의 정령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약속 시각이 되기 전에 모여있었는지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옆으로 보이는 건 불, 물, 땅, 바람 속성 따위의 정령들.
“이잉?”
“띠르르?”
“오로롱?!”
“키이잇!”
그런데 그때 계약자의 근처에서 얌전히 대기하던 한국의 정령들이.
하나같이 유지한을 바라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뭐야?”
“너희 갑자기 왜 그래?”
정령의 행동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령사들.
유지한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저러는군.’
땅의 정령인 무무나 물의 정령인 아쿠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실프를 보고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보고 반응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유지한은 조금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꿀잼의 유지한입니다.”
“어서 오세요.”
“도하 님께 미리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디그! 커피 좀 타줘.”
“넷!”
생쥐처럼 생긴 땅의 정령은 주방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서 유지한에게 제공했다.
그 정돈된 움직임은 전문가의 움직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넌 저런 거 못 하냐?”
—어허, 손이 없는걸!
유지한은 실프의 핑계를 들으며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모든 인원이 참석한 것인지, 사회자로 보이는 사람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흠흠! 이번 23회 정령사 모임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벌써 23번째로 진행되는 정령사 모임.
사회자는 불의 정령사인 자신을 간단하게 소개한 뒤.
아직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안타깝게도 윤도하 님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
윤도하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자 몇몇 정령사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이자 최강의 정령사로 손꼽히던 그의 실종은.
다른 정령사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살아계실 가능성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입니다.”
“오늘 모임에 처음으로 참여하신 유지한 씨가 그 정보를 제공해주셨죠.”
유지한에게 모이는 시선들.
그 시선에는 호기심이 잔뜩 담겨 있었다.
“정령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능력이에요!”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영화를 통해 실프의 능력은 어느 정도 외부에 드러난 상황이었기에.
정령사들은 전례 없는 정령의 힘을 두고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그에 유지한은 실프에게 설명을 맡겼다.
—마력이 쿵! 하고 떨어지면 팟! 하고 튀어 오르는 느낌이야!
“쿵과 팟이라…….”
—계약자와의 연결이 그 순간에만 훨씬 더 강해지는 느낌이랄까?
“과연! 심오하군.”
감각에 의존하는 실프의 설명을 듣고도 정령사들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목적인지 실시간으로 실프의 말을 받아적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 미안하네.’
그들이 보여주는 열정적인 학구열에 유지한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정령의 힘이 아니라 고유 스킬이라는 사실은 차마 밝힐 수 없었다.
*****
향기로운 커피와 함께하는 정령사 모임의 시작은 실프와 유지한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원정과 관련된 여러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회자의 중재 아래 그 이후의 진행은 모임의 본래 흐름으로 흘러갔다.
“미국 정령사 협회에서 저희 쪽으로 보내온 연구 결과입니다.”
“불의 정령과 물의 정령을 1시간 이상 접속했을 때 마력의 손실이 어느 정도로 일어나는지…….”
해외의 정령사로부터 보고된 미공개 연구 결과들.
“물의 정령에게 장비를 입히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저런! 안타깝네요.”
“어찌어찌 입기는 했지만, 장비의 효과를 전혀 누릴 수 없을뿐더러, 전투 도중 벗겨지는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는…….”
정령을 활용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과 시도.
그 외에도 유지한이 혼자서는 접하기 힘든 정보들이 모임 내에서 주제로 다루어졌다.
물의 정령을 데리고 전국의 온천을 여행했다는 이야기는 흥미롭기까지 했다.
“이봐!”
“네가 신입이냐?”
—그렇다! 이몸이 바로 신입이지!
모임에 처음 참석한 실프에게 건들거리며 다가가는 정령들.
실프는 그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태도가 마음에 드는군!”
—너도다!
“와하하!”
—우히히!
다행히 정령들은 첫 만남에도 서로 죽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아쿠아라는 물의 정령과는 원정에서도 한번 마주쳤었기에.
실프는 더 쉽게 정령 집단에 녹아들 수 있었다.
‘소리를 내는 방법에 따라 정령의 목소리가 다르게 들리네.’
모임 도중 15분 정도 주어진 개인 휴식 시간.
유지한이 가만히 정령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유지한 씨.”
50대 여성 정령사가 유지한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 모임에 참석하는 정령사 중에는 3번째로 나이가 많은 정령사.
영웅으로서 현역에서는 일찍이 은퇴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의 정령 활용으로 주목을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혹시 어머니 이름이 박기주예요?”
“어?”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자 유지한은 화들짝 놀랐다.
그로서는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