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UN (2)
소파에 앉아있는 올리비아는 다리를 꼬며 여유로운 척했다.
영웅답게 잘 가꿔진 몸매와 제법 미인 축에 드는 얼굴.
한껏 여유가 묻어나오는 태도는 그런 그녀에게 상당히 어울렸다.
하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는 전혀 달랐다.
‘씨발! 씨발! 이게 다 저 대머리 때문이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눈앞의 임원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이라고 봐도 좋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편했는데!’
몇 년 전, 한국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우대해주겠다는 말에 솔깃하여 국적을 미국으로 변경하고 몇 개의 길드를 거쳐 가며 인맥을 통해 들어온 UN이었다.
영웅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은 거의 없고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매달 들어오는 수입은 거대 길드에서 활동하는 영웅 못지않은 수준.
덕분에 올리비아는 목숨을 걸고 사냥을 하지 않고도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네가 유지한의 여자친구였다고?
최근 유지한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자 올리비아는 과거 그와의 알량한 인연을 주변에 자랑했다.
동료들을 관심을 끌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유명한 영웅과 연인이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연인 또한 주목을 받는 경우가 있었기에.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섣부른 행동이 화근이었다.
주변에 으스대며 들려줬던 이야기는 그녀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가더니.
끝내 높은 분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때마침 유지한이라는 영웅을 포섭할 계획을 갖고 있던 UN은 그 계획에 올리비아를 강제로 참여시켰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발을 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잖아.’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발을 뺄 수 없다면 위에서 기대하는 대로 철저하게 따라줄 생각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몇 년간 돈 걱정은 안 해도 돼!’
올리비아는 피 튀기는 싸움을 싫어했다.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전투에 나설 때가 많았지만 생리적인 거부감이 강했다.
그런데 유지한을 UN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하면 보상으로 막대한 보너스를 주겠단다!
평소 낭비벽이 심한 그녀로서는 끌릴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게다가 그놈이 은근히 멋져진 것 같단 말이야…….’
영화 속에서 비치던 유지한의 모습은.
과거 영웅 학원에 다니던 학생 유지한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에게 고백했다가 바로 차버린 건 올리비아 스스로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현재의 유지한이 썩 괜찮은 남자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음……. 향수를 하나 구하고 싶어요.”
“향수?”
“타겟을 포섭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겠습니다.”
“좋아. 허락하지.”
몬스터로 변한 제비꽃에서 추출한 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한정판 향수.
임원은 부하에게 지시하여 그녀가 원하는 그 고가의 향수를 주문하도록 했다.
물량이 적어서 올리비아 개인으로서는 갖고 싶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지만.
자원이 넘쳐나는 이 조직이라면 뭐든 구할 수 있을 터.
‘기다려, 지한아.’
올리비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소 엉뚱하게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어차피 유지한은 그녀에게 한번 넘어왔었던 상대.
그야말로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
운전석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던 민유리가 자신의 새로운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목걸이를 착용하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거슬리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백미러로 목걸이를 보던 그녀가 이내 김시후에게 말했다.
“시후 너 이제 모자는 안 쓰고 다니는 거야?”
“흐흐……. 연습하는 중이에요.”
집 밖에 나와 있음에도 머리칼과 귀를 드러낸 김시후.
모자 벗는 연습을 하는 그는 어색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참, 이거 서울에 사는 엘프가 보낸 편지예요.”
“뭐라고 적혀있는데?”
“저 같은 사람이 생겨서 기쁘대요.”
외부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인간과는 다른 특징을 감추는 것이 기본이자 습관이 된 이종족들.
회사를 세워서 큰 규모의 기업으로 키워낸 소수의 이종족들도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매번 모자나 장갑 따위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상당한 인지도를 얻은 김시후가 공개적으로 종족을 드러낸 것에 기쁘고 감사하다 말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런 걸 보니까 더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열심히 해라.”
“찍찍! 나도 돕겠다!”
유지한 파티는 민유리가 이끄는 차를 타고 하늘보호소 앞에 도착했다.
윤도하가 있는 카를렘과 관련해서 프란 페이저에게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파아아앙!
뜬금없이 하늘보호소 건물 안에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외부로 마력을 방출한 것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못처럼 따가운 마력이었다.
“지한 씨!”
“바로 갑시다.”
탁!
차 문을 박차고 나온 유지한 파티는 곧장 마력을 느낀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해당 구역에 도착했을 때.
“당장 말해! 누가 너한테 이딴 짓을 한 거야!”
보호소의 한 동생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프란을 볼 수 있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문 앞에 서 있는 유지한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듯했다.
“프란 오빠! 그만해!”
“애들 겁먹은 것 좀 봐!”
과거 유지한이 구해주었던 고양이 귀의 수인, 릭시스와 비슷한 연배의 이종족들은 프란을 만류했다.
그때 한 아이가 칠라를 발견했다.
“어! 칠라다.”
“뭐라고?”
한순간에 입구로 몰려드는 시선들.
유지한 파티는 그 시선을 받으며 프란에게 다가갔다.
“형님들! 언제 도착하신 겁니까?”
“프란. 그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게…….”
분노하여 마력을 뿜어냈던 프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 동생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머리카락에 살짝 탄 흔적이 남아있는 아이.
누군가가 마법을 이용해 머리카락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대강의 사정을 파악한 김시후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학교에는 말 해봤어?”
“교장 선생님이 직접 찾아와서 문제 크게 키우지 말고 넘어가자는 이야기만…….”
“……그 학교 번호 좀 알려줘.”
김시후는 프란으로부터 학교의 전화번호를 건네받았다.
곧장 그 번호로 연락을 걸자 한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유지한 파티의 김시후입니다.”
—어? 어? 그 영화에 나오신 분이요?!
“급한 건이니까 당장 그쪽 교장 선생님 바꿔주세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교장과 전화가 연결되자 김시후는 다시금 자신의 소속을 알렸다.
그리고는 반가움을 드러내는 교장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내에서 발생한 종족 차별을 은폐하려고 하셨죠?”
—아니, 그건……!
“해당 학생에게 사과하시고 가해자 처벌 확실하게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직접 언론을 통해 이번 사건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아, 안 됩니다!
종족을 공개하며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는 김시후였다.
그런 그가 종족 차별 사례를 직접 언급한다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위기를 감지한 교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일까지 전부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마지막 경고까지 건넨 김시후가 전화를 끊었다.
영웅으로서의 영향력을 이용한 선의의 협박.
프란은 조금 감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얌마, 형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괴롭힘을 당했다는 아이를 잠시 위로해준 뒤.
유지한 파티는 프란과 함께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호소의 소장 정은영은 잠시 외출을 나간 모양이었다.
“찍찍! 나를 따르라!”
—얘들아! 나 잡아봐라!
다른 아이들은 칠라와 실프에게 맡겨놓으니 마음 놓고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민유리는 표정이 어두운 프란에게 말했다.
“요새 학교 분위기가 안 좋아?”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이세계인 때문에 심해진 종족 차별은 학교에 다니는 이종족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나이 먹은 성인들이야 여러 비난에도 담담하게 넘어갈 수 있을 테지만.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는 큰 상처로 남을 수 있을 터.
“제가 이름만 알고 있던 드워프는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에 결국 자퇴를 했다고 하더군요.”
종족 차별이 심해지면 사회로 진출하는 이종족의 수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인간인 유지한으로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음지로 스며든 몇몇 이종족들의 좋지 못한 결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시후 형님 같은 분들이 계시니까 다행입니다.”
“내가 뭘 했다고…….”
“저희에겐 우상이십니다!”
종족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인정받는 길드의 수장.
김시후 본인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주로 어리고 젊은 나잇대의 이종족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심지어 영웅을 꿈꾸는 이종족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제가 도울 게 있다면 뭐든 돕겠습니다.”
“카를렘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전부 말해줘.”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프란은 볼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러프하게 지도를 그리며 말했다.
“카를렘에는 크게 3개의 세력이 있습니다. 1개의 세력이 지구의 국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건 알고 있어.”
“저는 커다란 광산이 가득한 지역에서 자랐는데…….”
광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광산 근처의 마을에서 자라난 프란.
사람이 가득한 도시와 관련된 기억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카를렘에 방문하려는 유지한 파티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쏟아냈다.
“하늘에는 모양이 다른 3개의 달이 떠 있고, 모든 세력들은 1개의 달이 완전히 둥글게 차오를 때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3개의 달이 똑같은 모양이 되는 날에는 전 대륙에서 축제를 벌어졌죠. 축제 도중에는 평화 협정을 맺어 모든 전쟁을 중단하고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규칙도 있었습니다.”
“어? 축제라는 건 처음 듣는데.”
“달의 모양이 같아질 수가 있어?”
“1년에 딱 3일 동안만 같아집니다. 그때는 숨만 쉬어도 마력이 빠르게 회복될 정도로 대기에 존재하는 마력이 아주 짙고 풍부해지죠.”
약 1시간가량 계속된 프란의 설명.
카를렘의 현지인이었던 어린 드워프의 지식은 인터넷으로만 정보를 조사했던 유지한 파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란. 네가 만약 우리와 카를렘에 같이 갈 수 있다면 어때?”
“마음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지구로 오게 된 건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프란은 아주 잠깐이라도 카를렘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손재주가 좋은 드워프가 노예처럼 부려지는 세계.
반항적인 드워프들은 벌레처럼 죽어 나갔던 그곳에 프란이 두 번 다시 방문할 일은 없었다.
*****
인천 국제공항.
원정으로 인해 공항이 폐쇄되었던 때와 달리 한국을 떠나거나 새롭게 들어오는 이들로 다시 혼잡해진 공항에서.
영웅부는 UN에 보낸 파견단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 오시는 거죠?”
“5분 남았습니다.”
유지한 파티는 영웅부 관계자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칠라는 배를 긁으며 말했다.
“찍찍! 주인아, 답답하다!”
“칠라. 너 원래 이런 거 잘 입었잖아.”
“그땐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찍!”
“살이 쪄서 그런가?”
“찍! 긍지 높은 친칠라를 모욕하지 마라!”
도착 예정 시간을 조금 넘기자 입국장을 통해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훑어보던 영웅부 관계자는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우! 처음 뵙겠습니다! 제임스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저쪽이 영웅 유지한입니까?”
화상 통화로 몇 번 이야기를 나눴었던 관계자들의 만남.
유지한은 한국어에 익숙하다는 파견단의 우두머리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그의 뒤로 걸어오는 영웅들의 행색을 살폈다.
“……응?”
그런데 파견단에서 한 여성이 유지한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유지한은 어쩐지 익숙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너 설마…….”
“꺄아! 지한아! 너무 오랜만이양!”
“……!”
유지한의 코앞까지 다가온 올리비아는 그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그가 적잖게 당황한 사이.
‘저 여자 뭐야?’
곁에 있던 민유리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