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UN (3)
“남수지?”
“진짜 진짜 반가워!”
5초, 6초, 7초…….
유지한과 포옹 후 무려 7초가 넘도록 붙어있던 올리비아.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그녀는 밝게 웃는 얼굴로 유지한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붙어있는 거야?’
민유리는 거머리처럼 유지한에게 달라붙는 올리비아를 째려봤다.
평소 친한 사람을 만났다는 분위기도 아니고.
갑자기 다가와서 친근한 척하는 그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찍! 주인이 이상하다……!’
칠라는 정장의 불편함도 잊어버린 채 눈동자를 굴려 가며 민유리의 눈치를 살폈다.
올리비아의 등장과 동시에 주인의 분위기가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언뜻 보면 몇 초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칠라는 민유리의 변화에 그 누구보다 민감했다.
“남수지 맞지?”
“맞아! 지금은 국적을 바꿔서 올리비아라고 부르면 돼.”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내가 UN 소속 영웅이니까!”
올리비아는 옷깃을 잡아 UN 소속 영웅에게만 허락된 배지를 보여주었다.
다른 핵심 관계자들도 같은 배지를 옷에 착용하고 있었다.
저게 가품일 확률은 거의 없겠지.
“하하,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 같군요?”
“으음……. 같은 영웅 학원 출신입니다.”
UN 관계자의 물음에 유지한은 멋쩍게 웃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올리비아는 그의 전 여자친구겠지만.
손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몇 시간 만에 헤어졌던 관계를 두고 연인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올리비아는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섭섭하네? 그래도 내가 한때 네 여자친구였는데…….”
“……!”
그녀가 전 여자친구라는 말을 듣고 민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행동이나 말투로 보아 역시 올리비아가 유지한과 단순한 관계는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었다.
‘저 사람들이 1급 영웅들인가.’
유지한은 뒤쪽에서 말없이 조용하게 서 있는 남녀 무리를 바라봤다.
벡스터 올슨, 메이슨 스펜서, 제임스 말콤 등.
UN을 지탱하는 영웅 중에서도 각국의 동의를 얻어 1급의 자리에 올랐다는 영웅들이었다.
‘……1급 맞겠지?’
그런데 유지한은 그들을 마주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윤도하나 백천강 같은 1급 영웅을 마주쳤을 때와는 다르게.
상대의 기세로 눌리거나 압도당한다는 감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영웅부 관계자는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유지한 파티에게 쏠리는 시선들이 있으니 계속 여기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저쪽입니다.”
영웅부와 UN 일행은 이내 인천 공항의 입구로 빠져나왔다.
그 앞에는 그들을 위한 리무진 따위의 차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한아. 나랑 같이 타면 안 돼?”
“뭐?”
“오랜만에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단 말이양.”
올리비아는 유지한의 왼팔을 잡아다 자신의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민유리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의도적이고도 노골적인 접촉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유지한이 올리비아의 품에서 슬그머니 팔을 빼며 말했다.
“일행이 있으니까 할 말이 있거든 영웅부로 가서 보자.”
“아, 참! 그랬지!”
올리비아는 옆에서 가만히 대기하던 김시후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직후 시선을 옮겨 민유리를 바라보는데.
‘……흐응? 왜 저럴까?’
자신을 경계하듯 바라보는 민유리에게서 적의를 감지하고 몸을 멈칫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미소 지은 그녀는 일행과 함께 리무진에 탑승했다.
유지한 파티는 별도로 주차해둔 민유리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입을 다문 민유리가 시동을 거는 가운데, 김시후가 입을 열었다.
“지한이 형. 방금 그 사람이 예전에 말한 전여친이에요?”
“그래.”
“……!”
유지한의 연애사는 민유리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
두 남자의 대화에 그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하루 만에 형을 차버렸다는 사람 맞죠?”
“맞아. 그런데 국적을 바꿨을 줄은 몰랐네.”
“……하루 만에 차였다고요?”
생각보다 허무한 과거에 민유리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루도 아니죠. 6시간도 안 지났을 테니까.”
“허! 겨우 그걸로 자기가 여자친구였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도 그게 잘 이해는 안 되네요.”
“조심하세요.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접근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없던 올리비아가 친근함을 드러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유지한에게 생각나는 것이라면 최근에 급상승한 자신의 인지도,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멍청하겠어.’
그의 기억 속 남수지는 꽤 머리가 좋았던 영웅이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을 받아들였던 것도 그녀가 나름 괜찮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 뻔한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영웅부로 돌아온 유지한 파티는 다시 UN 파견단과 마주했다.
공항에서 손님 입국을 맞이했으니 사실 오늘 유지한 파티 일정은 끝난 것이었지만.
상대 측에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원했다.
“찍찍! 반갑다!”
“정말로 말을 하시는군요.”
“찍? 말하는 친칠라 처음 보냐?”
“처음 봅니다.”
“사실 나도 처음이다! 찍!”
복잡한 공항에서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칠라의 능력.
칠라와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던 UN 측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중고등학생 수준의 언어 능력으로 대화가 끊김 없이 진행되는 건 물론이고.
간단한 영어나 신조어 따위를 습득하고 곧바로 활용하기까지.
하나같이 기존 몬스터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능이었다.
“다른 몬스터와도 대화가 가능합니까?”
“찍찍. 너무 멍청한 놈들은 안 된다.”
소통 능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몬스터와는 대화가 불가능했기에.
기대를 가지고 있던 UN 측은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영화 <아제시아>를 통해 유리 씨의 활약을 지켜봤습니다.”
“원거리 딜러로서 매우 독특한 공격을 사용하시더군요?”
“이미 멀리 떨어진 마력을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는 방법이 뭡니까?”
파견단의 원거리 딜러들은 민유리를 추켜세우며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외국인임에도 하나같이 한국어에 익숙한 그들은 공개된 영화를 기반으로 한 많은 질문을 쏟아냈고.
민유리는 가능한 선에서 그들에게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제 친구도 미국에서 영웅으로 활동하는 엘프입니다.”
“어? 그거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이번에 그놈이 당신을 보고서 굉장히 기뻐했는데…….”
김시후 또한 종족이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때.
유지한은 올리비아와 마주 보고 있었다.
‘자리 배치가 왜 이래?’
파견단의 영웅 중에서도 전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째서인지 비슷한 부류끼리 앉은 파티원들과 달리.
유지한은 올리비아에 이끌려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거 미국에서 어렵게 가져온 사탕인데 한번 먹어봐.”
바스락!
올리비아가 포장지에서 사탕을 꺼내자 유지한은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아!”
“……?”
“아 해봐. 아!”
과자를 유지한의 입술 앞으로 가져가는 올리비아.
직접 먹여줄 테니까 입을 벌리라는 뜻이었다.
“그냥 이리 줘. 내가 먹을게.”
“아니야, 내가…….”
탁!
유지한은 그녀의 손에서 사탕을 빼앗아 직접 입에 넣었다.
그러자 빈손이 된 올리비아가 흠칫 놀랐다.
‘뭐 이리 빨라?’
혹시라도 유지한이 과자를 뺏으려고 하면 장난스럽게 행동하며 피하려고 했거늘.
그가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한순간 바람이 손을 스치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잘 보이지도 않았어.’
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대응조차 하지 못한다는 건.
기본적인 신체 능력에서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것이 반경 1m 내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 격차가 상당히 크다는 것.
‘얘 수준이 이 정도였다고?’
적잖게 감탄한 올리비아가 유지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영웅 영화라고 해봤자 CG를 더한 허세 가득한 영상에 불과할 뿐.
한국에 일어난 테러 덕분에 운 좋게 이름을 알린 줄 알았더니.
그게 마냥 운으로만 이뤄낸 결과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과거의 그녀가 기억하던 학생 유지한과는 많이 달랐다.
“남수지.”
“올리비아라고 부르라니까?”
“올리비아.”
“그래. 왜?”
까득!
유지한은 혀 위에 있던 사탕을 이로 콱 깨물며 말했다.
“너 목적이 뭐야?”
“……목적이라니?”
“이렇게까지 접근하는 걸 보면 목적이 있을 거 아니야.”
“에이, 그런 거 없어.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예전 친구들 만나면 다 반갑다니까?”
싱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올리비아였다.
하지만 유지한은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너 우리 영웅 학원 다닐 때 기억해?”
“응응! 그때 너랑 조금 더 오래 만나볼걸.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쉬워!”
“…….”
“그땐 내가 진짜 철부지였는데…….”
올리비아는 오래전 과거를 떠올리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유지한은 그 모습을 보며 여수에서 마주쳤던 이세계인 파라스를 떠올렸다.
‘연기력이 상당한 놈이었지.’
마트에서 생존자 사이에 숨어들어 스파이 역할을 했던 이세계인.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높은 확률로 연기파 배우가 되었을 녀석.
지금 그의 처절한 연기가 떠오르는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배우가 돼야 했던 놈들이 제 적성을 찾지 못했군.’
자기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직업을 갖는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
“칠라라는 몬스터는 어떻던가요?”
“듣던대로 대단해. 이해력은 물론이고 중간중간 간단한 농담까지 하더라고.”
“음이 높낮이도 정확하고 현지의 한국인과 비교해봐도 발음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지. 고작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UN 파견단은 칠라를 반드시 UN으로 데려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칠라의 몸을 해부 및 연구하여 다른 친칠라나 몬스터들도 말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수술법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그를 통해 다양한 몬스터와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세상이 된다면.
몬스터와의 전쟁은 줄어들고 세계 평화라는 목적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 터였다.
“그 우유라는 약물은 찾아봤나?”
“쉽게 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침 약물을 개발한 관계자가 이곳에 구금되어 있다더군요.”
“흐음……. 그놈도 우리가 데려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파견단의 리더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그가 이내 올리비아를 향해 말했다.
“유지한은 포섭할 수 있겠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올리비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유지한은 언젠가 그녀에게 한번 넘어왔었던 남자다.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그를 구워삶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그는 올리비아를 경계하며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
대화 몇 번 나눠보지도 않고 고백을 받아들였던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었다.
“다른 파티원들은 어떤가?”
“…….”
“어려운 모양이군.”
파견단의 리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3일 안에 유지한 파티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친칠라만이라도 강제로 데려간다.”
“그들이 과연 칠라를 순순히 양보할까요?”
“고작 3명뿐인 길드이자 파티야. 내놓지 않는다면 대가를 치러야겠지.”
세계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잡음 따위는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야 이놈들아!
“……?!”
—누구 마음대로 칠라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엉?!
몸을 최대한 줄이고 바닥에 숨어있던 실프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앙!
뒤이어 유지한이 굳게 잠겨있던 문을 강제로 부수며 모습을 드러냈다.
화들짝 놀란 파견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대가를 치를 거라고 했나?”
“……!”
콰드드득!
문틀을 움켜쥔 유지한의 손에서 문틀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어서들 해봐. 개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