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UN (4)
UN 파견단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
양지철은 유지한을 따로 불러서 말했다.
“지한 씨께서는 이번에 방문하는 UN 측을 조금 경계해주십시오.”
“경계하라는 말씀은…….”
“정말로 도움이 필요했을 때는 끝까지 우리의 요청을 무시하던 이들입니다. 상황이 다 끝난 뒤에서야 온다는 걸 보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테죠.”
테러가 발생했던 당시 한국의 지원 요청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UN.
분명 도움을 줄만 한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번 테러에서 발생한 새로운 몬스터와 그 외의 부산물들을 노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일리가 있군요.”
“방문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한국에 들어온 순간부터 저희도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감시할 예정입니다.”
양지철은 UN 파견단이 입국하기 전부터 그들을 경계했다.
원정대가 원정에서 얻어낸 성과를 그들을 중간에 가로채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세계평화를 위한다는 국제기구를 두고 과한 걱정이었을 수도 있었으나, 정부 부처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 보면 접하게 되는 여러 소문들이 있는 법.
그리고 유지한은 그런 양지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이거군.’
유지한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UN 파견단을 바라봤다.
몸을 아주 작게 줄인 실프가 제 존재감을 지우고 숨어있던 것도 모른 채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결국, 제 입으로 감춰뒀던 사실들을 들려주고야 말았다.
—나 잘했어?
“너밖에 없다.”
—우히!
다시 몸을 원래 크기로 키운 실프가 유지한의 곁으로 날아갔다.
UN의 영웅들은 어느새 무기를 꺼내 들고 그와 자신들의 리더를 힐끔거렸다.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때 무기를 들지 않은 올리비아가 말했다.
“지, 지한아! 내가 다 설명해줄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설명해 줄 필요 없어.”
“뭐?”
“정확하게 이해했으니까.”
이제는 너무 멀리 떨어진 거리가 아니라면 실프가 듣는 것들을 함께 들을 수 있게 된 유지한이었다.
대화를 전부 다 들어버린 마당에 오해 따위는 없었다.
“감히 우리에게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령을 몰래 숨겨둔 것은 UN의 요청을 정면으로 무시한 행동.
파견단은 그에 대한 책임을 물리겠다고 위협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UN이라는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변해버릴 터.
하지만 유지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 해 봐.”
“……뭐라고?”
원정대의 핵심으로 이름을 떨친 영웅.
최단기간 내 2급으로 성장한 파티의 리더.
그의 활약상은 지금까지도 인터넷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 유지한이 UN과 마찰을 빚었다면 누구나 그 이유를 궁금해하리라.
“사람들은 당신들과 나, 둘 중 과연 누구 편을 들어줄까?”
“…….”
한국의 여론은 유지한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주변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상황.
그와 대적한다는 건 확률이 매우 낮은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다.
“꽤 대범하게 나오시는군요.”
“누구들 때문에 말이지.”
으득!
파견단의 리더는 이를 깍 깨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한국에서 가장 요주의 인물인 유지한에게.
대화가 새어나간 건 커다란 낭패였다.
“믹!”
“근처에 아무도 없습니다.”
UN 파견단을 제외하고 이 근처에 존재하는 영웅은 오로지 유지한 한 명뿐.
파티원들 없이 홀로 파견단을 찾아온 그였다.
‘……죽여버릴까?’
이 자리에 존재하는 1급 영웅은 무려 4명.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영웅들이 한국에 들어온 셈이었다.
이것은 1급 영웅이 전부 사라져버린 한국을 농락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제 막 2급에 오른 영웅 따위는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와라.”
“……!”
그때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유지한이 자세를 잡았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태도.
1급 영웅을 코앞에 두고도 망설임은 없었다.
UN 소속 영웅들 또한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법한 일촉즉발의 상황.
‘이건 위험하다.’
파견단의 리더는 고민했다.
만약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유지한이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땐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번 파견의 목적을 달성하기 이전에 UN이라는 국제기구에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 몇 명의 직위가 해제되는 것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닐 터.
타앗—!
그때 파견단의 한 남자가 유지한을 향해 돌진했다.
벡스터 올슨이라는 이름의 1급 영웅이었다.
‘내가 처리해주마!’
검을 사용하는 전사로서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전사.
그는 자신의 검이 유지한의 목을 베어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채앵!
그러나 그의 공격은 유지한이 들어 올린 검에 의해 가볍게 막혔다.
어지간한 영웅들은 인식조차 하기 힘든 속도였지만.
유지한은 공격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막아내는 놀라운 반응 속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역시 1급치고는 그닥이야.’
유지한은 UN의 1급 영웅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그들이 명성에 비교해 기세가 그리 강하지 않다고 느꼈다.
윤도하나 백강천 같은 진짜배기들과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
그리고 지금의 충돌로 그 생각에 확신이 더해졌다.
아마도 UN은 자신들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1급 영웅들을 찍어낸 모양이었다.
“실프!”
—해보자는 거지?
유지한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당황한 벡스터를 향해 그가 반격에 들어가려는 찰나.
쾅!
파견단의 리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올슨!!”
“……!”
“너 미쳤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죄, 죄송합니다.”
“멍청한 놈! 당장 무기 버리고 뒤로 빠져!”
고개 숙인 벡스터는 들고 있던 검을 즉시 바닥으로 떨구고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파견단의 리더가 유지한을 향해 말했다.
“미안합니다. 방금은 저놈의 실수였습니다.”
“막지 않으면 치명상인 공격이었는데, 실수라고?”
“…….”
“그렇다면 나도 ‘실수’로 당신을 죽여도 되겠어.”
파견단의 리더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벡스터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유지한의 적개심은 한층 강해져 버렸다.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으니.
‘쉽지 않은 놈이다.’
이 자리에서 유지한을 처리하는 건 어렵겠다는 깨달음이었다.
벡스터의 기습을 막을 정도라면 영화에 나왔던 그의 활약은 전혀 과장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유지한 씨! 나는 이 문제가 더 커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벌여놓고?”
변명조차 불가능한 UN 측의 잘못.
파견단의 리더는 항복하듯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그쪽에게 원하는 게 있을까.”
“……뭐든 좋으니까 일단 말해보십시오.”
네가 원하는 걸 줄 테니 입을 다물어달라는 부탁.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하던 유지한은 주변의 영웅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하나같이 때깔 좋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당신이 착용한 목걸이.”
“네?”
“내놔.”
“이걸 달라고요?!”
유지한이 가리킨 건 파견단 리더의 목걸이.
언뜻 보면 평범한 목걸이였음에도 그는 적잖게 당황했다.
그것이 UN의 간부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돈을 드리는 게…….”
“싫어? 싫으면 말고.”
“아, 아니! 잠깐만!”
파견단 리더가 황급히 문을 나가려는 유지한을 불렀다.
마지막 기회라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유지한.
“……쯧.”
목걸이를 붙잡고 고민하던 그는 결국 목걸이를 벗어서 유지한에게 던졌다.
가볍게 목걸이를 붙잡은 유지한은 그것의 외형을 확인했다.
은으로 장식된 체인에 꿰여있는 투박하게 생긴 하얀색 돌.
‘이게 용의 뼈인가.’
미국의 이름 모를 도마뱀이 몬스터로 변하여 등장했던 1급 몬스터 하이퍼 드래곤.
다른 이름으로는 디제스터(Disaster) 라고도 불린 실체화된 재앙.
UN 측은 그 드래곤을 제압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명목으로 하이퍼 드래곤의 뼈를 일부 양도받았다.
그리고 내부에서 큰 성과를 올린 사람들에게 뼈로 목걸이로 만들어서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지한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티팩트를 만드는 건 대부분 실패했다고 했지.’
드래곤의 뼈로 아티팩트가 만들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만들어봤자 보통은 아무런 효과 없이 그저 단단한 검으로 완성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유일한 성공 사례로 알려진 건 미국의 1급 영웅이 보유하고 있다는 검.
그 외에 남은 뼈들은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자 한 박물관에 전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거면 되겠죠?”
“겨우 이거 하나로 넘어가려고?”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목걸이를 잃고 똥 씹은 표정이 된 파견단의 리더.
반면 유지한은 천천히 파견단의 얼굴을 훑었다.
그중에서도 올리비아는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저건 내가 알던 유지한이 아니야!’
기억 속 순진한 남자와는 너무 달라져 버린 1명의 영웅.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 혹은 전 여자친구였다는 것만으로 그를 가볍게 대할 수 없었다.
“너희 전부 내일 오전까지 한국을 떠나.”
“그건……!”
“이번 테러에 관해서는 조만간 정리된 자료가 나올 테니까 애초에 UN에서 파견단을 보낼 필요가 없었지. 그리고…….”
유지한은 바닥에 떨어진 벡스터의 검을 주웠다.
“이것도 내가 가져간다.”
“안 돼!”
“돼.”
“으아아아!”
자신의 애검을 잃은 벡스터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유지한은 홀로 유유히 떠나갔다.
*****
“벌써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영웅부의 훌륭한 대처를 보니 저희가 따로 조사할 건 없겠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떠나겠다는 UN 파견단.
그에 영웅부는 몹시 의아해했다.
하지만 눈엣가시가 알아서 사라져준다는데 굳이 막아설 이유는 없었다.
파견단 리더는 인사차 따라 나온 유지한 파티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유지한 씨를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별말씀을.”
한 차례의 가식적인 인사가 오간 뒤.
파견단 리더가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넌지시 말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겁니다.”
“당신들 하는 거 보고.”
가짜 웃음을 짓는 그를 향해 진짜 웃음을 지어주는 유지한이었다.
뒤이어 유지한은 올리비아와도 악수를 나눴다.
“넌 어제 보니까 영웅은 때려치우고 배우 해도 되겠더라.”
“……!”
연기력을 칭찬하는 말에 올리비아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너한테서 자꾸 불쾌한 냄새가 나는데.”
“뭐? 불쾌한 냄새?”
“예전에 검으로 찢어버린 꽃이 생각나더라고. 다음부터 향수는 바꾸는 게 좋겠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올리비아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하지만 유지한은 능청맞게 웃을 뿐이었다.
그를 째려본 올리비아의 다음 악수 상대는 민유리.
꽈악!
올리비아는 홧김에 민유리와 마주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손뼈가 전부 부러져버렸을 완력.
쉽사리 건들 수 없는 유지한을 대신하여 그의 파티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윽!”
그러나 표정을 찌푸리는 사람은 민유리가 아니라 올리비아였다.
민유리가 올리비아를 넘어서는 힘으로 그녀의 손뼈를 주물렀기 때문이었다.
‘일행 중에 가장 약해 보였는데, 무슨 힘이……!’
황급히 손을 빼려고 하는 올리비아에게 민유리가 조용히 말했다.
“깝치지 마.”
“……!”
“지한 씨에게 달라붙지도 말고.”
천사처럼 웃는 낯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민유리.
사색이 된 올리비아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 뒤에야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찍, 찍찍…….”
올리비아를 대하는 주인의 태도에 칠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