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UN
“전부 다 꽝이네.”
유지한이 카지미르에게 알려줬던 로또 번호는 안타깝게도 그 주의 추첨 결과와 단 1개의 번호도 일치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은 번호로 로또를 구매했던 유지한은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로또는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확정된 미래라고 했었나.’
샘플링이라는 고유 스킬로 일일이 확률을 알아보던 때.
니로치는 스킬이 동작하지 않았던 순간을 두고 이미 확정된 미래에 관한 확률은 알아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아마 지금도 그러한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
그때 민유리가 말했다.
“로또는 실패했어도 돈은 있죠.”
“그건 그래요.”
유지한과 민유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영웅부에서 꿀잼에 지급하겠다던 10억가량의 원정 보상금이 오늘 입금된 덕분이었다.
“주사위에서 몬스터의 무정란은 금방 팔렸다고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며칠 뒤에는 영화 조회수에 따른 수익 등 각종 부수입이 정산될 예정이었으니.
기존 길드 계좌에 있던 돈까지 합치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금액이었다.
“크으! 이제 가난한 시절은 다 갔구나!”
김시후는 길드 계좌에 적힌 입금 내역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출까지 고려했던 궁핍한 길드는 이제 없었다.
비슷한 규모의 길드 중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길드장으로서 커다란 기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는 그였다.
“찍찍! 돈이 생겼으니 점심은 고기인가?”
“안 돼. 오늘은 샐러드만 먹어.”
“찍?! 주인! 그게 무슨 소리냐!”
“너 며칠째 집에서도 삼겹살만 먹었잖아! 배에 살 접히는 것 좀 봐.”
“찍, 찍찍. 주인이 날 괴롭힌다…….”
말괄량이 동생을 대하는 듯한 민유리의 태도.
최근 몸무게가 급격하게 늘어난 칠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히히!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실프는 그런 칠라를 조롱하듯 녀석의 머리 위에서 몸을 빙그르르 굴려댔다.
유지한은 잠시 파티원들의 잡담을 듣던 도중 말했다.
“조만간 다시 활동에 나설 테니 몸 관리는 필수야.”
“찍! 알겠다, 대장.”
“일단은 돈이 생겼으니 괜찮은 영약을 사고 장비도 만들고 싶은데…….”
접해보지 못한 영약들은 널려있으니 적당한 값을 주고 구매하면 되었다.
그 외에 큰 돈이 들어갈 항목이라면 바로 파티원들의 장비.
남호열의 도움으로 원정에서 사용했던 것들은 멀끔하게 수선해두었지만.
유지한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드리미움은 기다릴 수 없을지도.’
남호열이 연구 중인 드리미움은 아직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다음에 장비를 제작할 때 사용하고 싶었지만.
조만간 영웅 활동을 시작하려면 드리미움은 제외해야만 했다.
“시후야. 호열 씨한테 예산 범위 내에 사용할 수 있는 소재 목록을 뽑아달라고 전해줘.”
“네!”
그런데 그때였다.
마침 대화에서 이름이 언급되던 남호열이 유지한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지, 지한 씨!
“무슨 일이예요?”
—드리미움에 흠집이 생겼습니다!
“……?!”
*****
소식을 접한 유지한 파티는 길드의 공방으로 찾아갔다.
공방 앞에 나와 있던 남호열은 그들을 드리미움이 보관된 작업실로 안내했다.
“진짜 깜짝 놀라실 겁니다!”
흥분 상태인 남호열을 따라가서 꿈의 금속을 마주했을 때.
공방으로 찾아온 모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쩡한데?’
드리미움이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호열은 책상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보세요! 흠집이 있잖아요!”
유지한은 눈을 아주 가늘게 떴다.
그제야 드리미움 표면에 생긴 작은 생채기 같은 것이 보였다.
아주 자세히 보아야 눈에 띌 정도로 미세한 흠집.
표면이 긁혀서 떨어진 드리미움 가루는 머리카락의 두께보다 더 얇고 작았다.
“정말 엄청나죠?!”
“아, 예.”
“5시간 노력해서 저만큼 긁어냈습니다.”
기대와는 조금 다른 결과였지만.
들뜬 남호열의 분위기에 맞춰주는 유지한이었다.
“다들 오셨으니 지금 바로 사용해보겠습니다!”
“저걸요?”
민유리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드리미움 가루를 바라봤다.
저걸 대체 누구 코에 붙이겠다는 말인가.
그때 남호열이 작업대로 다가가서 말했다.
“이건 제가 미리 준비해둔 미니어처 단검입니다.”
“테스트하시려는 거죠?”
“네.”
거의 엄지 손톱만큼 작은 크기로 제작된 단검.
피규어에나 사용할 법한 미니어처 장비를 제작하는 건 소재를 아주 적게 투자하여 최종 결과물을 미리 확인하는 기술 중 하나였다.
보통은 노련한 대장장이만 사용하는 방법임에도 남호열은 거리낌이 없었다.
“다소 무식하지만, 마력 망치를 이용하여 검면에 강제로 달라붙게 하면…….”
쿵! 쿵! 쿵!
망치가 몇 번 휘둘러지자 드리미움 가루가 단검의 검면에 달라붙었다.
뒤이어 결과물을 꼼꼼히 확인한 남호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완성입니다.”
완성된 단검은 김시후의 손으로 넘어갔다.
장비의 효과를 분석하는데 마법사만 한 인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티팩트는 맞는 것 같은데.”
장난감 같은 단검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김시후.
그런데 그가 순간 미간을 찌푸리더니, 단검으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쑤우욱!
“오!”
그러자 놀랍게도 엄지 손톱 크기였던 단검이 진짜 단검 같은 사이즈로 커졌다.
겉면에 점처럼 박혀있던 드리미움은 어느새 날 안쪽으로 흡수된 상태.
깜짝 놀란 김시후가 단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대단해요! 크기는 물론이고 무게까지 진짜 단검처럼 변했어요.”
“확대와 축소가 자유로운 건가?”
“자유롭게 변하는 건 어려운 것 같고, 아마 사람마다 크기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마력을 삼킨 단검은 김시후의 손바닥에 딱 알맞는 크기로 변화했다.
금속에 불과한 물체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사용자를 알아보고 맞춤 크기로 변하는 것이었다.
‘소환이 가능한 거로군.’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형태로 유지하다가 필요한 순간에만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기능.
아티팩트를 제작할 때 특정 소재들의 조합으로 부여되는 기능이거늘.
드리미움에는 그것이 기본으로 탑재되는 것이었다.
“저, 저건 제가 작업한 수준을 뛰어넘었는데요?”
남호열이 노력한 것 이상으로 예기가 더해진 단검의 날.
작은 크기로 인해 투박할 수밖에 없었던 디자인은 남호열의 상상만큼이나 깔끔해져 있었다.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검날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명검을 떠올리게끔 했다.
손가락으로 검면을 튕겨봤을 때 느껴지는 강도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이거 당장 경매장에 올려도 손색이 없겠어요.”
“동감이야.”
드리미움이 고작 모래알보다 적게 들어갔을 뿐인데 이 정도의 변화를 일으키다니.
심지어 아주 무식하게 흡수시킨 걸 생각하면 기대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제대로 사용하면 얼마나 더 좋아진다는 거지?’
이런 소재를 갖고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범죄나 다름없는 일.
유지한은 다음 장비 제작에 반드시 드리미움을 투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영웅부의 협력 환자 제도.
특정 질환을 앓는 환자가 영웅부 연구소에 이따금 도움을 주면서 새로운 치료제 따위가 개발되면 해당 환자에게 먼저 혜택이 돌아가는 제도였다.
민유리의 동생인 민소연은 카지미르의 제안으로 그 협력 환자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이게 그 체력 증강제인가요?”
“그래. 신체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안전한 영약들을 배합 후 100배 희석한 액체다. 참고로 배합에 사용된 영약은 총 21종으로…….”
민유리는 병원에 찾아온 카지미르의 설명을 들으며 링거처럼 투명한 팩 안에 들어있는 분홍빛 액체를 바라봤다.
그녀의 동생은 이번에 환자들을 위해 새롭게 개발된 체력 증강제를 투여받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매우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다.”
“네. 알겠어요.”
“하여간 이쪽 의사들은 자존심만 세더군.”
카지미르는 옆에서 지켜보는 의사들을 째릿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민소연이 입원한 병원 측은 영약의 투여에 크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경력의 의사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영역의 물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카지미르는 정확한 연구 결과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의 반대를 하나씩 깨부수며 일을 진행하는 데 성공했다.
“유지한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다.”
카지미르가 매우 귀찮은 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을 밀어붙인 것은.
이것이 유지한의 부탁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지미르는 병실에서 민소연의 몸으로 영약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걸로 준비는 다 됐으니 3일에 한 번씩 환자의 상태를 내게 보고해라.”
“정말 감사합니다!”
오후 일정이 밀려있어 바쁘다는 카지미르가 병실을 떠나고.
민유리는 의자에 앉아 민소연의 상태를 살폈다.
‘표정이 변한 건가?’
그녀의 착각인지 동생의 표정은 한결 편해진 듯 보였다.
영약 투입 후 10분조차 지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때 병실에 들어온 유지한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라? 카지미르 갔어요?”
“네. 바쁘다고 가셨어요.”
“밥이라도 사주려고 했더니…….”
민유리에게 다가간 유지한이 민소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음? 표정이 변했나?”
“푸흐흐…….”
“……왜 웃어요?”
“아뇨,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시길래.”
민유리는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한 유지한을 두고 미소 지었다.
그에 유지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시간 될 때 동생분 많이 봐두세요. 조만간 멀리 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네요. 지금처럼 편하게 병원에 올 수는 없겠죠.”
영웅부의 계획에 따라 이세계로 가게 되면 장기간 가족들과 떨어져야만 하기에.
그녀에게 충고를 건네는 유지한이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
유지한은 민유리에게 비닐로 포장된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그 목걸이에 달린 장식물은 단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거 호열 씨가 만든 단검이잖아요!”
“목걸이로 만드니까 생각보다 예쁘죠?”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드리미움을 사용하여 제작된 무기.
유지한은 그것을 민유리에게 선물하고자 했다.
“착용해보실래요?”
“네?”
“목 잠깐만 앞으로 내밀어봐요.”
유지한은 비닐에서 목걸이를 꺼내어 민유리의 목으로 가져갔다.
그에 놀란 민유리가 황급히 자신의 목에서 머리칼을 치워냈다.
‘앗.’
유지한의 손끝이 목을 스치자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불쾌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으…….”
유지한이 목걸이의 고리를 잠그는 동안.
그와 바짝 붙어있는 민유리는 입술을 웅얼거리기만 했다.
끝내 목걸이가 목에 채워지자 유지한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체인은 제가 고른 건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네.”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거로 바꿔드릴게요.”
“아뇨, 아뇨! 이거면 됐어요. 정말로요.”
민유리는 귀한 선물을 받은 것마냥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근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선물 중에서는.
단연코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될 것 같았다.
*****
공간 전체에 나무 장식이 가득한 사무실.
창문 앞에 서 있는 중년의 남성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올리비아. 출국 준비는 하고 있나?”
“네.”
남성의 물음에 소파에 앉아있던 밝은 갈색 머리의 여성이 대답했다.
“한국에 가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겠군.”
“국적을 바꾼 뒤에는 처음이죠.”
“이번 출장에서 우리의 목표를 말해보게.”
“한국에서 등장한 이세계인과 IUPC의 테러를 조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짜’ 목표를 말해보게.”
한국에 입국하는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라 진짜 이유를 묻는 질문.
한층 진지한 얼굴이 된 여성이 말했다.
“말하는 친칠라의 확보 및 유지한 파티의 영웅들을 UN으로 끌어들이는 것.”
“아주 중요하다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촤락!
올리비아는 한쪽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유지한의 과거 연인이었다는 점. 계획에 네가 포함된 이유는 딱 그거 하나뿐이야.”
“……절 아주 좋아하던 남자였죠.”
“네 활약을 기대하마.”
UN 소속 영웅 올리비아 페리.
국적을 바꾸기 전 한국 이름은 남수지.
그녀는 영웅 학원에 다니던 시절 유지한의 동창이자.
유지한에게 고백을 했던 당일에 그를 차버렸던 그의 전 여자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