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필연
제리와 아뎀이 함께 갇혀있는 구금소.
민유리와 김시후는 양지철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하는 게 맞죠?”
김시후의 나무 지팡이가 허공에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지팡이의 주변으로 서서히 모여드는 그의 마력들.
그러한 과정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은.
[퀵 일루전]
이세계인들이 사용하던 환각 마법이었다.
아뎀은 김시후가 눈앞에서 펼쳐낸 마법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가 사용하는 마법과 비교해도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넌 정말로 천재구나.”
“요령만 있으면 이런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런 요령을 가진 마법사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된다고.”
아뎀은 노련한 스승 밑에서 환각 마법을 배웠던 마법사였다.
스승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던 그조차 마법을 익히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애를 먹었었는데.
김시후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원리를 파악하여 독자적으로 마법을 완성해냈다.
그 실력은 과거 아제시아의 마법사들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우리 자기 동료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성공적으로 환각 마법을 펼친 김시후를 보며 왜인지 뿌듯해하는 제리였다.
한편, 그녀 또한 전직 몬스터 부리미로서 민유리에게 조언을 건네고 있었다.
테이머와 그녀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던 방법이 뭔지 알아?”
“그 우유라는 약물을 이용한 거였잖아.”
“땡! 틀렸지롱!”
“틀렸다니?”
“그건 마력이 없는 지구인들을 강제로 각성시키기 위한 부작용 많은 물건이야. 우리는 본래 그런 것에 크게 기대지 않아.”
제리는 민유리에게 약물의 개입 없이 몬스터를 부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마력으로 몬스터의 의식을 강제로 빼앗아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끔 만드는 것.
“궁금해? 궁금하지?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줄까?”
“왜 그렇게 나한테 협조적인 거야?”
“네가 우리 달링 옆에서 도움이 돼야 할 거 아니야!”
“…….”
“뭐든 협조할 테니까……. 자기한테 주에 1번은 여길 방문해달라고 전해줘. 알았지?”
찡긋!
제리는 민유리에게 윙크를 날렸다.
유지한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협조하겠다는 제리였다.
감옥 같은 공간에 갇혀버린 뒤에도 그녀의 집착은 계속되고 있었다.
“찍찍!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싫다!”
칠라는 제리가 몬스터를 조종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민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 뜻은 알겠지만 거절하겠어.”
“흐응? 왜? 너한테 큰 도움이 될 텐데?”
“칠라는 내 노예가 아니라 친구이자 동료야.”
“찍! 역시 주인밖에 없다……!”
테이머로서 자신의 펫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민유리.
사이좋은 그들을 번갈아 보던 제리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제시아에도 너와 비슷한 말을 하던 사람이 있었어.”
“정상인이 있긴 했나 봐.”
“예전에 날 가르쳤던 마법 선생이야. 몬스터를 가축이 아니라 친구처럼 여기던 사람이었지. 멸망이 다가오자 허무하게 죽어버렸지만.”
잠시 땅을 내려다보던 제리가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내 스승의 방식을 알려줄게. 네 햄스터한테 악영향은 전혀 없을 거야.”
“자꾸 햄스터라 부르지 마라! 찍!”
“커다란 햄스터잖아.”
“찍, 찍찍! 이 여자 싫다!”
*****
카지미르와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며 인사를 건넨 유지한은 그를 따라 문 안으로 입장했다.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니로치는 유지한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오빠! 왜 이리 늦게 왔어! 빨리 얼굴 좀 보자니까.”
“이래저래 바빴지.”
“실프, 너도 말할 수 있게 됐다며?”
—우히! 또 만났네?
실프는 니로치와 카지미르를 향해 날아가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말문이 트이기 전 마주쳤던 두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샘플링은 어떻게 됐어?”
니로치가 눈을 반짝였다.
원정 도중에 큰 도움을 주었다던 유지한의 고유 스킬에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유지한의 답변은 간결했다.
“이 원정의 시작과 끝맺음을 함께 했다.”
이세계인의 존재를 처음 알아챈 것도, 각종 환각 마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끝내 그들을 퇴치할 수 있었던 것도 샘플링이 유지한에게 제공한 힘 덕분이었다.
그 기이한 힘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멸망에 한 발자국 가까워졌으리라.
“샘플링이 정신계 마법을 튕겨내지 못했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겠지.”
“그딴 마법은 통하지 않는 게 당연해.”
“……?”
최면과 환각 등, 각종 정신계 마법으로부터 유지한을 보호했던 샘플링.
니로치는 그걸 두고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내가 말했잖아! 오빠의 힘은 세상의 모든 진실에 닿아있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고작 마력으로 만들어낸 ‘현상’ 따위가 진실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해봤자 잘 모르겠는데.”
“어휴, 이 답답이! 내가 말하면 그냥 그런 줄 알아.”
니로치는 자신의 이해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유지한에게 조금 답답해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뇌를 꺼내다가 보여줄 수도 없으니 넘어갈 수밖에.
“손 줘.”
니로치는 유지한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고유 능력을 다시금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화아악—!
시작부터 진심을 내보이는 니로치의 이마 보석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에 유지한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고, 카지미르는 새까만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이전에도 눈부심을 겪어본 만큼 아주 능숙한 대처였다.
곧이어 빛이 사그라들자 니로치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예상대로 많이 변했어.”
“뭐가?”
“오빠의 고유 스킬이.”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한 니로치가 유지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대부분의 고유 스킬은 사용자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더 좋은 효과를 안겨준다.
당장 유지한의 앞에 있는 니로치 또한 그랬다.
그녀가 보유한 총 2개의 고유 스킬 중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건 과거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지만.
타인의 고유 스킬을 감정하는 고유 스킬은 과거와 비교했을 때 지금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정리해보자면 마력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엿볼 수 있고, 정신계 마법에 저항할 수 있고, 길을 잃었을 때 올바른 길을 찾아낼 수 있고…….”
“때로는 위험한 순간을 미리 감지하기도 했고, 마력의 구조를 맨눈으로 들여다볼 수도 있었어.”
“정말 어이가 없는 힘이군.”
유지한이 원정에 나가 있던 건 고작 2주일도 되지 않았거늘.
마지막으로 니로치가 그를 감정했던 순간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있었다.
옆에 있던 카지미르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이건 너무 비약적인 변화가 아닌가?”
고유 스킬의 변화는 대개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
짧으면 1년, 길면 1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서 변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유지한에게 일어난 건 변화가 아닌 진화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니로치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실프! 네가 설명 좀 해봐. 너도 샘플링을 알아본다며.”
—지한은 특별해!
“이 오빠가 특별한 거 누가 몰라? 어떻게 샘플링을 이용하는 건지 설명을 해달라고!”
—우히히! 나도 잘 모르겠지롱!
계약자의 고유 스킬을 알아보고 이용하는 정령조차 제대로 된 설명이 불가능한 힘.
니로치는 재차 실프에게 답변을 재촉했지만, 실프는 가볍게 웃어 재낄 뿐이었다.
“하여튼……. 오늘은 내가 준비해둔 테스트가 있어.”
니로치는 구석에 있던 책상을 유지한의 앞으로 가져왔다.
그 책상 위에는 일회용 종이컵들이 30개 이상 보관된 비닐이 놓여있었다.
그녀가 그 비닐을 카지미르에게 건네며 말했다.
“전부 다 꺼낸 다음 책상에 뒤집어서 놔줘.”
“왜 나한테 그러지?”
“어여쁜 숙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거야?”
“종이컵 정도는 네가 꺼낼 수 있을 텐데.”
“아, 해달라면 해줘!”
“귀찮아서 싫다.”
투정을 부리는 니로치를 보며 카지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자주 함께하고 있지만.
저 성격 더러운 여자에게 매번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이거 해주면 다음 주에는 밥 안 사줘도 돼.”
“……정말인가?”
“안 해주면 아주 비싼 거로 골라 먹을 거야!”
강제로 카지미르의 품에 비닐을 안겨주는 니로치.
이전에 그녀와 맺었던 약속이 있는 카지미르는 결국 얌전히 종이컵을 꺼내야만 했다.
니로치는 책상 위에 올라가는 종이컵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똑같이 생긴 종이컵 중에는 안쪽에 스티커를 붙여둔 컵이 하나 있어. 오빠는 그걸 찾아내면 돼.”
“이걸로 뭘 하려는 거야?”
“일단 해봐.”
잠시 후 종이컵이 빽빽하게 올라간 책상이 준비되었다.
니로치는 유지한에게 종이컵 단 1개만을 선택하도록 했다.
‘그냥 고르면 되겠지.’
테스트라고 뭐 복잡할 것이 있겠는가.
가만히 컵들을 내려다보던 유지한은 가벼운 마음으로 종이컵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니로치가 그 종이컵을 뒤집었을 때.
“정답.”
그 종이컵의 안쪽에는 니로치가 준비했던 스티커가 존재했다.
별 생각 없이 종이컵을 골랐던 유지한은 속으로 조금 놀라고 말았다.
“잠깐 뒤로 돌아봐. 실프 너도 같이.”
—에엥?
사사사삭!
유지한과 실프가 뒤를 보고 있는 사이.
종이컵들은 카지미르와 니로치에 의해 책상 위에서 이리저리 뒤섞였다.
그리고 유지한이 다시 종이컵을 선택하자.
“또 정답이야.”
“……!”
유지한은 또다시 정답을 찾아내고 말았다.
그 후로 약 25번 정도의 테스트가 더 진행되었지만.
유지한은 매번 스티커가 붙여진 종이컵을 찾아낼 뿐이었다.
모든 과정과 결과를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카지미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1번은 우연, 2번도 우연.
기준을 아주 느슨하게 잡아 3번까지 우연으로 취급하더라도.
그 이상을 넘어가는 순간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에 가까웠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투시 능력이라도 생긴 건가?”
“그런 게 있을 리가.”
뒤로 돈 상태에서 눈과 귀까지 가리고 있었던 유지한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특별히 정답을 찾는 데 사용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테스트를 준비한 니로치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내 가설이 조금은 증명됐어.”
“가설이라면?”
“지한 오빠가 과거에 샘플링을 사용하던 방식은 다양한 경우의 수에서 확률을 알아보며 가장 좋은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었잖아? 만약에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 종이컵을 찾는 데도 사용했을 테고.”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의 오빠는 확률을 알아보지 않고도 모든 정답을 찾아냈어. 이게 무슨 뜻이냐면…….”
니로치는 검지 손가락으로 유지한을 가리켰다.
“확률을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필요가 없다고?”
“굳이 확률을 계산하지 않아도 오빠는 항상 좋은 선택지를 고르게 될 거야.”
“……!”
유지한이 앞으로 뭘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거라고 말하는 니로치였다.
그에 유지한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신이 된 것도 아니고, 모든 순간에서 올바른 결정만을 내리는 게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유지한.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부탁이라니?”
“아주 급하고 중요한 부탁이다.”
갑자기 심각한 얼굴이 된 카지미르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할 준비를 마친 그는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이번 주 로또 번호 좀 알려주면 좋겠군.”
“…….”
—우히히! 로또 좋아하는 뱀파이어다!
속세에 찌든 뱀파이어의 결말은 이런 것이었다.